이 괘가 말하는 것
뇌풍항(恒)은 오래감의 괘다. 위는 우레(震), 아래는 바람(巽)이니, 우레가 치면 바람이 일고 바람이 불면 우레가 따라, 두 기운이 끊임없이 서로를 도우며 일어나는 형상이다. 여기서 말하는 항구함은 돌부처처럼 굳어 멈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레와 바람처럼 쉼 없이 움직이는 가운데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는 질서, 곧 살아 있는 균형이다. 변화가 빠른 시대일수록 사람은 묻게 된다. 무엇을 끝까지 붙들고, 무엇을 과감히 바꿀 것인가. 항괘는 바로 그 물음에 답하는 괘다.
주역이 말하는 항구함에는 두 축이 있다. 하나는 중심을 잃지 않는 굳건함이니, 괘사가 ’바르게 함이 이롭다(利貞)’고 한 대목이다. 다른 하나는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적응력이니, ’가는 바가 있음이 이롭다(利有攸往)’고 한 대목이다. 송나라 학자 진재 서씨는 이를 ’바뀌지 않는 항구함(不易)’과 ’그치지 않는 항구함(不已)’으로 갈라 말했다. 원칙과 본질은 바꾸지 않되, 실천과 방식은 쉼 없이 이어 간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흔들림 없는 중심이 없으면 나아감은 방황이 되고, 나아감이 없으면 중심은 굳어 죽은 돌덩이가 된다.
정이천은 여기에 날카로운 경고를 더한다. “한 가지로 정해지면 능히 항구할 수 없다(一定則不能恒).” 고인 물은 썩는다. 무조건 똑같이 버티는 것은 항구함이 아니라 정체다. 그래서 항괘의 참뜻은 ’끝나면 곧 다시 시작함(終則有始)’에 있다. 봄이 다하면 여름이 오고, 숨을 내쉬면 곧 들이쉬어야 생명이 이어진다. 하나의 목표나 성취에 안주하려 들지 말고, 끝나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다음을 시작하라. 매일의 수련이 지루해질 때, 무너뜨려야 할 것은 원칙이 아니라 방식이다. 코어는 지키되 걷는 길을, 앉는 시간을, 자극의 결을 바꾸어야 그 수련을 끝까지 끌고 갈 수 있다.
대상전은 이 이치를 몸가짐으로 거둔다. “군자는 이로써 서서 그 방소를 바꾸지 않는다(立不易方).” 우레가 치고 강풍이 불면 뭇사람은 허둥지둥 자기를 잃지만, 순임금은 매서운 바람과 천둥 비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비바람은 잠시 지나가는 현상일 뿐, 가슴속 원칙은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몸의 수련도 다르지 않다. 사방에서 압력이 밀려올 때 단전에 닻을 내려 중심축을 지키면, 손발은 도리어 바람처럼 자유로이 변할 수 있다. 중심이 굳건해야 말단이 무한히 움직인다. 오늘 나는 무엇을 변치 않고 지키고 있는가. 항괘는 말한다. 그 지키는 바(所恒)를 보면, 한 사람의 참모습이 드러난다고.
원문과 주석 — 괘사(卦辭)
恒,亨,无咎,利貞,利有攸徃。
항(恒)은 형통하고 허물이 없으니, 바르게 함이 이로우며, 가는 바가 있음이 이롭다.
정이천『이천역전』
恒者,常久也。恒之道可以亨通。恒而能亨,乃无咎也。恒而不可以亨,非可恒之道也,爲有咎矣。如君子之恒於善,可恒之道也;小人恒於惡,失可恒之道也。恒所以能亨,由貞正也,故云利貞。
항(恒)은 항상하고 오래감이다. 항구함의 도는 가히 형통할 수 있으니, 항구하되 능히 형통해야 비로소 허물이 없다. 계속 고집하는데 형통할 수 없다면 그것은 항구히 할 만한 도가 아니니 허물이 있다. 군자가 선(善)에 항구함은 항구히 할 만한 도요, 소인이 악(惡)에 항구함은 그 도를 잃은 것이다. 항구함이 능히 형통한 까닭은 바르고 곧음(貞正)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르게 함이 이롭다(利貞)’고 하였다.
