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괘가 말하는 것
화택규(睽)는 어긋남의 괘다. 위는 불(離)이라 타올라 위로 가고, 아래는 못(兌)이라 흘러 아래로 스민다. 두 딸이 한집에서 자랐어도 시집갈 곳이 달라 끝내 갈라서듯, 성질이 반대인 두 기운이 한 괘 안에 놓여 서로 등을 돌린 형상이다. 서괘전은 한 집안 살림이 궁극에 이르면 반드시 어그러진다 하여 가인(家人) 다음에 규를 두었다. 그러나 이 괘가 겨누는 첫 통찰은 역설이다 — 어긋남은 애초에 같았기 때문에 생긴다. 뿌리부터 남남이던 것에는 어긋남이랄 것도 없다. 한때 하나였기에 갈라짐이 아프고, 갈라졌기에 다시 만날 여지가 남는다.
괘사는 이 때를 단 세 글자로 매듭짓는다 — 규는 작은 일에 길하다(睽小事吉). 민심이 흩어지고 편이 갈리는 때에 무리를 동원하고 세상을 뒤엎는 큰일을 벌이면 아무도 따르지 않아 도리어 역풍을 맞는다. 부드러운 음이 임금 자리에 올라 그릇이 작게 짜인 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먹고 입는 일상의 작은 일은 남들의 큰 합의를 기다리지 않으므로, 어긋난 때에도 얼마든지 길로 돌릴 수 있다. 분열이 깊을수록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눈앞의 작은 정성에서 실마리를 찾으라는 것 — 서로 으르렁대는 사이에도 따뜻한 말 한마디, 규칙 하나를 다듬는 일에서는 뜻이 모인다. 작은 성취를 쌓는 것만이 균열을 꿰매는 길이다.
한 칸 더 넘겨 보면 어긋남의 쓰임은 도리어 지극히 크다. 단전은 말한다 — 하늘과 땅은 멀리 떨어졌으나 함께 만물을 길러 그 일이 같고, 남과 여는 몸이 다르나 서로 끌려 그 뜻이 통하며, 만물은 천 가지로 어긋났으나 같은 이치를 따라 살아간다. 다르기 때문에 도리어 하나로 통한다. 같은 것만 모인 세상은 죽은 세상이다. 세속은 같은 것을 같다고 볼 뿐이지만, 이치를 아는 이는 다름 속에 감춰진 같음을 보아 만 갈래를 화합시킨다. 갈등을 피할 자리로만 여기지 말라. 나와 정반대인 기운과 부딪혀 불꽃이 이는 이 어긋남의 때야말로 새것이 태어나는 자리다.
그러니 규의 처세는 같되 다름(同而異)이다. 세속과 둥글게 어울리되, 지켜야 할 원칙 하나는 홀로 꺾지 않는다. 마땅히 같아야 할 데서 튀면 이치를 어지럽히는 자가 되고, 마땅히 달라야 할 데서 휩쓸리면 그릇됨을 함께 익히는 자가 된다. 겉은 부드럽게 열되 속의 중심축은 서릿발같이 세우는 것 — 이것이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몸으로도 다르지 않다. 한 방향으로만 뭉친 쇳덩이는 쉽게 부러지지만, 결이 다른 뼈와 힘줄과 근육이 서로 반대로 당길 때 몸은 충격을 받아낸다. 날숨은 흩어져 오르고 들숨은 고여 내리는 그 어긋남이 곧 숨이고 생명이다. 어긋남을 없애려 뻣뻣이 하나로 굳기보다, 어긋남을 품어 유연해질 때 힘이 산다. 그리고 지금의 작은 그릇은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배우고 겪으며 키워 가는 것이다.
훈장님의 풀이 — 허곡 선생님의 주역 강의에서
어긋남(睽)은 같기 때문에 생긴다 — 똑같아야 어긋나지, 애당초 다른 것은 어긋남이 없다(本不同則非睽). 한 집 두 딸이 한 부모에게서 같이 태어났으나, 결혼하면 각각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 헤어진다. 똑같기에 달라지고 어긋나는 것이니 — 헤어지고 만나고,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생명체다.
睽는 어긋나 헤어지는 때이니 큰일(大事)은 안 되고 작은 일(小事)은 길하다 — 흩어져 각각 남편을 만나 새 가정을 이루니, 작은(개인) 일은 좋은 쪽으로 돌릴 수 있다.
