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괘가 말하는 것
중뢰진(重雷震)은 우레가 위아래로 거듭 치는 형상이다. 갑작스러운 충격, 예고 없는 재난, 삶을 뒤흔드는 사건 — 진(震)은 그 진동의 때를 말한다. 그런데 괘사의 첫 두 글자가 놀랍다. “진(震)은 형통하다(震亨).” 어찌하여 뒤흔들리는 충격이 형통함으로 이어지는가. 정이천은 네 가지로 밝혔다. 떨쳐 일어나고(震而奮), 나아가며(動而進), 두려워하여 닦고(懼而脩), 주장이 있어 큰 것을 보전한다(有主而保大). 진동은 파괴가 아니라, 잠든 것을 깨워 새 생명을 여는 봄의 우레다. 설괘전에 “하느님이 진(震)의 방위에서 나온다(帝出乎震)“고 한 까닭이 여기 있다.
이 괘가 거듭 새기는 마음가짐은 “진래혁혁, 소언아아(震來虩虩, 笑言啞啞)“에 담겨 있다. 진동이 올 때 거미처럼 깜짝 놀라 돌아보며 두려워하면(虩虩), 그 뒤에 도리어 웃으며 말함이 화평해진다(啞啞). 순서가 중요하다. 먼저 두려워할 줄 아는 자가 나중에 편안한 법이다. 무서운 것을 무섭지 않다 하는 것은 어리석음이니, 두려우면 두렵다 하고 대처해야 한다. 억지로 참아 눌러두면 충격은 몸속에 쌓여 병이 된다. 두려움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자기를 닦는 힘으로 돌리는 것 — 이것이 진괘의 지혜다.
괘사의 절정은 “진경백리, 불상비창(震驚百里, 不喪匕鬯)“이다. 우레가 백 리를 놀라게 하는 그 순간에도,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은 손에 든 제기(匕鬯)를 떨어뜨리지 않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정성을 다하면 두려움이 없기(至誠則無懼) 때문이다. 정신을 한곳에 쏟으면 칼날이 눈앞에 오고 호랑이가 뒤에서 닥쳐도 느끼지 못하니, 백 리를 울리는 우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급한 우레에 놀라 숟가락을 떨어뜨린 유비(劉備)는 천하의 제주가 될 수 없었고, 거센 바람과 뇌우에도 흔들리지 않은 순(舜)임금은 천자의 자리를 이었다. 큰 진동 앞에서 중심을 잃지 않는 힘은 오직 성경(誠敬)에서 나온다.
상전은 이 도를 실천의 언어로 압축한다. “거듭된 우레가 진(震)이니, 군자는 이를 보고 두려워하며 닦고 살핀다(君子以恐懼脩省).” 두 박자가 있다. 먼저 두려워하고(恐懼), 이어서 자기 몸을 바로 닦고 허물을 돌아본다(脩省). 다만 두려워하기만 하고 닦지 않으면, 충격이 지나가는 순간 잊어버리니 두려워하지 않은 것과 같다. 몸과 수련의 자리도 이와 다르지 않다. 대련에서 무너진 뒤(恐懼) 그 기법을 돌아보고 고치는 것(脩省)이 실력이 자라는 유일한 길이다. 매미가 허물을 벗듯, 사람은 두려움을 만날 때마다 한 번씩 거듭나는 것이다. 두려움을 미리 훈련하며 사는 자에게 복이 오고(恐懼則福), 편안함에 젖어 방심하는 자에게 화가 온다(泰侈則禍).
훈장님의 풀이 — 허곡 선생님의 주역 강의에서
천둥번개를 안 무서워하는 자는 없으니 — 호랑이·사자도 천둥 나오면 다 피한다. 그런데 제사 주인은 어찌 편안한가 — 정성을 많이 쏟으면 두려운 게 없다(至誠則無懼). 정성을 한곳에 쏟으면(精神一到) — 칼날이 눈앞에 오고 사나운 호랑이가 뒤에 바짝 따라와도 못 느끼니(白刃前臨 猛虎後迫 皆莫之覺), 천둥 백 리에도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논어 향당편에 공자도 천둥이 치면 잠을 안 자고 옷을 갖추고 방 가운데 앉아 끝날 때까지 기다렸으니 — 기도(종교)가 아니라 정성을 그렇게 쏟은 것이다. (…) '우레가 거듭됨이 震이니, 군자는 이를 보고 두려워하며 자기를 닦고 살핀다(洊雷 震 君子以恐懼修省)' — 군자는 그 떨치는 위세를 보아 두려워하고(恐懼), 자기를 닦고 허물을 살핀다(修省). 하늘의 위세를 두려워할 줄 알아 몸을 바로 닦고, 내 인생에 잘못이 없나 살펴 고친다.
