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괘가 말하는 것
산화비(山火賁)의 화려한 꾸밈이 다하면, 그 겉치레가 깎여 떨어지는 산지박(山地剝)의 때가 온다. 꽃이 열흘 붉지 못하듯, 꾸밈이 극에 이르면 반드시 시들어 떨어진다. 다섯 음(陰)이 아래에서부터 차올라 맨 위 하나 남은 양(陽)을 깎아 내리는 형국이다. 산이 땅 위로 높이 솟아야 하는데, 도리어 땅에 붙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다.
이런 때 주역은 단호하게 명한다. 가는 바를 두지 말라(不利有攸往). 나아가면 한 발자국에 무너진다. 소인이 자라고 군자가 병드는 시절이니, 정의감에 불타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나서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자살에 가깝다. 소인이 군자를 무너뜨리는 방식은 정면의 결단이 아니라 스며드는 침식이다. 말은 순하지 않고 이치는 곧지 못한 채, 날마다 달마다 젖어들 듯 갉아먹어 스스로도 알지 못하게 만든다. 맞서 힘껏 저항할수록 그 독침에 쏘여 문드러질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지킬 것인가. 말을 공손히 하고 자취를 감추어(遜言晦迹), 때에 따라 사라지고 자라남을 살펴 조용히 견딘다. 이것은 비겁이 아니라 마지막 한 알의 씨앗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인내다. 양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겨울의 추위 속에 잠복해 있을 뿐, 극에 이르면 반드시 돌아온다(極則必反). 박(剝) 다음에 복(復)이 오고, 한 줄기 양이 되살아난다. 달도 차면 기우는 소식영허(消息盈虛)의 이치, 이것이 하늘의 운행임을 믿는 것이 군자의 태도다.
여기서 몸으로 이어지는 길 하나. 겨울에 사냥하지 않는 곰은 굴 속에서 심박을 낮추고 봄을 기다린다. 분노도 억울함도 에너지의 낭비다. 반응하지 말고 관찰하며, 호흡을 고르고 나의 중심 하나를 지키는 것. 멈춤을 견디는 힘은 결국 몸의 고요에서 나온다.
훈장님의 풀이 — 허곡 선생님의 주역 강의에서
"꾸밈이 다하면(致飾然後) 형통도 다하므로(亨則盡矣) 떨어질 박(剝)으로 받는다 — 극단까지 가면 얼마 있다 망하는 경우가 많으니, 많이 아는 사람은 극(極)을 버린다. 어차피 되돌아올 길인데 왜 가나(極則必反)."
"산이 큰 대지에 부착되어 있는 것이 떨어질 박(剝)인데 — 거꾸로 해석하면, 그 높은 산은 큰 대지 위에 높게 있으니 안 무너진다. 전체를 잡아야 편안해 보이지, 딱 그것만 끼워서 보니 곧 무너질 것 같다. 불안한 곳이 편안한 곳이 되는 것이다."
"낮은 놈이 높은 데 붙어 있어야 되는데 거꾸로 낮은 데 높은 놈이 붙어 있으니 — 임금에게 백성이 붙어 있는 게 아니고 백성에게 임금이 붙어 있는 것이다. 아래가 두터우면 위가 편안하고, 아래가 깎이면 위가 위태롭다."
"군자는 소식영허(消息盈虛)를 숭상하니 — 자연 따라 사라지고 살아나고, 채우면 버리고 버리면 가지는 것이 하늘의 운행(天行)이다. 욕심을 앞세우고 자연섭리를 조금 하면 망할 염려가 많고, 자연을 따라 약간의 욕심을 가미하는 것이 판단력이다."
원문과 주석 — 괘사(卦辭)
剝,不利有攸往。
박은 가는 바를 둠이 이롭지 않다(나아가면 안 된다).
정이천『이천역전』
剝者,羣隂長盛,消剝於陽之時。衆小人剝喪於君子,故君子不利有所往。
박이라는 것은 뭇 음이 자라나 성대하여 양을 깎아 없애는 때이다. 뭇 소인들이 군자를 깎아내리고 잃게 만드는 때이므로, 군자는 가는 바를 둠이 이롭지 않다.