그릇이 작게 형성됐다고 큰 것을 넘보면 위험하니 운명대로 살아야 하나 — 그릇은 공부와 경험으로 키울 수 있다. 딱 고정됐다 여겨 수용하지 말고 내 그릇을 키우면 된다, 그것이 주역 공부의 보람이다(내 운명을 뜯어고치고 못난 나를 잘나게).
원문과 주석 — 괘사(卦辭)
睽,小事吉。
규(睽)는 작은 일에 길하다.
정이천『이천역전』
睽者,睽乖離散之時,非吉道也。以卦才之善,雖處睽時而小事吉也。
규(睽)라는 것은 어그러지고 흩어지는 때이니 길한 도가 아니다. 괘의 재주가 훌륭하기 때문에, 비록 규의 때에 처하더라도 작은 일에는 길하다고 한 것이다.
程子曰:睽卦不見四德,葢不容著四德。繫言小事吉者,止是方睽之時,猶足以致小事之吉。不成終睽而已,須有濟睽之道。
정자(정이천)가 말하였다. “규 괘에는 사덕(원형이정)이 보이지 않으니, 대개 사덕을 붙이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괘사에 ’소사길’이라 단 것은, 단지 바야흐로 어그러지는 때이나 오히려 작은 일의 길함은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끝내 어그러지기만 하고 마는 것이 아니고, 모름지기 어그러짐을 구제하는 도가 있어야 한다.”
주희『주역본의』
睽,乖異也。為卦上火下澤,性相違異,中女少女志不同歸,故為睽。
규(睽)는 어그러지고 다름이다. 괘가 됨에 위는 불이고 아래는 연못이니 성질이 서로 어긋나 다르고, 중녀(리)와 소녀(태)가 뜻이 같은 곳으로 시집가지 않으므로 규가 되었다.
然以卦德言之,内説而外明。以卦變言之,則自離來者柔進居三,自中孚來者柔進居五,自家人來者兼之。以卦體言之,則六五得中而下應九二之剛,是以其占不可大事,而小事尚有吉之道也。
그러나 괘덕으로 말하자면 안으로 기뻐하고 밖으로 밝다. 괘변으로 말하자면, 리(離)괘에서 온 자는 유(柔)가 나아가 3위에 거하고, 중부(中孚)괘에서 온 자는 유가 나아가 5위에 거하며, 가인(家人)괘에서 온 자는 그것들을 겸한다. 괘체로 말하자면 육오가 중을 얻어 아래로 구이의 강에 응한다. 이 때문에 그 점이 큰일은 불가하나 작은 일에는 오히려 길한 도가 있는 것이다.
건안 구씨(建安丘氏)
小事吉,柔為卦主也。凡卦陽剛為主,則可以大事;睽合兌離成卦,而柔進乎五,其才不能大有所為,故以之處小事,則猶可得吉也。
작은 일에 길함은 유(음)가 괘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무릇 괘에서 양강이 주인이면 큰일을 할 수 있으나, 규 괘는 태와 리가 합하여 괘를 이루었고 유가 나아가 5효에 거하였으니, 그 재주가 크게 할 수 있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작은 일에 대처하면 오히려 길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공영달(孔氏)
大事謂興役動衆,必須大同之世方可為;小事謂飲食衣服,不待衆力,雖睽而可。故曰小事吉。
큰일이란 부역을 일으키고 무리를 동원하는 것이니, 반드시 크게 하나 되는 세상이어야 할 수 있다. 작은 일이란 먹고 마시며 옷 입는 것이니, 무리의 힘을 기다리지 않으므로 비록 어그러진 세상이라도 가하다. 그러므로 ’작은 일에 길하다’고 한 것이다.
운봉 호씨(雲峰胡氏)
中女少女志不同歸為睽,長女中女亦非同歸而曰家人,何也?家人離之陰在二,巽之陰在四,女正者也。睽則兌陰在三,離陰在五,不正矣。女正,家无不正;女不正,此象之所以睽也。
중녀와 소녀가 뜻이 같은 곳으로 시집가지 않는 것이 규가 된다면, 장녀와 중녀 또한 같은 곳으로 시집가지 않는데 ’가인’이라 한 것은 어째서인가? 가인 괘는 리의 음이 2효에 있고 손의 음이 4효에 있으니 여자가 바른 것이다. 규 괘는 태의 음이 3효에 있고 리의 음이 5효에 있으니 바르지 않다. 여자가 바르면 집안에 바르지 않음이 없고, 여자가 바르지 않으니 이것이 상에서 어긋남이 되는 까닭이다.
