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괘가 말하는 것
익(益)은 보탬의 괘다. 앞의 손(損) 괘에서 위를 덜어 아래로 내려보낸 흐름이 여기서 완성된다. 위(임금·상부)를 덜어 아래(백성·기초)를 두터이 하니, 그래서 익(益)이라 부른다. 운봉 호씨의 말이 이 괘의 핵심을 찌른다. 무릇 괘는 안을 위주로 삼고 사물은 아래를 근본으로 삼으니, 아래를 보태는 것을 익이라 하는 것은 그 근본을 두터이 하기 위함이다. 자기를 낮추어 아래로 내려가는 마음, 그것이 이 괘가 처음부터 끝까지 말하는 태도다.
괘사는 드물게 진취적인 말을 두 번 쏟아낸다. 가는 바가 있음이 이롭고(利有攸往), 큰 내를 건넘이 이롭다(利涉大川). 다른 괘가 “나아감이 이롭다”고만 할 때, 익 괘는 여기에 “물을 건넘이 이롭다”를 겸한다. 왜인가. 괘상을 보면 위(巽)도 나무요 아래(震)도 나무라, 두 나무가 짜여 큰 배가 되고 그 속은 텅 비어 있다. 겸산 곽씨가 이른 대로, 가운데가 비어 있고 위아래가 모두 나무이니 큰 내를 건널 수 있는 것이다. 기초가 든든하고 속이 비어 있는 배라야 거친 물결을 헤쳐 나간다.
그러나 이 보탬은 아무 때나 퍼주는 것이 아니다. 건안 구씨가 손과 익을 나란히 놓고 못 박는다. 때(時)라는 것은 덜고 보탬의 기준이니, 위가 남고 아래가 부족할 때 위를 덜어 아래에 보태는 것 — 그것이 익의 때다. 만약 아래가 이미 넉넉하다면 굳이 보탤 필요가 없다. 무턱대고 베푸는 것은 무방(无方)이 아니라 낭비다. 가장 목마른 자리에, 가장 필요한 때에 쏟아붓는 것이 참된 보탬이다. 무릇 보태는 도는 때와 더불어 함께 행한다(與時偕行).
그렇다면 나 자신에게 가장 큰 보탬은 무엇인가. 상전이 답한다. 바람과 우레가 익이니, 군자는 선을 보면 곧 옮겨가고 허물이 있으면 곧 고친다(見善則遷 有過則改). 정이천은 이보다 사람에게 보탬이 되는 것이 없다 했다. 남의 선함은 바람처럼 재빨리 내 것으로 옮겨오고, 내 허물은 우레처럼 단호히 도려낸다. 주자는 여기에 무게의 차이를 덧붙인다. 선을 따르는 것(遷善)은 옅은 색을 희게 하는 일이라 가볍지만, 허물을 고치는 것(改過)은 새까만 것을 희게 하는 일이라 크게 용맹해야 비로소 이룬다. 밖에서 좋은 것을 흡수하고 안에서 나쁜 것을 부수는 이 격렬한 자기 혁신 — 그것이 내 몸과 삶에 가장 큰 이익을 쌓는 길이다. 기초를 채우는 일은 남을 향해서만이 아니라, 먼저 나 자신을 향한다.
훈장님의 풀이 — 허곡 선생님의 주역 강의에서
단전 첫 구를 푼다. "'益 損上益下 民說無疆' — 위(4효 양)를 덜어 아래(初)에 보태니 백성의 기쁨이 끝도 없다(無疆=지경·한계가 없음). '自上下下 其道大光' — 위로부터 밑에 있는 아래로 내려왔으니, 그 도(하늘의 것이 땅으로 내려와 생명이 되는 길)가 크게 빛난다." 그러나 못 박는다 — "이것은 자연적·민주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권력으로 퍼주는 복지가 아니다. (…) 저축·생산 없이 버는 대로 다 쓰면 집도 나라도 망한다."
그러면 익괘는 왜 망하지 않는가를 자연으로 가른다. "익괘의 益은 버는 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비가 와야 가뭄이 없어 생명이 사는 것처럼 써도 써도 무진장 돌고 도는 자연을 말한다. (…) 같은 損上益下라도 자연이면 좋은 괘요 인위면 나쁜 괘다."
'利涉大川 木道乃行'을 卦象으로 푼다. "큰 내를 건넘이 이로운 것은 나무의 도가 행해지기(木道乃行) 때문이다 — 益卦는 위(4·5·6)가 손하절괘(巽, 바람·가을나무)요 아래(1·2·3)가 진하련괘(震, 천둥·봄나무)라, 두 나무가 다 들어 뗏목이 되니 바다에는 나무만 떠서 큰 내를 건넌다. 손괘 하나나 진괘 하나만 든 괘는 利有攸往(갈 바를 둠)만 있고, 두 나무가 든 익괘에만 利涉大川이 있다."
