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사는 양효가 음의 자리에 앉아 제자리를 얻지 못했고(부당위), 가운데도 아니다(부중). 항(恒)괘는 ’오래함’을 주제로 삼는 괘다. 오래하는 것은 본래 좋은 일이지만, 이 효가 말하는 것은 ’틀린 자리에서의 오래함’이다. 경문은 이를 사냥에 빗대 “사냥을 해도 잡은 짐승이 없다(전무금·田无禽)“고 했다. 짐승의 자취조차 없는 엉뚱한 숲에서 아무리 오래 그물을 쳐도 끝내 빈손인 형국이다.
정이천은 이 대목을 매섭게 못박는다. 사람의 일이란 그 도(道)를 얻으면 오래하여 공을 이루지만, 도를 얻지 못하면 아무리 오래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구사가 사냥하듯 항구히 애써도 짐승을 얻지 못함은 곧 “헛되이 힘만 쓰고 공이 없음(도용력이무공·徒用力而无功)“이다. 주자도 같은 결로, 점치는 자는 사냥해도 얻는 바가 없고 무릇 모든 일에서도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한다고 했다. 문제는 노력의 부족이 아니라 노력이 놓인 자리다.
그렇다면 왜, 똑같이 양이 음자리에 앉은 구이는 ’후회가 없어진다(회망·悔亡)’는데 구사는 헛수고인가. 운봉 호씨와 후재 풍씨는 한목소리로 ’가운데를 얻었느냐 아니냐의 분별(중부중지변·中不中之辨)’이라 답한다. 구이는 가운데 자리를 지켜 떳떳함을 얻었고, 구사는 그 중(中)을 놓쳤다. 게다가 호응해줄 짝인 초육마저 텅 비어 힘이 되지 못한다. 호씨는 이를 지수사(師)괘 육오가 “사냥하면 짐승이 있다(전유금)“고 한 것과 견준다. 그쪽은 응하는 짝이 강해 꽉 찼지만(강실), 항괘 구사의 짝 초육은 유약해 텅 비었으니(유허) 잡을 것이 없다. 절재 채씨는 구사를 ’변화를 좋아하는 자(호변자)’로 보아, 조급히 변덕하는 마음으로 깊이 숨어든 초효에 응하려니 끝내 서로 만나지 못한다 했고, 임천 오씨는 강해야 할 대부의 자리에 유약하게 앉았으니 곧 재주가 없음이라 어찌 짐승을 얻겠느냐 물었다.
그러니 오늘 몇 달째 애써도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면, 먼저 의심할 것은 노력의 양이 아니라 노력의 자리다. 더 오래, 더 세게 밀어붙이기 전에 잠시 멈추어 “나는 지금 올바른 숲에서 사냥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삽질을 오래 한다고 삽이 포크레인이 되지는 않는다. 몸을 닦는 자리에서는 이 이치가 더 정직하게 드러난다. 정작 길러야 할 근육에는 자극이 없고 엉뚱한 관절만 시큰거리는데도 정해둔 횟수를 채우려 고집한다면, 그것은 수련이 아니라 몸을 상하게 하는 헛심이다. 자세(位)가 어긋났을 때 필요한 것은 한 번 더 버티는 인내가 아니라, 즉시 멈추어 중심을 다시 잡는 결단이다. 진짜 항구함은 틀린 자리를 오래 지키는 데 있지 않고, 어긋남을 알아차렸을 때 미련 없이 자리를 바로잡아 다시 서는 데 있다.
원문과 주석 — 경문·소상전과 역대 풀이
경문과 소상전
九四:田无禽。 象曰:久非其位,安得禽也?
구사는 사냥을 해도 잡은 짐승이 없다(전무금). 소상전에 말하였다. 오래도록 그 자리가 아닌 곳에 있으니(구비기위), 어찌 짐승을 얻겠는가?
정이천 『이천역전』
以陽居隂,處非其位。處非其所,雖常何益?人之所為,得其道則久而成功,不得其道則雖久何益?