睽小事吉者,小過柔過乎剛,故可小事不可大事;睽柔進而居剛,故亦小事吉而已。
규 괘에서 작은 일이 길하다는 것은, 소과(小過)괘에서 유가 강보다 지나치므로 작은 일은 할 수 있고 큰일은 할 수 없다 한 것과 같다. 규 괘도 유(음)가 나아가 강(양)의 자리에 거하였으므로 또한 작은 일에 길할 뿐이다.
중계 장씨(中溪張氏)
離下兌上為革,兌下離上為睽。革以九居五而六居二,剛柔得位,故曰元亨利貞。睽以六居五而九居二,剛柔失位,故曰小事吉。
리가 아래고 태가 위면 혁(革)이 되고, 태가 아래고 리가 위면 규(睽)가 된다. 혁 괘는 9가 5효에 거하고 6이 2효에 거하여 강과 유가 자리를 얻었으므로 ’원형이정’이라 하였고, 규 괘는 6이 5효에 거하고 9가 2효에 거하여 강과 유가 자리를 잃었으므로 ’소사길’이라 하였다.
若革之九五則可以大有為矣,湯武之革命順天而應人是也。
만약 혁 괘의 구오라면 크게 할 수 있는 일(혁명)이 있을 것이니, 은 탕왕과 주 무왕의 혁명이 하늘에 순응하고 사람에 응한 것이 이것이다.
— 출전: 주역전의대전(정이천『이천역전』·주자『주역본의』·건안 구씨·공영달·운봉 호씨·중계 장씨 잔주)
원문과 주석 — 단전(彖傳)
彖曰:睽,火動而上,澤動而下。二女同居,其志不同行。説而麗乎明,柔進而上行,得中而應乎剛,是以小事吉。天地睽而其事同也,男女睽而其志通也,萬物睽而其事類也。睽之時用大矣哉!
단전에 말하기를, 규(睽)는 불은 움직여 위로 가고 연못은 움직여 아래로 간다. 두 여자가 함께 거하나 그 뜻이 함께 가지 않는다. 기뻐하며 밝음에 걸려 있고, 부드러운 것이 나아가 위로 행하며, 중(中)을 얻어 강(剛)에 응하니, 이 때문에 ‘작은 일에 길한’ 것이다. 천지가 어긋나나 그 일은 같고, 남녀가 어긋나나 그 뜻은 통하며, 만물이 어긋나나 그 무리가 비슷하다. 규의 때와 쓰임이 크도다!
정이천『이천역전』
彖先釋睽義,次言卦才,終言合睽之道而贊其時用之大。火之性動而上,澤之性動而下,二物之性違異,故為睽義。
단전에서는 먼저 규의 뜻을 풀이하고, 다음에 괘의 재주를 말하고, 끝으로 어긋남을 합하는 도를 말하며 그 때와 쓰임의 큼을 찬탄하였다. 불의 성질은 움직여 위로 가고 연못의 성질은 움직여 아래로 가니, 두 사물의 성질이 어긋나고 다르므로 규의 뜻이 되었다.
中少二女雖同居,而所歸各異,是其志不同行也,亦為睽義。女之少也同處,長則各適其歸,其志異也。言睽者,本同也;本不同則非睽也。
중녀와 소녀 두 여자가 비록 함께 거하나 시집갈 곳이 각기 다르니, 이는 그 뜻이 같이 가지 않는 것이며 또한 규의 뜻이다. 여자가 어릴 때는 함께 처하다가 자라면 각기 그 시집갈 곳으로 가니 그 뜻이 다른 것이다. ’어긋난다(睽)’고 말하는 것은 본래 같았음을 전제한다. 본래 같지 않았다면 어긋남도 아니다.
卦才如此,所以小事吉也。兌説也,離麗也又為明,故為説順而附麗于明。凡離在上而彖欲見柔居尊者,則曰柔進而上行,晉鼎是也。
괘의 재주가 이와 같으므로 작은 일에 길한 것이다. 태(兌)는 기뻐함이고 리(離)는 걸림이자 밝음이므로 ’기뻐하고 순응하며 밝음에 붙어 걸린 것’이 된다. 무릇 리가 위에 있으면서 단전이 유(柔)가 존위에 거함을 보이고자 할 때는 ’유가 나아가 위로 행한다’고 하니, 진(晉)괘와 정(鼎)괘가 이것이다.