夫所謂恒,謂可恒久之道,非守一隅而不知變也,故利於有徃。唯其有徃,故能恒也。一定則不能常矣。又常久之道,何徃不利?
무릇 이른바 ’항(恒)’이란 가히 항구히 할 만한 도를 말함이지, 한 구석만 지키며 변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아가는 바가 있음이 이롭다’고 하였다. 오직 그 나아감이 있기에 능히 항구할 수 있으니, 한 가지로 정해지면 능히 항상될 수 없다. 또 항상하고 오래가는 도를 지녔으니, 어딜 간들 이롭지 않겠는가.
주희『주역본의』및 어록
恒,常久也。爲卦震剛在上,巽柔在下,震雷巽風二物相與,巽順震動,爲巽而動,二體六爻隂陽相應,四者皆理之常,故爲恒。
其占爲能久於其道,則亨而无咎。然又必利於守貞,則乃爲得所常久之道,而利有所徃也。
항(恒)은 항상하고 오래감이다. 괘가 됨에 진(震)의 강이 위에 있고 손(巽)의 유가 아래에 있으며, 우레와 바람 두 사물이 서로 더불고, 손으로 순응하며 진으로 움직여 ’순응하면서 움직임(巽而動)’이 되고, 두 몸체의 여섯 효가 음양이 서로 응하니, 이 네 가지가 모두 이치의 떳떳함이다. 그러므로 항(恒)이 된다. 그 점(占)은 능히 그 도를 오래 하면 형통하고 허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반드시 바름을 지킴이 이로우니, 그래야 항상하고 오래갈 도를 얻어 가는 바가 있음이 이롭게 된다.
중계 장씨
恒,常久也。恒字左旁從立心,右旁從一日,乃立心如一日也。男上女下,男尊女卑,長男居外,長女居内,乃居室之恒,故爲恒也。
항은 항상하고 오래감이다. ’항(恒)’이라는 글자는 왼쪽에 마음 심(忄)을 세우고 오른쪽에 일(一)과 일(日)을 따랐으니, 곧 ’마음 세우기를 하루같이 한다’는 뜻이다. 남자가 위에 있고 여자가 아래에 있으며, 장남이 밖에 거하고 장녀가 안에 거하니, 곧 가정의 떳떳함이므로 항(恒)이 된다.
진재 서씨
聞之師曰,恒有二義。有不易之恒,有不已之恒。利貞者,不易之恒也;利有攸徃者,不已之恒也。合而言之,乃常道也。倚於一偏,則非道矣。
스승에게 듣기를 “항(恒)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바뀌지 않는 항구함(不易之恒)이 있고 그치지 않는 항구함(不已之恒)이 있다”고 하셨다. ’바르게 함이 이롭다’는 바뀌지 않는 항구함(원칙·본질)이요, ’가는 바가 있음이 이롭다’는 그치지 않는 항구함(실천·발전)이다. 이 둘을 합하여 말해야 떳떳한 도(常道)이니,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도가 아니다.
운봉 호씨
乾坤氣化之始,故曰元亨利貞。咸恒形化之始,故曰亨而不言元。然咸亨不以正徒爲人欲之感,恒亨不以正亦非天理之常也,故皆以利貞戒之。
건곤(乾坤)은 기화(氣化, 우주적 창조)의 시작이므로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 하였고, 함항(咸恒)은 형화(形化, 만물의 창조)의 시작이므로 ’형(亨)’이라 하고 ’원(元)’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함(咸)의 형통함이 바름으로써 하지 않으면 한갓 사람의 욕심이 될 뿐이요, 항(恒)의 형통함이 바름으로써 하지 않으면 또한 천리(天理)의 떳떳함이 아니다. 그러므로 함과 항 모두 ’바르게 함이 이롭다(利貞)’로써 경계하였다.
