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 변덕을 줏대로 삼지 말라
구삼은 하괘 손(巽·바람)의 꼭대기에 있다. 양효가 양의 자리에 앉았으니 자리 자체는 바르다(得位). 문제는 성질이다. 지나치게 강하고(過剛) 가운데를 얻지 못했으며(不中), 나아가고 물러남에 결단이 없는 손괘 특유의 성향(進退不果)이 극에 달했다. 마땅히 지켜야 할 제자리를 항구히 지키지 못하고, 저 위에서 부르는 상육을 향해 마음이 쏠려 따라나선다. 정이천은 이를 “뜻이 상육을 따르려 하니, 항구히 처해야 할 곳에 처하지 않는다”고 풀었다. 오늘 한 말을 내일 뒤집는 사람, 곧 ’그 덕을 항상되게 하지 못하는 자(不恒其德)’다.
덕이 항구하지 않은 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수치다. ’혹 누군가 수치를 받들어 올린다(或承之羞)’는 말에서, 주자는 ’혹자(或者)’를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사람으로 읽는다. 어디서 오는지 모를 굴욕이 어느 날 문득 쟁반에 얹혀 배달되어 온다는 것이다. 남이 나에게 수욕을 보내주는 형국이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자의 말과 걸음은 누구와도 발을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상전이 “용납될 곳이 없다(无所容)“고 못박은 까닭이 여기 있다. 두 강한 이웃(구이·구사) 사이에 끼어 어느 쪽으로도 나아가지 못하니, 천지 사이에 몸 둘 자리가 없어진다.
가장 뼈아픈 대목은 ’정린(貞吝)’이다. 정이천은 이를 “항구하지 않음을 굳게 지켜 그것을 자기 항구함으로 삼는다”고 풀었다. 변덕을 고치기는커녕 변덕 자체를 줏대로 삼아 고집하니, 부끄러움을 면할 길이 없다. 공자는 이 효사를 논어 자로편에 끌어와, “사람이 항구함이 없으면 무당이나 의사조차 될 수 없다”는 옛말을 인용한 뒤 “점칠 것도 없다(不占而已矣)“고 잘라 말했다. 일관성이 무너진 사람에게는 미래를 물을 것조차 없다는 준엄한 경계다.
오늘 하루의 태도
항(恒)은 재능이 아니라 지구력의 덕이다. 한 번의 결심은 누구나 하지만, 그 결심을 오래 지켜 남이 나를 예측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신뢰의 뿌리다. 바깥 바람이 불 때마다 원칙을 갈아 끼우면, 정작 나 자신도 내일의 나를 알 수 없게 된다. 몸의 언어로 옮겨 보라. 힘은 근육의 세기가 아니라 척추의 축이 흔들리지 않는 데서 나온다. 아무리 강해도 중심이 서지 않으면 그 힘은 밖으로 전해지지 못하고, 어떤 날은 무리하고 어떤 날은 퍼지는 들쭉날쭉한 리듬은 끝내 몸에 부상이라는 수치를 안긴다. 오늘, 최근 내가 세운 원칙 가운데 분위기와 유혹에 밀려 몇 번이나 번복했는지 조용히 헤아려 보라. 매일 같은 강도로 자리를 지키는 것 — 그 단조로운 항구함이 도리어 사람을 세운다.
원문과 주석 — 정이천·주자·제가
경문과 소상전
九三:不恒其德,或承之羞,貞吝。
구삼은 그 덕을 항상되게 하지 않으니, 혹 누군가 수치를 받들어 올릴 것이라, 고집하면 부끄럽다.
象曰:不恒其德,无所容也。
상전에 말하였다. 그 덕을 항상되게 하지 않으니, 용납될 곳이 없다.
정이천 『이천역전』
三,陽爻居陽位,處得其位,是其常處也。乃志從於上六,不唯隂陽相應,風復從雷,於恒處而不處,不恒之人也。
삼효는 양효가 양자리에 거하여 처함에 그 지위를 얻었으니, 이는 그 떳떳한 거처이다. 그런데 뜻이 상육을 따르려 하니, 음양이 서로 응할 뿐 아니라 (하괘인) 바람이 다시 (상괘인) 우레를 따르는 것이다. 항구히 처해야 할 곳에 처하지 않으니, 항구함이 없는 사람이다.
其德不恒,則羞辱或承之矣。或承之,謂有時而至也。貞吝,固守不恒以爲恒,豈不可羞吝乎?
그 덕이 항구하지 않으면 곧 수욕을 ‘혹 누군가가 받들어 올릴’ 것이다. ’혹 누군가 받들어 올린다’는 것은 때가 되면 이른다는 뜻이다. ’정린’이란 항구하지 않음을 굳게 지켜 항구함으로 삼는 것이니(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을 자기 줏대로 삼으니), 어찌 가히 부끄럽고 인색하지 않겠는가?