군자는 위태함으로 편안을 삼으니(以危爲安) — 늘 위태를 느껴야 편안을 안다(땀이 나야 시원함을 안다). 그냥 편안한 삶은 없으니 — 죽음과 삶이 동시에 붙어 있고(生死同所) 위험과 편안이 한 주소에 있다(危安同所). (…) 욕심이 많으면 달콤한 유혹에 빠져 망하고, 무서움을 알면 사고가 안 난다 — 주역을 보면 저절로 깨달아 항상 조심으로 살게 된다.
원문과 주석 — 괘사(卦辭)
경문
震,亨。震來虩虩,笑言啞啞。震驚百里,不喪匕鬯。
진(震)은 형통하다. 진동이 오면 두려워하며 돌아보고(虩虩), 뒤에는 웃으며 말함이 화평하다(啞啞). 우레가 백 리를 놀라게 하되, 제기(匕鬯)를 잃지 않는다.
정이천 전(傳)
陽生於下而上進,有亨之義。又震為動,為恐懼,為有主。震而奮,動而進,懼而脩,有主而保大,皆可以致亨。故震而有亨。
양(陽)이 아래에서 생겨 위로 나아가니 형통함(亨)의 뜻이 있다. 또 진(震)은 움직임이 되고, 공구(恐懼)가 되며, 주장이 있음(有主)이 된다. 진동하여 떨쳐 일어나고, 움직여 나아가며, 두려워하여 닦고, 주장이 있어 큰 것을 보전하니, 모두 형통함을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진(震)하면 형통함이 있는 것이다.
當震動之來,則恐懼不敢自寧,旋顧周慮,虩虩然也。虩虩,顧慮不安之貌。處震如是,則能保其安裕,故笑言啞啞。啞啞,言笑和適之貌。
진동이 올 때에는 공구하여 감히 스스로 편안히 하지 못하고, 돌아보며 두루 생각하여 혁혁(虩虩)한 것이다. 혁혁은 돌아보며 걱정하여 편안하지 못한 모습이다. 진(震)에 처하여 이와 같이 하면 그 편안하고 넉넉함을 보전할 수 있으므로, 웃으며 말함이 아아(啞啞)한 것이다. 아아는 말하고 웃음이 화평하고 알맞은 모습이다.
動之大者,莫若雷。震為雷,故以雷言。雷之震動驚及百里之逺,人无不懼而自失。唯宗廟祭祀,執匕鬯者,則不致於喪失。人之致其誠敬莫如祭祀。盡其誠敬之心,則雖雷震之威不能使之懼而失守。故臨大震懼,能安而不自失者,唯誠敬而已。此處震之道也。
움직임이 큰 것으로는 우레만한 것이 없다. 진(震)은 우레이므로 우레로써 말한 것이다. 우레의 진동이 백 리에까지 놀라게 하니 사람이 두려워하여 스스로 잃지 않는 이가 없다. 오직 종묘 제사에서 비(匕)와 창(鬯)을 잡은 자만은 잃어버리는 데 이르지 않는다. 사람이 그 성경(誠敬)을 다하는 것은 제사만한 것이 없다. 그 성경의 마음을 다하면 비록 우레의 위엄이라도 두려워하여 지킴을 잃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큰 진동에 임하여 편안하고 스스로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성경일 뿐이니, 이것이 진에 처하는 도이다.
주자 본의(本義)
震,動也。一陽始生於二隂之下,震而動也。其象為雷,其屬為長子。震有亨道。虩虩,恐懼驚顧之貌。震驚百里,以雷言。不喪匕鬯,以長子言也。此卦之占,為能恐懼則致福,而不失其所主之重。
진(震)은 움직임이다. 일양(一陽)이 처음 이음(二陰) 아래에서 생겨나 진동하여 움직이는 것이다. 그 상은 우레요, 그 속(屬)은 장자(長子)이다. 진에는 형통한 도가 있다. 혁혁(虩虩)은 공구하여 놀라 돌아보는 모습이다. ’진경백리’는 우레로 말한 것이요, ’불상비창’은 장자로써 말한 것이다. 이 괘의 점(占)은, 공구할 수 있으면 복을 이루고(致福) 주관하는 바의 중함을 잃지 않는 것이다.