원문과 주석 — 단전(彖傳)
彖曰:恒,久也。剛上而柔下,雷風相與,巽而動,剛柔皆應,恒。恒,亨,无咎,利貞,久於其道也。天地之道,恒久而不已也。利有攸徃,終則有始也。日月得天,而能久照。四時變化,而能久成。聖人久於其道,而天下化成。觀其所恒,而天地萬物之情可見矣。
단전에 이르길, 항(恒)은 오래감이다. 강(剛)이 올라가고 유(柔)가 내려왔으며, 우레와 바람이 서로 더불고, 공손히 순응하며 움직이고, 강과 유가 모두 응하니, 이것이 항이다. ’항은 형통하고 허물이 없으니 바르게 함이 이롭다’는 그 도를 오래 함이요, 천지의 도가 항상하고 오래가서 그치지 않는다. ’가는 바가 있음이 이롭다’는 끝나면 곧 시작함이다. 해와 달이 하늘을 얻었으므로 능히 오래 비추고, 사계절이 변화하므로 능히 오래 이룬다. 성인이 그 도를 오래 하므로 천하가 교화되어 이루어지니, 그 항구히 하는 바를 관찰하면 천지만물의 정(情)을 볼 수 있다.
정이천『이천역전』
恒者,長久之義也。卦才有此四者,成恒之義也。剛上而柔下,謂乾之初上居於四,坤之初下居於初,剛爻上而柔爻下也,剛處上而柔居下,乃恒道也。雷風相與,雷震則風發,二者相須,交助其勢,故云相與,乃其常也。巽而動,下巽順,上震動,爲以巽而動。天地造化,恒久不已者,順動而已。動而不順,豈能常也?剛柔皆應,一卦剛柔之爻皆相應,剛柔相應,理之常也。此四者恒之道也,卦所以為恒也。
항(恒)은 길고 오래간다는 뜻이다. 괘의 재질에 이 네 가지가 있어 항의 뜻을 이루었다. 첫째 강상유하(剛上柔下), 지천태(泰)를 기준으로 건(乾)의 초효가 올라가 4효가 되고 곤(坤)의 초효가 내려와 초효가 되었으니, 강이 위에 처하고 유가 아래에 거함이 곧 항구한 도다. 둘째 뇌풍상여(雷風相與), 우레가 치면 바람이 일어 두 가지가 서로를 필요로 하며 그 기세를 돕는다. 셋째 손이동(巽而動), 아래는 손(巽)으로 순응하고 위는 진(震)으로 움직이니, 천지의 조화가 항구하여 그치지 않음은 이치에 순응하여 움직일 뿐이다. 움직이되 순응하지 않으면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는가. 넷째 강유개응(剛柔皆應), 한 괘의 강효와 유효가 모두 서로 응한다. 이 네 가지가 항구함의 도이며, 괘가 항(恒)이 된 까닭이다.
恒之道可致亨而无過咎,但所恒宜得其正,失正則非可恒之道也,故曰久於其道。天地之所以不已,葢有恒久之道,人能恒於可恒之道,則合天地之理也。天下之理,未有不動而能恒者也。動則終而復始,所以恒而不窮。凡天地所生之物,雖山嶽之堅厚,未有能不變者也。故恒非一定之謂也,一定則不能恒矣。唯隨時變易,乃常道也。故云利有攸徃,明理之如是,懼人之泥於常也。
항의 도는 형통을 이루어 허물이 없을 수 있으나, 다만 항구히 하는 바가 마땅히 바름을 얻어야 하니, 바름을 잃으면 항구히 할 만한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 도를 오래 함’이라 하였다. 천지가 그치지 않는 까닭은 항상하고 오래가는 도가 있기 때문이니, 사람이 항구할 만한 도를 항구히 지키면 천지의 이치와 합한다. 천하의 이치는 움직이지 않고 능히 항구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움직이면 끝났다가 다시 시작하니, 이 때문에 항구하여 궁하지 않다. 무릇 천지가 낳은 사물은 산악의 굳고 두터움이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항(恒)은 한결같이 정해진 것을 이름이 아니니, 한결같이 정해지면 능히 항구할 수 없다. 오직 때에 따라 변하고 바뀌는 것(隨時變易)이 떳떳한 도(常道)다. 그러므로 ’가는 바가 있음이 이롭다’고 하여, 이치가 이러함을 밝혀 사람들이 떳떳함에 얽매일까 염려한 것이다.