人既无恒,何所容處?當處之地既不能恒,處非其據,豈能恒哉?是不恒之人无所容處其身也。
사람이 이미 항구함이 없으면 어느 곳에 용납되어 처하겠는가? 마땅히 처해야 할 땅에 이미 능히 항구하지 못했는데, 처함에 그 근거가 없는 곳이라면 어찌 능히 항구하겠는가? 이는 항구하지 못한 사람이 그 몸을 용납하여 처할 곳이 없다는 뜻이다.
주자 『주역본의』·어록
位雖得正,然過剛不中,志從於上,不能久於其所,故為不恒其德,或承之羞之象。或者,不知其何人之辭。承,奉也。言人皆得奉而進之,不知其所自來也。貞吝者,正而不恒爲可羞吝,申戒占者之辭。
자리는 비록 바름을 얻었으나 강함이 지나치고 가운데를 얻지 못하여, 뜻이 위를 따르므로 능히 그 처한 곳에 오래 있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덕을 항상되게 하지 않아 혹 수치를 받든다’는 상이 되었다. ’혹자(或者)’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승(承)’은 받든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모두 받들어 (수치를) 올릴 수 있으니, 그것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정린(貞吝)’이란 바르더라도 항구하지 않으면 가히 부끄럽고 인색하게 됨이니, 점치는 자를 거듭 경계한 말이다.
朱子曰:承如承奉之承,如人送羞辱與之也。
주자가 말하였다. ’승(承)’은 받들어 올린다는 뜻이니, 마치 남이 수욕을 보내서 주는 것과 같다.
제가(諸家)
겸산 곽씨(兼山郭氏)
九三剛已過中,而巽為不果,進退无常,不恒其德者也。
구삼은 강함이 이미 중(中)을 지났고, 손괘는 결단력이 없어 나아가고 물러남이 떳떳함이 없으니, 그 덕을 항구하게 하지 못하는 자이다.
후재 풍씨(厚齋馮氏)
巽爲進退不果,九二與九三同也。然九二以剛處柔而位得中,是以悔亡;九三過剛而不中,其究爲躁卦,是以不恒其德也。六五體震而以柔處尊位而得中,故爲恒其德,象意甚明。
손괘가 나아가고 물러남에 결단력이 없는 것은 구이와 구삼이 같다. 그러나 구이는 강으로서 유에 처하고 자리가 중을 얻었으므로 ‘후회가 없는(悔亡)’ 것이고, 구삼은 지나치게 강하고 중하지 못하며 그 궁극이 조급한 괘가 되므로 ‘그 덕을 항상되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육오는 진(震)의 체이면서 유(柔)로 존위에 처하여 중을 얻었으므로 ’그 덕을 항상되게 한다(恒其德)’고 하였으니, 상의 뜻이 매우 밝다.
운봉 호씨(雲峯胡氏)
九二得中故悔亡,九三不中故羞且吝。葢在恒之時,二爲久於中,三不中則不能久也。
구이는 중을 얻었으므로 후회가 없고, 구삼은 중하지 못하므로 부끄럽고 또 인색하다. 대개 항(恒)의 때에 있어서 이효는 ‘가운데에 오래하는’ 것이 되나, 삼효는 중하지 못하므로 능히 오래할 수 없는 것이다.
동곡 정씨(東谷鄭氏)
三過剛而純乎剛,既不常其德,又以其剛介於二剛之間,進退无所容於人也。
삼효는 지나치게 강하여 강함에 순수하니, 이미 그 덕을 떳떳하게 하지도 못하고, 또 그 강함으로 두 강함(이효·사효) 사이에 끼어 있으니 나아가고 물러남에 사람들에게 용납될 곳이 없는 것이다.
중계 장씨(中溪張氏)
无常之人,孔子謂不可爲巫醫,况其他乎?宜其无所容身於天地間也。
떳떳함이 없는 사람은 공자께서 ’무당이나 의사도 될 수 없다’고 하셨는데, 하물며 다른 것이겠는가? 진실로 그 몸을 천지 사이에 용납할 곳이 없는 것이 마땅하다. (논어 자로편 22장: 子曰 南人有言曰 人而無恒 不可以作巫醫 善夫 “不恒其德 或承之羞” 子曰 不占而已矣)
출전: 정이천 『이천역전』, 주자 『주역본의』·『주자어류』, 겸산 곽씨·후재 풍씨·운봉 호씨·동곡 정씨·중계 장씨는 『주역전의대전』소인(所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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