융산 이씨(隆山李氏)
震本坤體,乾以一陽交於下,上二爻隂氣凝聚,陽氣在内藴結而不得出,於是乎奮擊而為雷。震之初動,物咸懼之,而不知其震動之威,乃所以震隂逹陽而開其生育之門,故曰震亨。
진(震)은 본래 곤체(坤體)인데, 건(乾)이 하나의 양으로 아래에 사귀어 위의 두 효에 음기가 응집하고 양기가 안에서 온축되어 나오지 못하다가, 이에 분격(奮擊)하여 우레가 된다. 진의 처음 움직임에 만물이 모두 두려워하나, 그 진동의 위엄이 곧 음을 진동시키고 양을 통달시켜 생육의 문을 여는 것임을 알지 못하니, 그러므로 ’진형(震亨)’이라 한 것이다.
임천 오씨(臨川吳氏)
雷動而萬物生者,亨也。人聞雷而恐懼脩省,亦能致亨。
우레가 움직여 만물이 생하는 것이 형통함이요, 사람이 우레를 듣고 공구하여 수성(脩省)하는 것도 역시 형통함을 이룰 수 있다.
주자 어록
言人常似震來時虩虩地便能笑言啞啞,到得震驚百里時也不喪匕鬯。震未便説到誠敬處,只是説臨大震懼而不失其常主器之事。問伊川言臨大震懼能安而不自失唯誠敬而已,若出於不測驚動,莫不害事否?曰:若誠敬至,自是不驚。驚則自是有閒斷。
사람이 항상 진동이 올 때처럼 혁혁하게 하면 곧 웃고 말함이 아아할 수 있고, 진경백리의 때에 이르러서도 비창을 잃지 않는다. 진(震)은 곧바로 성경(誠敬)의 경지를 말한 것이 아니라, 다만 큰 진동과 두려움에 임하여 그 평상의 주기(主器)하는 일을 잃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이천이 말한 “큰 진동에 임하여 편안히 스스로 잃지 않는 것은 오직 성경일 뿐”이라는 데 대해, 불측의 놀라움이 나오면 일을 해치지 않겠느냐 물으니, 답하기를 “성경이 지극하면 스스로 놀라지 않고, 놀라면 스스로 간단(閒斷)이 있는 것이다.”
평암 항씨(平庵項氏)
傳曰千里不同風,百里不共雷。震驚百里,極雷鳴所及之逺也。
전(傳)에 이르기를 ’천 리에 바람이 같지 않고, 백 리에 우레가 공유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진경백리’는 우레 소리가 미치는 먼 곳을 극진히 한 것이다.
용재 조씨(庸齋趙氏)
棘木為匕,取赤心之義。長三尺,刋柄與末。祭祀之先,烹牢於鑊,實諸鼎而加羃焉。將薦乃舉羃,以匕出之,升於俎上。
가시나무(棘木)로 비(匕)를 만드니 붉은 마음(赤心)의 뜻을 취한 것이다. 길이 세 자에 자루와 끝을 깎는다. 제사에 앞서 희생을 솥에 삶아 솥(鼎)에 담고 덮개를 덮는다. 장차 올리려 할 때 비로소 덮개를 들고, 비(匕)로 꺼내어 도마(俎) 위에 올리는 것이다.
진운 풍씨(縉雲馮氏)
震驚百里不喪匕鬯,猶不失匕箸之意。臨祭祀而匕鬯之薦,无失節也。
’진경백리불상비창’은 비저(匕箸)를 잃지 않는 뜻과 같다. 제사에 임하여 비창(匕鬯)을 올릴 때 절도를 잃지 않는 것이다.
중계 장씨(中溪張氏)
一陽反於二隂之下,故曰震來。虩虩者,恐懼顧慮之貌。葢震來則恐懼顧慮,而恐懼之後則笑言啞啞而和適自若也。雷聲之可以震驚百里,言祭祀之時,誠心純一,雖當震懼之來而不喪匕鬯。此主敬而不失其所守者也。
일양이 이음의 아래로 돌아왔으니 ’진래(震來)’라 한 것이다. 혁혁은 공구하여 돌아보며 걱정하는 모습이다. 대개 진동이 오면 공구하여 돌아보며 걱정하고, 공구한 뒤에는 웃고 말함이 아아하여 화적(和適)하고 자약(自若)한 것이다. 우레 소리가 백 리를 진경할 수 있으되, 제사할 때 정심(誠心)이 순일(純一)하면 비록 진구(震懼)가 올 때라도 비창을 잃지 않으니, 이는 경(敬)을 주장하여 그 지키는 바를 잃지 않는 자이다.