此極言常理。日月,隂陽之精氣耳,唯其順天之道,徃來盈縮,故能久照而不已。得天,順天理也。四時,隂陽之氣耳,徃來變化,生成萬物,亦以得天,故常久不已。聖人以常久之道,行之有常,而天下化之以成美俗也。觀其所恒,謂觀日月之久照、四時之久成、聖人之道所以能常乆之理。觀此,則天地萬物之情理可見矣。
이는 떳떳한 이치를 극도로 말한 것이다. 해와 달은 음양의 정기일 뿐이나, 오직 하늘의 도에 순응하여 가고 오며 차고 기울므로 능히 오래 비추어 그치지 않는다. ’하늘을 얻었다(得天)’는 천리에 순응함이다. 사계절은 음양의 기운일 뿐이나 가고 오고 변화하여 만물을 낳고 이루니, 이 또한 하늘을 얻었기에 항상 오래가서 그치지 않는다. 성인은 항상하고 오래가는 도로써 행함에 떳떳함이 있으니, 천하가 이를 본받아 교화되어 아름다운 풍속을 이룬다. ’그 항구히 하는 바를 본다’는 해와 달의 오래 비춤, 사계절의 오래 이룸, 성인의 도가 능히 항구한 이치를 관찰함을 이른다. 이를 관찰하면 천지만물의 정(情)과 이치를 볼 수 있다.
주희『주역본의』및 어록
本義:以卦體、卦象、卦德釋卦名義。或以卦變言剛上柔下之義,曰恒自豐來,剛上居二,柔下居初也,亦通。
본의: 괘체(강상유하)·괘상(뇌풍상여)·괘덕(손이동)으로써 괘 이름의 뜻을 풀이하였다. 혹자는 괘변(卦變)으로 ’강이 오르고 유가 내린다’는 뜻을 말하여 “항괘는 뇌화풍(豐)에서 왔으니 강이 올라 2효에 거하고 유가 내려와 초효에 거한 것”이라 하였으니 이 또한 통한다.
朱子曰:恒是箇一條物事,徹頭徹尾,不是尋常字。古字作恆,其說象一隻船,兩頭靠岸,可見徹頭徹尾。
주자가 말했다. “항(恒)은 하나의 사물이 머리부터 꼬리까지 관통함이니, 심상한 글자가 아니다. 옛 글자는 항(恆)으로 썼는데, 그 모양이 한 척의 배가 양쪽 언덕에 닿아 있는 상이니, 이로써 ’철두철미(끝까지 이어짐)’함을 알 수 있다.”
本義:恒固能亨且无咎矣,然必利於正乃爲久於其道,不正則久非其道矣。天地之道所以長久,亦以正而已矣。久於其道,終也;利有攸徃,始也。動静相生,循環之理,然必静爲主也。
朱子曰:正便能久。
본의: 항은 진실로 형통하고 허물이 없으나, 반드시 바름에 이로워야 ’그 도를 오래 함’이 되니, 바르지 않으면 오래하더라도 그 도가 아니다. 천지의 도가 장구한 까닭 또한 바름으로써 할 뿐이다. ’그 도를 오래 함’은 끝남(終)이요 ’가는 바가 있음이 이로움’은 시작(始)이니, 움직임과 고요함이 서로 낳는 것이 순환의 이치이나 반드시 고요함(静)을 위주로 해야 한다. 주자가 말했다. “바르면 곧 능히 오래간다.”