唯當㢲言晦迹,隨時消息,以免小人之害也。
오직 마땅히 말을 공손히 하고 자취를 감추어, 때에 따라 사라지고 자라남을 살펴서, 이로써 소인의 해를 면해야 한다.
주자『주역본의』
剝,落也。五隂在下而方生,一陽在上而将盡,隂盛長而陽消落,九月之卦也。
박은 떨어지는 것이다. 다섯 음이 아래에 있어 바야흐로 생겨나고, 한 양이 위에 있어 장차 다하려 하니, 음이 성대하게 자라나고 양이 사라져 떨어지는 9월의 괘다.
隂盛陽衰,小人壯而君子病。又内坤而外艮,有順時而止之象。故占得之者,不可有所往也。
음은 성하고 양은 쇠하니, 소인은 씩씩하고 군자는 병든다. 또한 안은 곤(순응)이고 밖은 간(멈춤)이니, 때에 순응하여 그치는 상이 있다. 그러므로 점쳐서 이 괘를 얻은 자는 가히 가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된다.
운봉 호씨(호병문)
剝,落之也。五隂剥一陽,欲落之以至於盡也。否三隂三陽,隂陽猶相等,且曰不利君子貞。
박은 떨어뜨리는 것이다. 다섯 음이 한 양을 깎아서 떨어뜨려 다하는 데 이르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천지비(否)괘는 삼음 삼양이라 음양이 아직 서로 대등한데도 군자의 바름이 이롭지 않다고 했다.
剝五隂而一陽,小人盛而君子孤,如之何可有所往哉?雖然,陽無可盡之理也,一變而後利有攸往也。
하물며 박은 오음 일양이라, 소인은 성대하고 군자는 외로우니 어찌 가히 가는 바를 둘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양이 가히 다 없어질 수는 없는 이치가 있으니, 한번 변한 뒤에야(다음 괘인 지뢰복이 되면) 가는 바가 이로울 것이다.
임천 오씨(오징)
以卦體而言,則隂長以至五,僅存一陽,再往則幷一陽消之矣,故不宜有往。以占者而言,則小人極盛之時,當順時而止,不可以有所往也。
괘체로 말하자면 음이 자라나 다섯째 효에 이르러 겨우 한 양만 보존했으니, 다시 나아가면 아울러 한 양마저 사라질 것이므로 마땅히 감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점치는 자로 말하자면 소인이 지극히 성대한 때이니, 마땅히 때에 순응하여 멈춰야지 가히 가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된다.
원문과 주석 — 단전(彖傳)
彖曰:剝,剝也,柔變剛也。不利有攸往,小人長也。順而止之,觀象也。君子尚消息盈虚,天行也。
단전에 이르길: 박은 깎아내는 것이다. 유(음)가 강(양)을 변하게 하는 것이다. 가는 바를 둠이 이롭지 않음은 소인이 자라나기 때문이다. 순응하여 멈추는 것, 이것이 괘의 상을 관찰함이다. 군자는 사라지고 자라나며 차고 비는 이치를 숭상하니, 이것이 하늘의 운행이다.
주자『주역본의』
以卦體釋卦名義。言柔進于陽,變剛為柔也。
괘체로써 괘 이름의 뜻을 풀이한 것이다. 유가 양에게로 나아가 강을 변하게 하여 유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以卦體卦徳釋卦辭。
괘체와 괘덕으로써 괘사를 풀이한 것이다.
정이천『이천역전』
剝,剝也,謂剝落也。柔變剛也,柔長而剛變也。夏至一隂生而漸長,一隂長則一陽消。至於建戌,則極而成剥,是隂柔變剛陽也。
박은 깎는 것이니 깎여서 떨어짐을 이른다. 유변강은 유가 자라나서 강이 변하는(사라지는) 것이다. 하지에 한 음이 생겨나 점차 자라는데, 한 음이 자라나면 한 양이 사라진다. 술월(음력 9월)에 이르면 극에 달하여 박을 이루니, 이것이 바로 음유가 강양을 무너뜨리게 하는 것이다.