양으로서 음에 거하니 처함이 그 자리가 아니다. 그 마땅한 곳이 아닌 데 처했으니, 비록 항상되게 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사람의 하는 일이 그 도(道)를 얻으면 오래하여 공을 이루고, 그 도를 얻지 못하면 비록 오래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故以田為喻,言九之居四,雖使恒久如田獵而无禽獸之獲,謂徒用力而无功也。象傳:處非其位,雖久何所得乎?以田爲喻,故云安得禽也。
그러므로 사냥으로 비유하여 말하길, 구(양)가 4(음)의 자리에 거함이, 비록 사냥하듯 항상하고 오래하게 하더라도 짐승을 잡는 획득이 없는 것과 같으니, 헛되이 힘만 쓰고 공이 없음(도용력이무공)을 이른 것이다. (소상전 해설) 그 자리가 아닌 곳에 처했으니 비록 오래한들 무엇을 얻겠는가? 사냥으로 비유했으므로 “어찌 짐승을 얻겠는가”라고 한 것이다.
주자 『주역본의』
以陽居隂,久非其位,故爲此象。占者田无所獲,而凡事亦不得其所求也。
양으로서 음에 거하여 오래도록 그 자리가 아니므로(구비기위) 이 상(象)이 되었다. 점치는 자는 사냥을 해도 획득하는 바가 없고, 무릇 모든 일 또한 그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할 것이다.
제가 — 운봉 호씨(雲峯胡氏)·후재 풍씨(厚齋馮氏)
雲峯胡氏曰:本義謂九四以陽居隂,久非其位。然九二亦陽居隂而曰悔亡者,唯中則可常。九二中,九四不中故也。
운봉 호씨가 말하였다. 본의에서 ’구사가 양으로서 음에 거하니 오래도록 그 자리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구이 또한 양으로서 음에 거했는데도 ’후회가 없어진다(회망)’고 한 것은, 오직 가운데(中)라야 가히 떳떳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이는 중(中)하고 구사는 중(中)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厚齋馮氏曰:乆非其位,處不當位也。位不當與九二爻同,而休咎異者,中不中之辨也。
후재 풍씨가 말하였다. ’오래도록 그 자리가 아니다’함은 마땅한 자리에 처하지 못한 것이다. 자리가 부당함은 구이 효와 같으나, 그 길흉(휴구)이 다른 것은 중(中)을 얻었는가 얻지 못했는가(중부중지변)의 분별이다.
제가 — 운봉 호씨(雲峯胡氏, 지수사 괘와의 비교)
師之六五曰田有禽,五柔中而所應者剛,剛實,故曰有禽。恒之四以剛居不中,而所應者柔,柔虗,故曰无禽。
지수사(師)괘의 육오는 “사냥을 하면 짐승이 있다(전유금)“고 하였으니, 5효가 유중(柔中)하고 그 응하는 자(구이)가 강(剛)하여 강함은 꽉 차 있으므로(강실) “짐승이 있다”고 한 것이다. 항(恒)괘 구사는 강(剛)으로서 중하지 못한 데 거하였고, 그 응하는 자(초육)가 유(柔)하여 부드러움은 텅 비어 있으므로(유허) “짐승이 없다”고 한 것이다.
제가 — 절재 채씨(節齋蔡氏)
節齋蔡氏曰:四為震體而處位不中,好變者也。以好變之心,應浚恒之初,必不能相有也,故曰无禽。
절재 채씨가 말하였다. 구사는 진(震)의 체가 되고 자리에 처함이 중하지 못하니, 변화를 좋아하는 자(호변자)이다. 변화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깊이 파고들려는 초효(준항지초)에 응하려 하니, 필시 능히 서로 소유할(사귈) 수 없다. 그러므로 짐승이 없다고 한 것이다.
제가 — 임천 오씨(臨川吳氏)
臨川呉氏曰:非其位謂居柔。大夫以剛爲有才,居柔則是无才也。安能得禽哉?
임천 오씨가 말하였다. ’그 자리가 아니다’라는 것은 유(柔)에 거함을 이른다. 대부(4효)는 강(剛)함으로써 재주가 있다고 여기는데, 유의 자리에 거했으니 곧 재주가 없는 것이다. 어찌 능히 짐승을 얻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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