朱子曰:所謂不易者,亦湏有變通乃能不窮。君尊臣卑,分固不易,然上下不交也不得。論其體終是常,然體之常所以爲用之變,用之變所以爲體之常。恒非一定之謂,故晝則必夜,夜而復晝;寒則必暑,暑而復寒。若一定則不能常也。冬日則飲湯,夏日則飲水;可以仕則仕,可以止則止。如孟子辭齊王之金而受薛宋之餽,皆隨時變易,故可以爲常也。能常而後能變,能常而不已所以能變,及其變也常亦只在其中。伊川却說變而後能常,非是。
주자가 말했다. “이른바 ’바뀌지 않는 것’이란 또한 반드시 변하여 통함(變通)이 있어야 궁하지 않게 된다. 임금이 높고 신하가 낮은 분수는 진실로 바뀌지 않으나 상하가 교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본체(體)를 논하면 끝내 떳떳함이나, 체의 떳떳함은 쓰임(用)의 변화가 되고 쓰임의 변화는 체의 떳떳함이 된다. 항은 일정하게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낮이면 반드시 밤이 되고 밤이면 다시 낮이 되며, 추우면 반드시 덥고 더우면 다시 춥다. 한 가지로 정해지면 능히 떳떳할 수 없다. 겨울엔 뜨거운 물을 마시고 여름엔 찬물을 마시며, 벼슬할 만하면 벼슬하고 그칠 만하면 그친다. 맹자가 제나라 왕의 황금은 사양하고 설(薛)·송(宋)의 선물은 받은 것처럼, 이 모두가 때에 따라 변하고 바뀌는 것이므로 떳떳함이 될 수 있다. 능히 떳떳한 뒤에야 능히 변하고, 능히 떳떳하여 그치지 않으므로 능히 변하니, 그 변함에 이르러서도 떳떳함은 그 가운데 있다. 이천이 도리어 ’변한 뒤에 능히 떳떳하다’고 한 것은 옳지 않다.”
朱子曰:物各有箇情。人在此,决定是有箇羞惡惻隐是非辭譲之情。性只是箇物事,情却多般,或起或滅,然而頭面却只一般,長長恁地。這便是觀其所恒而天地萬物之情可見之義。
주자가 말했다. “사물은 각각 그 정(情)을 지닌다.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음에 결단코 수오(羞惡)·측은(惻隱)·시비(是非)·사양(辭讓)의 정이 있다. 성(性)은 하나의 사물이지만 정(情)은 도리어 여러 가지로 혹은 일어나고 혹은 꺼진다. 그러나 그 머리와 얼굴(본래의 떳떳함)은 도리어 한결같아 길이길이 이러하다. 이것이 바로 ’그 항구히 하는 바를 보면 천지만물의 정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중계 장씨
不能體常者不可以盡變,不能盡變者不可以體常。天地所以能常久者,以其能盡變也。易窮則變,變則通,通則久。乆而无弊者,其變之謂乎!知柔上剛下者爲變,則知剛上柔下者爲常矣;知震雷暴風爲變,則知雷風相與爲常矣。
떳떳함을 체득하지 못한 자는 변화를 다할 수 없고, 변화를 다하지 못하는 자는 떳떳함을 체득할 수 없다. 천지가 능히 항상하고 오래가는 까닭은 능히 변화를 다하기 때문이다. 역(易)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며 통하면 오래간다. 오래가면서도 폐단이 없는 것은 그 ’변화’를 이름일 것이다. 유가 올라가고 강이 내려가는 것(함괘)이 ’변화’임을 알면 강이 올라가고 유가 내려가는 것(항괘)이 ’상도’임을 알 것이요, 천둥과 폭풍이 ’변화’임을 알면 우레와 바람이 서로 돕는 것이 ’상도’임을 알 것이다.