君子當剝之時,知不可有所往,順時而止,乃能觀剝之象也。君子存心消息盈虚之理,而能順之,乃合乎天行也。順之則吉,逆之則凶。君子隨時敦尚,所以事天也。
군자가 박의 때를 당하여 가히 가는 바를 두어서는 안 됨을 알고, 때에 순응하여 멈추니 이에 능히 박괘의 상을 관찰한 것이다. 군자가 소식영허의 이치에 마음을 두어 능히 순응하니 곧 하늘의 운행에 합치되는 것이다. 이를 순종하면 길하고 거스르면 흉하니, 군자가 때를 따르고 돈독히 숭상함은 이로써 하늘을 섬기는 까닭이다.
건안 구씨(구부국)
自一柔變剛而為姤,再變遯,三變否,四變觀,五變剝。更進則盡變,而卦為純坤矣。剝言不利有攸往,則曰順而止;復言利有攸往,則曰以順行。觀聖人利不利之辭,則知其為君子發也。
하나의 유가 강을 변하게 하여 천풍구가 되고, 두 번 변하여 천산둔, 세 번에 천지비, 네 번에 풍지관, 다섯 번 변하여 산지박이 된다. 다시 나아가면 모두 변하여 괘가 순전한 중지곤이 된다. 박에서는 가는 바가 이롭지 않다 하여 순응하여 멈춘다 했고, 복에서는 가는 바가 이롭다 하여 순응하여 행한다 했다. 성인의 이롭다 이롭지 않다는 말씀을 관찰해보면, 그것이 군자를 위해 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용산 진씨(진보)
夬彖曰剛決柔,而剝曰柔變剛,何也?曰:此君子小人之辨也。君子剛明果斷,小人隂賊險很。君子之去小人,聲其罪與天下共棄之,名正言順,故曰決。
택천쾌 단전에서는 강이 유를 결단한다 했고 산지박에서는 유가 강을 변화시킨다 했으니 어째서인가. 답하기를, 이것이 바로 군자와 소인의 분별이다. 군자는 강명하고 과단성이 있으나 소인은 음침하게 해치고 험하며 사납다. 군자가 소인을 제거할 때는 그 죄를 성토하여 천하와 더불어 함께 그를 버리니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조롭다. 그러므로 결단한다고 한다.
小人之欲去君子,辭不順,理不直,必萋斐浸潤以侵蝕之,使之日消月鑠而不自知,故曰變。一字之間,君子小人之情狀皦然矣。
반대로 소인이 군자를 제거하고자 할 때는 말은 순조롭지 않고 이치는 곧지 못하다. 반드시 아름다운 무늬(거짓 꾸밈)와 점차 젖어 드는 방식으로써 침식해 들어가, 그로 하여금 날로 사라지고 달로 녹게 만들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변한다고 한 것이다. 결단과 변화라는 한 글자 사이에 군자와 소인의 실정이 명백하도다.
운봉 호씨(호병문)
凡卦畫皆象也,皆當觀也。於剝獨言之者,為處變君子言也。消息盈虚四字,皆為陽言。復者陽之息,姤者陽之消,乾者陽之盈,坤者陽之虚。剝五隂而一陽,則陽之消而至於虚者也。其變也大矣。然亦天行也。故剥曰天行,復亦曰天行。
무릇 모든 괘의 획은 다 상이며 다 마땅히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독 박괘에서만 상을 관찰한다고 말한 것은 변란에 대처하는 군자를 위해 말한 것이다. 소식영허 네 글자는 모두 양을 위하여 말한 것이다. 복은 양의 자라남이요, 구는 양의 사라짐이며, 건은 양의 가득 참이요, 곤은 양의 비어있음이다. 박은 오음 일양이니 곧 양이 사라져서 허에 이르는 것이다. 그 변화가 크다. 그러나 이 또한 하늘의 운행이다. 그러므로 박괘도 천행이라 하고 복괘도 천행이라 한다.
용산 이씨(이중정)
消息盈虚,乃時運之使然。君子尚之,與時偕行。雖處剥之時,而不至於咨嗟戚憂,而變其所守者,知其後之必復,而屏心寧耐以待之也。
소식영허는 시운이 시킨 것이다. 군자가 이를 숭상하여 때와 더불어 함께 행한다. 비록 박의 때에 처해 있더라도 탄식하거나 근심하여 그 지키는 바를 변하는 데 이르지 않는 것은, 그 뒤에 반드시 돌아옴이 있음을 알고 마음을 닫고 편안히 인내하며 기다리기 때문이다.