운봉 호씨(雲峯胡氏)
虩虩,一陽方動而上為二隂所蔽之象。啞啞,隂破而上逹之象。震驚百里,以震為雷取象。不喪匕鬯,以長子主器取象。此首言震亨,謂震有亨之道。又自以震來虩虩釋震字,以笑言啞啞以下釋亨字。葢人心常如震來之時虩虩然恐懼,憂於先必樂於後,便自有致福之理。雖震驚百里時,亦不失其所主之重也。
혁혁은 일양이 막 움직여 올라가나 이음에 가리워진 상이요, 아아는 음이 깨지고 위로 통달하는 상이다. ’진경백리’는 진(震)이 우레됨으로 상을 취한 것이요, ’불상비창’은 장자가 그릇을 주관함으로 상을 취한 것이다. 여기서 먼저 ’진형(震亨)’이라 하여 진에 형통의 도가 있음을 말하고, 또 ’진래혁혁’으로 진(震) 자를 풀이하고 ‘소언아아’ 이하로 형(亨) 자를 풀이한 것이다. 대개 사람의 마음이 항상 진동이 올 때처럼 혁혁히 공구하면, 먼저 근심한 자가 반드시 뒤에 즐거우니 곧 스스로 복을 이루는 이치가 있다. 비록 진경백리의 때에도 또한 주관하는 바의 중함을 잃지 않는 것이다.
원문과 주석 — 단전(彖傳)
경문
彖曰:震,亨。震來虩虩,恐致福也。笑言啞啞,後有則也。震驚百里,驚逺而懼邇也。出可以守宗廟社稷,以為祭主也。
단전에 이르기를, 진(震)은 형통하다. ’진래혁혁’은 두려워하여 복을 이루는 것이요, ’소언아아’는 뒤에 법칙이 있는 것이다. ’진경백리’는 먼 곳은 놀라고 가까운 곳은 두려워하는 것이니, 나아가 종묘사직을 지켜 제주(祭主)가 될 수 있다.
정이천 전(傳)
震自有亨之義,非由卦才。
진(震)은 스스로 형통함의 뜻이 있으니, 괘의 재질(才)에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震來而能恐懼自脩自慎,則可反致福吉也。笑言啞啞,言自若也。由能恐懼而後自處有法則也。有則則安而不懼矣。處震之道也。
진동이 오면서 공구하여 스스로 닦고 스스로 삼가면, 도리어 복과 길함을 이룰 수 있다. 소언아아는 자약함을 말한 것이다. 공구할 수 있어서 그 후에 자처하는 데 법칙이 있는 것이다. 법칙이 있으면 편안하여 두려워하지 않으니, 진에 처하는 도이다.
雷之震及於百里,逺者驚,邇者懼,言其威逺大也。
우레의 진동이 백 리에 미치니, 먼 곳은 놀라고 가까운 곳은 두려워하니 그 위엄이 멀고 큰 것을 말한 것이다.
彖文脫不喪匕鬯一句。卦辭云不喪匕鬯,本謂誠敬之至,威懼不能使之自失。彖以長子宜如是,謂其誠敬能不喪匕鬯,則君出而可以守宗廟社稷,為祭主也。長子如是,而後可以守世祀,承國家也。
단전의 글에서 ‘불상비창’ 한 구절이 빠진 것이다. 괘사에서 ’불상비창’이라 한 것은 본래 성경이 지극하여 위엄과 두려움이 스스로 잃게 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단전은 장자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하여, 그 성경이 비창을 잃지 않으면 임금이 나가서 종묘사직을 지키고 제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자가 이와 같은 후에야 대대의 제사를 지키고 국가를 이어받을 수 있는 것이다.
주자 본의(本義)
震有亨道,不待言也。恐致福,恐懼以致福也。則,法也。程子以為邇也下脫不喪匕鬯四字,今從之。出,謂繼世而主祭也。或云出即鬯字之誤。
진에 형통한 도가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공치복(恐致福)’은 공구함으로써 복을 이루는 것이다. 칙(則)은 법(法)이다. 정자가 ‘이야(邇也)’ 아래에 ‘불상비창’ 네 글자가 빠졌다고 하였으니 지금 이를 따른다. 출(出)은 세상을 이어받아 제사를 주관하는 것을 말한다. 혹자는 출(出)이 곧 창(鬯) 자의 오류라고 한다.