쌍호 호씨
剛上柔下,乾坤交而雷風相與矣;巽而後動,卦體成而剛柔皆應矣。此名卦所以有取於恒也。亨无咎者,以其利在於貞也。恒久之大者莫如天地,天地之道亦貞觀而已。利有攸徃者,以二體相仍,終則有始也。巽終於三,有震陽以始之;震終於上,又有巽隂以始之,无間容息也。
강이 올라가고 유가 내려오니 건곤이 사귀어 우레와 바람이 서로 더불고, 공손히 한 뒤에 움직이니 괘체가 완성되어 강과 유가 모두 응한다. 이것이 괘 이름을 항(恒)에서 취한 까닭이다. 형통하고 허물이 없음은 그 이로움이 바름(貞)에 있기 때문이다. 항구하고 큰 것은 천지보다 큰 것이 없는데, 천지의 도 또한 바르게 보여줄 뿐이다. ’가는 바가 있음이 이롭다’는 두 몸체가 서로 이어져 끝나면 곧 시작하기 때문이다. 하괘 손(巽)이 3효에서 끝나면 상괘 진(震)의 양이 이를 시작하고, 진이 상효에서 끝나면 다시 손의 음이 이를 시작하니, 틈을 두어 쉴 수 없다.
겸산 곽씨
剛上柔下,剛柔之常也。雷風相與,二氣之常也。剛柔皆應,交感之常也。
’강상유하’는 강과 유의 떳떳함이요, ’뇌풍상여’는 두 기운의 떳떳함이요, ’강유개응’은 교감의 떳떳함이다.
동계 왕씨
恒之六爻,剛柔皆應。自初至上,三剛三柔,各居相應之地,理之常也。天地之道,自百刻積而爲晝夜,自晝夜積而爲寒暑。晝夜寒暑,相爲徃來,遲速進退,機緘不停,故終始相循,如環无端者,葢有恒而然也。
항괘 여섯 효는 강유가 모두 응한다. 초효부터 상효까지 세 강과 세 유가 각각 상응하는 자리에 거하니 이치의 떳떳함이다. 천지의 도는 일백 각(刻)이 모여 밤낮이 되고 밤낮이 모여 추위와 더위가 된다. 밤낮과 추위·더위가 서로 오고 가며 늦고 빠름, 나아가고 물러남의 기틀이 멈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끝과 시작이 서로 돌아 고리에 끝이 없는 것(如環无端)과 같으니, 대개 항구함이 있어 그러한 것이다.
운봉 호씨
咸以卦體、卦德、卦象釋卦辭,恒亦疊是三者,僅以釋卦名義。葢咸之感者易知,恒之所以爲久者未易知也。咸恒皆言利貞。咸止而說即是貞,恒巽而動,動未必貞也,故彖詳焉。
함(咸)괘는 괘체·괘덕·괘상으로 괘사를 풀이했는데, 항(恒)괘 또한 이 셋을 거듭 써서 겨우 괘의 이름 뜻만을 풀이하였다. 대개 함의 감응함은 알기 쉽지만 항이 오래가는 까닭은 쉽게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함과 항은 모두 ’이정(利貞)’을 말했다. 함은 그치고 기뻐하니 그것이 곧 바름(貞)이지만, 항은 순응하며 움직이니 움직임은 반드시 바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단전에서 바름을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성재 양씨
天地能變,故三百六十五度之推移終古而不息。日月能變,故或一月一周天,或一歲一周天,故其明不已。四時能變,故温凉者繼之以寒凛,寒凛者繼之以溽暑,循環不已。即是而推,无非由變而恒,恒而變也。
천지는 능히 변하므로 365도의 자리 옮김이 예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해와 달은 능히 변하므로 한 달에 한 번 혹은 한 해에 한 번 하늘을 돌아 그 밝음이 그치지 않으며, 사계절은 능히 변하므로 따뜻하고 서늘함을 추위로 잇고 추위를 무더위로 이어 순환하여 그치지 않는다. 이를 미루어 보면 변함으로 말미암아 항구하고, 항구하면서 변하지 않음이 없다.