원문과 주석 — 괘사(卦辭)
괘사 경문
益,利有攸往,利渉大川。
익(益)은 가는 바가 있음이 이로우며, 큰 내를 건너감이 이롭다.
정이천 전(傳)
益者,益於天下之道也,故利有攸往。益之道可以濟險難,利渉大川也。
익은 천하를 이롭게 하는 도이다. 그러므로 가는 바가 있음이 이롭다. 이롭게 하는 도는 험난함을 구제할 수 있으니, 큰 내를 건너감이 이로운 것이다.
주자 본의(本義)
益,增益也。為卦損上卦初畫之陽,益下卦初畫之隂,自上卦而下於下卦之下,故為益。卦之九五、六二皆得中正,下震上巽皆木之象,故其占利有所往,而利渉大川也。
익은 더하고 보탬이다. 괘가 됨에 상괘의 첫 획의 양(천지비의 九四)을 덜어 하괘의 첫 획의 음(비의 초6)에 보탠 것이니, 상괘로부터 내려와 하괘의 아래로 내려갔으므로 익이 된다. 구오와 육이가 모두 중정을 얻었고, 아래 진과 위 손이 모두 나무의 상이므로, 그 점이 나아감이 이롭고 큰 내를 건넘이 이롭다.
중계 장씨(中溪張氏)
益,増也。其卦下體本坤,上體本乾。損乾下爻以益坤下爻,其益在下,故曰益。處益之時,无所不利。以行則利往,以濟則利渉也。
익은 더하는 것이다. 그 괘의 하체는 본래 곤이고 상체는 본래 건이다. 건의 아래 효를 덜어 곤의 아래 효에 보태니, 그 보탬이 아래에 있으므로 익이라 한다. 익의 때에는 이롭지 않은 바가 없으니, 행함으로 말하면 나아감이 이롭고 구제함으로 말하면 건너감이 이롭다.
운봉 호씨(雲峰胡氏)
凡卦以内為主,凡物以下為本。損下謂之損,益下謂之益,而上之損益不與焉,厚其本也。他卦言利往者不言利渉,益兼之。蓋益以興利也。
무릇 괘는 안을 위주로 삼고 사물은 아래를 근본으로 삼는다. 아래를 더는 것을 손이라 하고 아래를 보태는 것을 익이라 하니, 위의 덜고 보탬은 그 이름에 관여하지 않았으니 그 근본을 두터이 하기 위함이다. 다른 괘는 나아감이 이롭다 하되 건넘이 이롭다 하지 않았는데, 익은 이 둘을 겸하였다. 대개 익으로써 이로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겸산 곽씨(兼山郭氏)
易象中虛,上下二體皆木,所以利渉大川。
주역의 상에 가운데가 비어 있고 상하 두 체가 모두 나무이니, 이 까닭에 큰 내를 건넘이 이롭다.
원문과 주석 — 단전(彖傳)
단전 경문
益,損上益下,民說无疆。自上下下,其道大光。利有攸往,中正有慶。利涉大川,木道乃行。益動而巽,日進无疆。天施地生,其益无方。凡益之道,與時偕行。
익은 위를 덜어 아래를 보태니 백성이 기뻐함이 끝이 없다. 위로부터 아래로 낮추어 내려가니 그 도가 크게 빛난다. 가는 바가 있음이 이로움은 중정하여 경사가 있음이요, 큰 내를 건넘이 이로움은 나무의 도가 행해짐이다. 익은 움직이되 공손하여 날로 나아감이 끝이 없다. 하늘이 베풀고 땅이 낳으니 그 보탬이 방향(한계)이 없다. 무릇 보태는 도는 때와 더불어 함께 행한다.
정이천 전(傳)
卦之為益,以其損上益下也。損於上而益下,則民說之无疆。自上而降已以下下,其道之大光顯也。
괘가 익이 된 것은 위를 덜어 아래를 보태었기 때문이다. 위를 덜어 아래를 보태면 백성의 기쁨이 끝이 없다. 위로부터 자기를 낮추어 아랫사람에게 몸을 낮추니, 그 도가 크게 빛나고 드러난다.
五以剛陽中正居尊位,二復以中正應之。是以中正之道益天下,天下受其福慶也。
오효가 강양 중정으로 존위에 거하고 이효가 다시 중정으로 응한다. 이 중정의 도로써 천하를 보태니, 천하가 그 복과 경사를 받는다.