동씨(董氏)·서계 이씨(西溪李氏)
致福云者,見君子常以危為安也。有則,謂君子所履出處語黙,皆有常則,不以恐懼而變也。
’치복(致福)’이라 한 것은 군자가 항상 위(危)로써 안(安)을 삼음을 보인 것이다. ’유칙(有則)’이란 군자의 나아가고 물러남과 말하고 침묵함에 모두 항상의 법칙이 있어, 공구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것이다.
건안 구씨(建安丘氏)
驚者,卒然遇之而動乎外。懼者,惕然畏之而變于中也。驚逺懼邇,甚言雷威之可畏也。
경(驚)은 갑자기 만나 밖으로 움직이는 것이요, 구(懼)는 깜짝 놀라 두려워하여 마음속이 변하는 것이다. 경원구이는 우레의 위엄이 두려울 만함을 심히 말한 것이다.
주자 어록
震亨止不喪匕鬯作一項看。傳云出可以為宗廟社稷,又做一項看。文王之語簡重精切,孔子之言方始條暢。須折開看方得。
’진형’부터 ’불상비창’까지를 한 항목으로 보고, 전(傳)에서 ’출가이위종묘사직’이라 한 것을 또 한 항목으로 본다. 문왕의 말씀은 간결하고 무겁고 정밀하며 절실하고, 공자의 말씀은 비로소 조리 있고 유창하니 모름지기 나누어 보아야 마땅하다.
성재 양씨(誠齋楊氏)
震雷能驚百里,而不能失匕鬯於主祭之手者,葢執匕鬯以祭則一敬之外无餘念,一鬯之外无餘物。當是之時,白刃前臨猛虎後廹,皆莫之覺。故震雷驚百里亦莫之聞。敬有所甚,而懼有所忘也。
우레가 백 리를 놀라게 할 수 있으나, 제사를 주관하는 손에서 비창을 잃게 할 수 없는 것은, 대개 비창을 잡고 제사하면 한 가지 경(敬) 밖에 다른 생각이 없고 한 가지 창(鬯) 밖에 다른 물건이 없기 때문이다. 이때에 흰 칼날이 앞에 임하고 맹호가 뒤에서 닥쳐도 모두 깨닫지 못하니, 우레가 백 리를 놀라게 해도 역시 듣지 못하는 것이다. 경(敬)에 심히 빠져 있으면 두려움을 잊는 것이다.
중계 장씨(中溪張氏)
出者,猶詩云明天子出矣,即説卦帝出乎震之謂也。曰主者,即序卦主器莫若長子之謂也。若舜之烈風雷雨弗迷,可以出而嗣位,肆類于上帝矣。而劉備聞迅雷失匕箸者,其可出為祭主乎?
’출(出)’이란 시(詩)에서 ’밝으신 천자가 나아간다’라 한 것과 같으니 곧 설괘전의 ’제출호진(帝出乎震)’이라는 것이다. ’주(主)’라 한 것은 곧 서괘전의 ’주기막약장자(主器莫若長子)’라는 것이다. 순(舜)임금이 거센 바람과 뇌우에도 미혹되지 않은 것처럼 하면 나아가 왕위를 이어받아 상제께 큰 제사를 올릴 수 있다. 그런데 유비(劉備)가 급한 우레를 듣고 비저(匕箸)를 잃은 것과 같으면 어찌 나아가 제주가 될 수 있겠는가?
융산 이씨(隆山李氏)
序卦曰主器莫若長子,以太子而主器,是必以戒懼存心,以威重為質,而其徳望素著,足以畏服斯人之心。則以之守宗廟社稷而為祭祀之主,豈不固宜?作易者以乾為人君之象,震為太子之象。
서괘전에서 ’그릇을 주관하는 자는 장자만한 이가 없다’고 하였으니, 태자로서 그릇을 주관하는 것은 반드시 경구(戒懼)로 마음에 두고 위엄과 무거움을 바탕으로 삼아, 그 덕망이 평소 드러나 이 사람의 마음을 두려워하며 복종하게 함에 족해야 한다. 그러면 이로써 종묘사직을 지키고 제사의 주인이 되는 것이 어찌 진실로 마땅하지 않겠는가? 역을 지은 자가 건(乾)으로 인군의 상을 삼고 진(震)으로 태자의 상을 삼은 것이다.