원문과 주석 — 대상전(大象傳)
象曰:雷風,恒;君子以立不易方。
상전에 이르길, 우레와 바람이 항(恒)이니, 군자는 이로써 뜻을 세워 그 방소(方所, 원칙과 방향)를 바꾸지 않는다.
정이천『이천역전』
君子觀雷風相與成恒之象,以常久其德,自立於大中常久之道,不變易其方所也。
군자가 우레와 바람이 서로 더불어 항구함을 이루는 상을 관찰하여 그 덕을 항상 오래가게 하고, 대중(大中)의 항상하고 오래가는 도에 스스로 서서 그 방소(지위와 원칙)를 변하거나 바꾸지 않는 것이다.
서계 이씨
雷風,天下之至震動者。衆人當雷風震動之時,必倉皇自失,改其常度。唯德至於舜,然後弗迷。是舜能有常,故處風雷震動之時,視如平日,可見胸中之有常。故君子於此,當立不易方。若做箇事,確爾如是,初不因人作輟也。
우레와 바람은 천하에서 지극히 진동하는 것이다. 뭇사람은 우레와 바람이 진동하는 때를 당하면 반드시 당황하여 스스로를 잃고 그 떳떳한 법도를 고친다. 오직 덕이 순(舜)임금에 이른 뒤에야 미혹되지 않는다. (『서경』에 순임금이 ’매서운 바람과 천둥 비에도 길을 잃지 않았다(烈風雷雨弗迷)’는 고사가 있다.) 이는 순임금이 능히 떳떳함을 지녔기 때문이니, 비바람이 진동하는 때에 처해서도 평일처럼 보았으니 가슴속에 떳떳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군자는 여기서 마땅히 ‘서서 방소를 바꾸지 않아야’ 하니, 어떤 일을 함에 확고히 이와 같이 하여 애초에 남으로 인해 하거나 그만두지 않는다.
건안 구씨
巽,入也,而在内;震,出也,而在外。二物各居其位,則謂之恒。故君子體之,而立不易方。方者,理之所不可易者。若雷入而從風,風出而從雷,二物易位而相從,則謂之益矣。故君子體之,亦有遷改之義。此恒益二象之所以不同也。
손(巽)은 들어감이니 안에 있고, 진(震)은 나옴이니 밖에 있다. 두 사물이 각각 그 자리에 거하면 항(恒)이라 이른다. 그러므로 군자가 이를 체득하여 ‘서서 방소를 바꾸지 않는다’. 방(方)이란 이치상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우레가 들어가 바람을 따르고 바람이 나와 우레를 따르면 두 사물이 자리를 바꾸어 서로 따르는 것이니 풍뢰익(益)이라 이른다. 그러므로 군자가 이를 체득하면 또한 ’옮기고 고침(遷改)’의 뜻이 있다. 이것이 항과 익 두 괘의 상이 같지 않은 까닭이다.
운봉 호씨
雷風雖變,而有不變者存。體雷風之變者,爲我之不變者,善體雷風者也。
우레와 바람은 비록 변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 우레와 바람의 변화를 체득하여 나의 변하지 않는 것으로 삼는 자가 곧 우레와 바람을 잘 체득한 자이다.
동계 왕씨
《大學》曰「於止,知其所止」,而其所止之目則曰「爲人君,止於仁;爲人臣,止於敬;爲人子,止於孝;爲人父,止於慈;與國人交,止於信」。此不易之地也。君子立其身於此地,則所謂有常之德也。
『대학』에 “그침에 그 그칠 바를 안다”고 하였고, 그 그칠 바의 조목으로 “임금은 인(仁)에 그치고, 신하는 경(敬)에 그치며, 자식은 효(孝)에 그치고, 아버지는 자(慈)에 그치며, 나라 사람과 사귐에는 신(信)에 그친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뀌지 않는 자리(不易之地)이다. 군자가 그 몸을 이 자리에 세우면 이른바 떳떳한 덕이 있는 것이다.
태극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