方睽乖之時,六五以柔居尊位,有説順麗明之善,又得中道而應剛,雖不能合天下之睽成天下之大事,亦可以小濟,是於小事吉也。
바야흐로 어그러진 때에 육오가 유로서 존귀한 자리에 거하여 기뻐하고 순응하며 밝음에 걸린 선함이 있고, 또 중도를 얻어 강(구이)에 응하니, 비록 천하의 어그러짐을 합하여 큰일을 이룰 수는 없으나 작게 구제할 수는 있다. 이것이 ‘작은 일에 길한’ 까닭이다.
五以明而應剛,不能致大吉何也?曰:五陰柔,雖應二而睽之時相與之道未能深固,故二必遇主于巷,五噬膚則无咎也。天下睽散之時,必君臣剛陽中正,至誠協力,而後能合也。
(묻기를) 오효가 밝음으로 강에 응하는데 어찌 크게 길함을 이루지 못하는가? (답하기를) 오효는 음유하니 비록 이효에 응하나 어그러진 때라 서로 더부는 도가 아직 깊고 견고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이효는 반드시 골목에서 임금을 만나야 하고(遇主于巷), 오효는 살을 씹어야(噬膚) 허물이 없다. 천하가 어그러지고 흩어진 때에는 반드시 군신이 강양중정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협력한 뒤에야 합칠 수 있다.
推物理之同,以明睽之時用,乃聖人合睽之道也。見同之為同者,世俗之知也;聖人則明物理之本同,所以能同天下而和合萬類也。
만물의 이치가 같음을 미루어 규의 때와 쓰임을 밝힌 것이니, 곧 성인이 어그러짐을 합하는 도이다. 같은 것을 같다고 보는 것은 세속의 앎이요, 성인은 사물의 이치가 본래 같음을 밝혀내므로 능히 천하를 하나로 하고 만물을 화합시킬 수 있다.
以天地男女萬物明之。天髙地下,其體睽也,然陽降隂升,相合而成化育之事則同也。男女異質,睽也,而相求之志則通也。生物萬殊,睽也,然而得天地之和,禀陰陽之氣則相類也。
천지·남녀·만물로 이를 밝혔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아 그 체는 어그러졌으나, 양이 내려오고 음이 올라가 서로 합하여 화육의 일을 이루니 같은 것이다. 남녀는 바탕이 다르니 어그러졌으나 서로 구하는 뜻은 통한다. 태어나는 사물이 만 가지로 다르니 어그러졌으나, 천지의 조화를 얻고 음양의 기운을 품은 것은 서로 유사하다.
物雖異而理本同,故天下之大,羣生之衆,睽散萬殊,而聖人為能同之。處睽之時,合睽之用,其事至大,故云大矣哉。
사물이 비록 다르나 이치는 본래 같으므로, 천하의 거대함과 뭇 생명의 많음이 어그러지고 흩어져 만 가지로 다르더라도 성인은 능히 하나로 합친다. 어그러진 때에 처하여 어그러짐을 합하는 쓰임은 그 일이 지극히 크므로 ’크도다!’라고 한 것이다.
주희『주역본의』
以卦象釋卦名義。以卦德、卦變、卦體釋卦辭。極言其理而贊之。家人諸卦,二女同居者多矣。以卦體睽,故以不同行明之。柔進而上行,得中而應乎剛,皆主上離之中言之。在鼎則曰是以元亨,在睽則曰是以小事吉。爻位同而事異,學者不可不知時也。
괘상으로 괘 이름의 뜻을 풀고, 괘덕·괘변·괘체로 괘사를 풀었으며, 그 이치를 극진히 말하여 찬탄하였다. 가인(家人) 등 여러 괘에 두 여자가 함께 거하는 경우가 많으나, 괘체가 규(어긋남)이므로 ’동행하지 않음’으로 이를 밝혔다. ’유가 나아가 위로 행하고 중을 얻어 강에 응한다’는 것은 모두 상괘 리(離)의 가운데 효(육오)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다. 정(鼎)괘에서는 ’이 때문에 크게 형통하다(元亨)’고 하였으나 규괘에서는 ’이 때문에 작은 일에 길하다’고 하였다. 효의 자리는 같으나 일이 다르니, 배우는 자는 때(時)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睽皆言始異終同之理。問:程傳「物雖異而理本同」之旨。曰:天施地生,男倡女随,此感彼應,葢不能以相无也。非理之本同,何以如此!