운봉 호씨(雲峯胡氏)
彖本義能恐懼則致福,而不失其所主之重,盡之矣。堯舜巍巍蕩蕩事業,自兢兢業業致之。人須臾不可不知戒懼。出而主宗廟社稷者,其可懼尤甚焉。
단전 본의에서 “공구할 수 있으면 복을 이루고 주관하는 바의 중함을 잃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다한 것이다. 요순(堯舜)의 우뚝하고 넓은 사업이 스스로 조심하고 삼감(兢兢業業)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사람은 잠시도 경구를 모르면 안 되니, 나아가 종묘사직을 주관하는 자는 그 두려워해야 함이 더욱 심한 것이다.
원문과 주석 — 상전(象傳)
경문
象曰:洊雷,震。君子以恐懼脩省。
상전에 이르기를, 거듭된 우레(洊雷)가 진(震)이니, 군자는 이를 보고 두려워하며 닦고 살핀다(恐懼脩省).
정이천 전(傳)
洊,重襲也。上下皆震,故為洊雷。雷重仍,則威益盛。君子觀洊雷威震之象,以恐懼自脩飭循省也。君子畏天之威,則脩正其身,思省其過咎而改之。不唯雷震,凡遇驚懼之事皆當如是。
천(洊)은 거듭 엄습하는 것이다. 위아래가 모두 진(震)이므로 거듭된 우레(洊雷)가 된다. 우레가 거듭 이어지면 위엄이 더욱 성대해진다. 군자가 거듭된 우레의 위엄이 진동하는 상을 관찰하여, 공구하여 스스로 닦고 돌아보는 것이다. 군자가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면 그 몸을 바르게 닦고, 허물과 잘못을 생각하여 돌아보며 고치는 것이다. 우레만이 아니라 무릇 놀랍고 두려운 일을 만나면 모두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
건안 구씨(建安丘氏)
兩震相重,故曰洊雷。雷,天威也。方其仍洊而至,聞之者莫不恐懼。而君子於恐懼之後,必以脩省繼之者,所以盡畏天之實也。徒恐懼而不脩省,則變至而憂,變已而休,猶无懼爾。恐懼者,憂其變之來,初震象。脩省者,思其變之弭,洊震象。
두 진(震)이 서로 거듭하였으므로 ’천뢰(洊雷)’라 한 것이다. 우레는 하늘의 위엄이다. 거듭 이어져 올 때 듣는 자가 공구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런데 군자가 공구한 뒤에 반드시 수성으로 이어가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실질을 다하기 위함이다. 다만 공구만 하고 수성하지 않으면, 변(變)이 이르면 근심하고 변이 지나면 쉬니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공구하는 것은 변이 옴을 걱정하는 것이니 처음 진(震)의 상이요, 수성하는 것은 변이 그침을 생각하는 것이니 거듭된 진(洊震)의 상이다.
성재 양씨(誠齋楊氏)
恐懼以先之,脩省以繼之。脩省者,恐懼之功用也。脩其身,省其過,則恐无恐,懼无懼矣。
공구로 먼저 하고 수성으로 이어간다. 수성은 공구의 공용(功用)이다. 그 몸을 닦고 그 허물을 돌아보면, 두려워할 것이 없게 되고 무서워할 것이 없게 된다.
노천 모씨(瀘川毛氏)
恐懼者,作於其心。脩省者,見於行事。
공구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요, 수성은 행사(行事)에 나타나는 것이다.
서산 진씨(西山真氏)
洊雷震,君子以恐懼脩省。詩云敬天之怒,无敢戲豫;敬天之渝,无敢馳驅。鄉黨所載孔子迅雷風烈必變,皆此意也。
’천뢰진, 군자이공구수성’이라 하였다. 시(詩)에 이르기를 “하늘의 노여움을 공경하여 감히 희롱하고 방종하지 말며, 하늘의 변화를 공경하여 감히 치달리지 말라”고 하였고, 향당(鄉黨)에 실린 공자께서 급한 우레와 세찬 바람에 반드시 안색을 바꾸셨다는 것이 모두 이 뜻이다.
중계 장씨(中溪張氏)
宣王,周盛世之君也,遇災而懼,側身脩行。景公,宋小國之君也,反身脩徳,熒惑亦為之退舎。此皆恐懼而能脩省者也。
선왕(宣王)은 주나라 성세의 임금이니 재앙을 만나 두려워하여 몸을 돌이켜 행실을 닦았다. 경공(景公)은 송나라 작은 나라의 임금이니 몸을 돌이켜 덕을 닦으니 형혹성(熒惑)도 이를 위하여 물러갔다. 이것이 모두 공구하면서 수성할 수 있었던 자들이다.
태극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