益之為道,於平常无事之際,其益猶小;當艱危險難,則所益至大,故利涉大川也。益誤作木。或以為上巽下震,故云木道,非也。
익의 도는 평상시 무사할 때에는 보탬이 오히려 작으나, 간난하고 위험할 때를 당해서는 그 보탬이 지극히 크므로 큰 내를 건넘이 이롭다 한 것이다. (정이천의 주장: 본문의 ‘목(木)’ 자는 ‘익(益)’ 자의 오기이다. 혹자가 위가 손이고 아래가 진이라 ’나무의 도’라 하나 이는 틀렸다.)
天施地生,化育萬物,各正性命,其益可謂无方矣。方,所也。有方所則有限量,无方謂廣大无窮極也。
하늘이 베풀고 땅이 낳아 만물을 화육하여 각각 성명을 바르게 하니, 그 보탬이 끝이 없다 할 만하다. 방(方)은 장소다. 장소가 있으면 한량이 있으나, 무방은 광대하여 궁극이 없음을 이른다.
주자 본의(本義)
損益皆以道言,後世以聚斂掊克為損下益上者,非道也。動、巽,二卦之徳。乾下施,坤上生,亦上文卦體之義。
손과 익은 모두 도로써 말한 것이니, 후세에 세금을 긁어모으는 것을 ’아래를 덜어 위를 보탬’으로 삼은 것은 도가 아니다. 동(진)과 손은 두 괘의 덕이다. 건이 아래로 베풀고 곤이 위에서 낳음은 또한 윗글 괘체의 뜻이다.
주자 문답 (朱子曰) — 정이천 오기설 반박
或問:木道乃行,程傳以為木字本益字之誤,如何?朱子曰:㸔来只是木字。渙卦說「乘木有功」,中孚說「乘木舟虚」,以此見得只是木字。
혹자가 “’목도내행’을 정전은 ‘목’ 자가 ‘익’ 자의 오기라 했는데 어떠한가” 묻자, 주자가 답하였다. 보건대 단지 ‘목’ 자가 맞다. 환 괘에서 “나무를 타 공이 있다” 했고 중부에서 “나무를 타니 배가 비었다” 했으니, 이로써 단지 목 자가 맞음을 알 수 있다.
조여매(趙氏汝楳) · 파양 동씨(番昜董氏)
損下非聖人之得已,而益下乃聖人之本心。唐帝所謂「吾瘠天下肥」,亦此意也。
아래를 덜어냄은 성인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요, 아래를 보태줌은 성인의 본심이다. 요임금이 이른바 “내가 여위더라도 천하를 살찌우겠다” 한 것도 이 뜻이다.
魯哀公以年饑用不足,問於有若。有若對以「盍徹?」又對以「百姓足,君孰與不足?百姓不足,君孰與足?」蓋深有得於損上益下之㫖也。
노나라 애공이 흉년에 부족하자 유약에게 물으니, 유약이 “어찌 철법을 쓰지 않으십니까” 하고, 또 “백성이 족한데 임금이 누구와 부족하며, 백성이 부족한데 임금이 누구와 족하겠습니까” 하였으니, 위를 덜어 아래를 보태는 뜻을 깊이 터득한 것이다.
임천 오씨(臨川吴氏) · 절재 채씨(節齋蔡氏)
人之動而能卑巽,則日有進益无窮已也。《書》曰:「惟學遜志,務時敏,厥修乃来。」是也。
사람이 움직임에 능히 낮추고 공손하면 날로 나아가 무궁하다. 서경에 “오직 배움에 뜻을 겸손히 하고 때에 맞게 민첩하기를 힘쓰면 그 닦음이 온다” 한 것이 이것이다.
无疆以悠久言,无方以廣大言。與時偕行,又言益道之適乎時也。
무강은 유구함으로, 무방은 광대함으로 말한 것이다. 여시해행은 또 익의 도가 때에 적중함을 말한 것이다.
건안 구씨(建安丘氏) — 손과 익의 때 비교
時者,損益之準也。上不足而下有餘,則當損下而益上。可損而損,此損之時也。上有餘而下不足,則當損上而益下。可益而益,此益之時也。時者當其可之謂,此損益二彖,聖人皆以時言也。
때라는 것은 덜고 보탬의 기준이다. 위가 부족하고 아래가 남으면 아래를 덜어 위를 보태야 하니, 덜 만할 때 더는 것이 손의 때다. 위가 남고 아래가 부족하면 위를 덜어 아래를 보태야 하니, 보탤 만할 때 보태는 것이 익의 때다. 때란 그 마땅함에 해당함을 이르니, 손과 익 두 단전에서 성인이 모두 때로써 말씀하신 까닭이다.