주자가 말하였다. “규괘는 모두 처음엔 다르나 끝엔 같아지는 이치를 말한 것이다.” 묻기를 “정전의 ’사물이 비록 다르나 이치는 본래 같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하늘이 베풀고 땅이 낳으며, 남자가 선창하고 여자가 따르며, 이것이 감응하고 저것이 응답하는 것은 대개 서로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치가 본래 같은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겠는가!”
임천 오씨(臨川吳氏)
燎而麗于髙上之處者,火也;流而瀦于卑下之地者,澤也。故曰動而上動而下,此二物之性睽異也。婦人以嫁為行,少則同處,長則各有夫家,故曰同居不同行,此二女之志睽異也。
타올라 높은 곳에 걸리는 것은 불이요, 흘러 낮은 땅에 고이는 것은 연못이다. 그러므로 ’움직여 위로 가고 움직여 아래로 간다’고 했으니 두 사물의 성질이 어긋나고 다른 것이다. 부인은 시집가는 것을 ’행(行)’으로 삼으니, 어릴 때는 함께 처하다가 자라면 각기 남편 집이 있으므로 ’함께 거하나 같이 가지 않는다’고 했으니 두 여자의 뜻이 어긋나고 다른 것이다.
睽之時无所謂吉者。觀其説而麗乎明,進而上行,得中而應剛,皆柔之為也。柔豈能成大事哉?故其吉者小事而已。
규의 때에는 길함이라 이를 것이 없다. 그 ’기뻐하고 밝음에 걸려 있고 나아가 위로 향하고 중을 얻어 강에 응하는 것’을 보건대 모두 유(음)가 한 것이다. 부드러운 자가 어찌 큰일을 이루겠는가? 그러므로 그 길함은 작은 일일 뿐이다.
임율(林氏栗)
離火兌澤,同賦形於天地;中女季女,同鞠育於閨門,其始未嘗不同也。火性炎上,澤性潤下;中女儷坎,季女妃艮,其終未嘗不睽也。
리의 불과 태의 연못이 함께 천지에서 형태를 부여받았고, 중녀와 소녀가 함께 안방에서 양육되었으니 그 시작은 일찍이 같지 않은 적이 없었다. 불의 성질은 위로 타오르고 연못의 성질은 아래를 적시며, 중녀는 감(중남)과 짝하고 소녀는 간(소남)과 짝하니 그 끝은 일찍이 어긋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후재 풍씨(厚齋馮氏)
以三才推廣卦義,且恐人以吉止小事,故推時用之大者以明之。天地,初上也;男女,二五也;萬物,二三四五也。天尊地卑睽矣,而事同於覆載;男陽女陰睽矣,而志同於相應;萬物羣分睽矣,其事各以類聚。當睽之時其用如此,豈不大哉!
삼재(천지인)로 괘의 뜻을 미루어 넓혔으며, 사람들이 길함이 작은 일에만 그친다고 여길까 두려워 때의 쓰임이 큼을 미루어 밝혔다. 천지는 초효와 상효요, 남녀는 이효와 오효요, 만물은 이·삼·사·오효(호괘 포함)이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아 어긋났으나 덮고 실어주는 일은 같고, 남자는 양이고 여자는 음이라 어긋났으나 서로 응하는 뜻은 같으며, 만물이 무리 지어 나뉘어 어긋났으나 그 일은 각각 유유상종한다. 어그러진 때를 당하여 그 쓰임이 이와 같으니 어찌 크지 않겠는가!
중계 장씨(中溪張氏)
火澤无相得之性,二女有難和之情,所以為睽。
불과 연못은 서로 마음이 맞는 성질이 없고, 두 여자는 화합하기 어려운 정이 있으므로 규가 되었다.
운봉 호씨(雲峰胡氏)
火性上動而愈上,澤性下動而愈下,此所以為睽。
불의 성질은 위로 움직여 더욱 올라가고 연못의 성질은 아래로 움직여 더욱 내려가니, 이것이 어긋남이 된 까닭이다.
— 출전: 주역전의대전(정이천『이천역전』·주자『주역본의』·임천 오씨·임율·후재 풍씨·중계 장씨·운봉 호씨 잔주)
원문과 주석 — 상전(象傳)
象曰:上火下澤,睽。君子以同而異。
상전에 말하기를, 위는 불이고 아래는 연못인 것이 규(睽)니, 군자는 이로써 같으면서도 다르게 한다.