不然,心憤羣隂之進,盡力以抗之,則必激起其蠆尾之毒,甘受其摧剥糜爛之禍,而不可救藥矣。
그렇지 않고 만약 억지로 싸우려 들어, 뭇 음들이 나아오는 것에 마음으로 분개하여 있는 힘을 다해 저항한다면, 반드시 저들의 전갈 꼬리의 독을 격발시켜서, 저들이 꺾고 벗기며 문드러뜨리는 화를 달게 받게 될 것이니, 가히 약으로도 구제할 수 없게 된다.
원문과 주석 — 상전(象傳)
象曰:山附於地,剝。上以厚下安宅。
상전에 이르길: 산이 땅에 붙어 있는 것이 박이니, 윗사람은 이로써 아래를 두텁게 하여 그 집을 편안히 한다.
정이천『이천역전』
艮重於坤,山附於地也。山髙起於地,而反附著於地,圮剝之象也。上謂人君與居人上者。觀剝之象,而厚固其下,以安其居也。
간이 곤 위에 중첩되어 있으니 산이 땅에 붙어 있는 것이다. 산은 땅에서 높이 솟아오르는 것인데 도리어 땅에 딱 붙어 있으니 무너지고 깎이는 상이다. 상은 인군과 남의 윗자리에 거하는 자를 이른다. 박의 상을 관찰하여 그 아래를 두텁고 견고하게 함으로써 그 거처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下者,上之本。未有基本固而能剝者也。故上之剝,必自下。下剝則上危矣。為人上者,知理之如是,則安飬人民,以厚其本,乃所以安其居也。書曰:民惟邦本,本固邦寧。
아래는 위의 근본이다. 기초와 근본이 견고한데도 능히 깎이는 일은 있지 않다. 그러므로 위가 깎이는 것은 반드시 아래로부터 시작된다. 아래가 깎이면 위가 위태로워진다. 남의 윗사람 된 자가 이치가 이와 같음을 안다면 곧 인민을 편안히 기르고 그 근본을 두텁게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그 거처를 편안히 하는 까닭이다. 서경에 이르길 백성은 오직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해야 나라가 편안하다고 했다.
주자『주역본의』
厚下者,乃所以安宅。如山附於地,唯其地厚,所以山安其居而不摇。人君厚下以得民,則其位亦安而不摇,猶所謂本固邦寧也。
아래를 두텁게 하는 것이 곧 집을 편안히 하는 까닭이다. 마치 산이 땅에 붙어 있는 것과 같으니 오직 그 땅이 두터워야 산이 그 거처에 편안하여 흔들리지 않는다. 인군이 아래를 두텁게 하여 민심을 얻으면 그 지위 또한 편안하여 흔들리지 않으니 이른바 본고방녕과 같은 것이다.
운봉 호씨(호병문)
不曰君子而曰上,上指一陽,下指五隂也。隂陽之分明矣。厚下坤地象,安宅艮土象。
군자라고 하지 않고 상이라고 한 것은, 상은 한 양을 가리키고 하는 다섯 음을 가리킨다. 음양의 구분이 명확하다. 후하는 곤인 땅의 상이요, 안택은 간인 흙의 상이다.
절재 채씨(채연)
卦以下剝上取義,乃小人剝君子也;象以上厚下取義,乃人君厚生民也。下剝上者,成剝之義;上厚下者,治剝之道也。
괘는 아래가 위를 깎는 것에서 뜻을 취했으니 곧 소인이 군자를 깎는 것이고, 상은 위가 아래를 두텁게 하는 것에서 뜻을 취했으니 곧 인군이 백성의 삶을 두텁게 하는 것이다. 아래가 위를 깎는 것은 박을 이루는 뜻이요, 위가 아래를 두텁게 하는 것은 박을 다스리는 도이다.
후재 풍씨(풍의)
以上下厚薄取象,而不以隂陽消長為義,此聖人用卦之微權也。
위아래의 두텁고 얇음으로써 상을 취하고 음양의 소장으로써 뜻을 삼지 않았으니, 이것이 성인이 괘를 쓰는 은밀한 권도다.
태극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