원문과 주석 — 상전(象傳)
상전 경문
象曰:風雷,益。君子以見善則遷,有過則改。
상에 말하기를, 바람과 우레가 익이니, 군자는 이로써 선을 보면 곧 옮겨가고 허물이 있으면 곧 고친다.
정이천 전(傳)
風烈則雷迅,雷激則風怒,二物相益者也。君子觀風雷相益之象,而求益於已。
바람이 세차면 우레가 빠르고 우레가 격렬하면 바람이 성을 내니, 두 사물이 서로 보태는 것이다. 군자가 바람과 우레가 서로 보태는 상을 보아 자기 자신에게 보탬을 구한다.
為益之道,无若見善則遷,有過則改也。見善能遷,則可以見天下之善;有過能改,則无過矣。益於人者,无大於是。
보탬이 되는 도는 선을 보면 옮겨가고 허물을 고치는 것만 한 것이 없다. 선을 보아 옮겨가면 천하의 선을 볼 수 있고, 허물을 고치면 허물이 없어진다. 사람에게 보탬이 되는 것으로 이보다 큰 것이 없다.
주자 본의(本義)
風雷之勢,交相助益。遷善改過,益之大者,而其相益亦猶是也。
바람과 우레의 기세가 교대로 서로 돕고 보탠다. 선으로 옮겨가고 허물을 고침은 보탬 중에서도 큰 것인데, 그 서로 보탬이 또한 이와 같다.
주자 문답 (朱子曰)
遷善當如風之速,改過當如雷之猛。
선으로 옮겨감은 바람의 빠름과 같이 하고, 허물을 고침은 우레의 맹렬함과 같이 해야 한다.
問:莫是纔遷善便是改過否?曰:不然。遷善字輕,改過字重。遷善如滲淡之物要使之白,改過如黑之物要使之白,用力自是不同。
“선으로 옮겨감이 곧 허물을 고침이 아닙니까” 묻자, “그렇지 않다. 천선은 글자가 가볍고 개과는 무겁다. 천선은 옅은 물건을 희게 하려는 것과 같고, 개과는 새까만 물건을 희게 하려는 것과 같으니, 힘 씀이 자연히 다르다” 하였다.
중계 장씨(中溪張氏) — 안연의 불이과(不貳過)
撓萬物者莫疾乎風,動萬物者莫疾乎雷。風飛雷厲,交相助益。君子取象於此,見善則遷之,必如風之速;有過則改之,必如雷之迅。
만물을 흩날리는 것은 바람보다 빠른 것이 없고 만물을 움직이는 것은 우레보다 빠른 것이 없다. 바람이 날고 우레가 매서워 서로 돕고 보탠다. 군자가 여기서 상을 취해 선을 보면 옮겨가기를 바람의 빠름같이,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우레의 신속함같이 한다.
得善服膺且不貳過,惟顔氏子得之。而「聞義不能徙,不善不能改」者,夫子所以深憂之也。
선을 얻으면 가슴에 품고 또 두 번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오직 안회만이 얻었다. “옳음을 듣고도 옮겨가지 못하고 선하지 않음을 고치지 못함”은 공자께서 깊이 근심하신 바이다.
임천 오씨(臨川吴氏) · 운봉 호씨(雲峰胡氏)
遷善,巽象,巽在外,於人之善見則遷之,自外而益也。改過,震象,震在内,於已之過有則改之,自内而益也。
선으로 옮겨감은 손(상괘)의 상이니, 손이 밖에 있어 남의 선을 보면 옮겨가 밖으로부터 보탠다. 허물을 고침은 진(하괘)의 상이니, 진이 안에 있어 자기 허물을 고쳐 안으로부터 보탠다.
速於遷善則過當益寡,決於改過則善當益純。是遷善改過,又自有相益之功也。
선으로 옮겨감을 속히 하면 허물이 더욱 적어지고, 허물을 고침을 결단성 있게 하면 선이 더욱 순수해진다. 이는 천선과 개과가 또한 서로 보태주는 공로가 있는 것이다.
동래 여씨(東莱吕氏) — 손과 익의 결론
損益二象最切學者。損无如忿慾,益无如遷改。若甚易知,推到精宻處甚難。懲窒遷改,皆是用力處。
손과 익 두 상전은 배우는 자에게 가장 절실하다. 덜어냄은 분노와 욕망만 한 것이 없고, 보탬은 옮기고 고침만 한 것이 없다. 매우 알기 쉬운 듯하나 정밀한 곳까지 미루기는 매우 어렵다. 징계하고 막음(損)과 옮겨가고 고침(益)은 모두 힘을 써야 할 곳이다.
태극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