정이천『이천역전』
上火下澤,二物之性違異,所以為睽離之象。君子觀睽異之象,於大同之中而知所當異也。
위는 불이고 아래는 연못이니, 두 사물의 성질이 어긋나고 다르므로 규리(어그러져 떨어짐)의 상이 된다. 군자가 어긋나고 다른 상을 관찰하여 크게 같은 것(大同) 가운데서 마땅히 달라야 할 바를 아는 것이다.
夫聖賢之處世,在人理之常,莫不大同於世俗。所同者則有時而獨異。葢於秉彞則同矣,於世俗之失則異也。不能大同者,亂常拂理之人也;不能獨異者,隨俗習非之人也。要在同而能異耳。中庸曰「和而不流」是也。
무릇 성현이 세상에 대처함에, 사람 이치의 떳떳함에 대해서는 세속과 크게 같이 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같이 하는 가운데 때로는 홀로 다르기도 하다. 대개 떳떳한 본성에 대해서는 같이 하되 세속의 잘못에 대해서는 다르게 한다. 능히 크게 같이 하지 못하는 자는 떳떳함을 어지럽히고 이치를 거스르는 사람(亂常拂理)이요, 능히 홀로 다르지 못하는 자는 세속을 따르고 그릇됨을 익히는 사람(隨俗習非)이다. 요컨대 같이 하면서도 능히 다를 수 있는 데 있을 뿐이다. 중용에서 ’화합하되 휩쓸리지 않는다(和而不流)’고 한 것이 이것이다.
주희『주역본의』
二卦合體而性不同。
두 괘가 체를 합했으나 그 성질이 같지 않은 것이다.
或問:君子以同而異。曰:此是取兩象合體為同,而其性各異。在人則是和而不同之意。葢其趍則同,而所以為同則異。如伯夷、柳下惠、伊尹三子,所趍不同,而其歸則一。
혹자가 ’군자가 이로써 같으면서 다르게 한다’를 묻자, 주자가 답하였다. “이것은 두 상이 체를 합한 것을 ’같음(同)’으로 삼고 그 성질이 각기 다른 것을 ’다름(異)’으로 취한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곧 ’조화로우나 같지 않다(和而不同)’는 뜻이다. 대개 그 향하는 바는 같으나 같게 되는 까닭은 다르다. 예컨대 백이·유하혜·이윤 세 성인이 향한 바는 달랐으나 그 돌아가는 곳은 하나인 것과 같다.”
彖辭言睽而同,大象言同而異。在人則出處語黙雖不同,而同歸於理。講論文字為説不同,而同於求合義理。立朝論事所見不同,而同於忠君。(…)大凡讀易到精熟後,顛倒説來皆合,不然則是死説耳。
단사(단전)에서는 ’어긋나되 같다’고 말했고 대상(상전)에서는 ’같되 다르다’고 말했다. 사람에 있어서는 나아가고 물러나며 말하고 침묵함이 비록 같지 않으나 그 이치에 함께 돌아감은 같다. 문자를 강론함에 그 학설이 비록 같지 않으나 의리에 합치하기를 구함은 같다. 조정에 서서 일을 논함에 보는 바가 비록 같지 않으나 임금에게 충성함은 같다. (…) 대저 주역을 읽어 정밀하고 익숙한 데 이른 뒤에는 뒤집어 설명해도 모두 들어맞으니, 그렇지 않으면 곧 죽은 학설일 뿐이다.
問:君子以同而異,作理一分殊看如何?曰:理一分殊是理之自然如此。這處又就人事之異同上説。葢君子有同處有異處,如所謂周而不比,羣而不黨是也。(…)此處伊川説得甚好。
묻기를 “군자가 같되 다름을 이일분수(理一分殊)로 보는 것은 어떠합니까?” 하니, 답하였다. “이일분수는 이치가 자연히 이러한 것이다. 이 대목은 또 인사의 같고 다름에 나아가 설한 것이다. 대개 군자는 같은 곳도 있고 다른 곳도 있으니, 이른바 ’두루 친하되 편당을 짓지 않으며(周而不比), 무리 지어 어울리되 파벌을 만들지 않는다(羣而不黨)’는 것이 이것이다. (…) 이 대목은 이천(정이천)이 심히 잘 설하였다.”
건안 구씨(建安丘氏)
離火兌澤二陰同體,而炎上潤下所性異趍,睽之象也。故君子體之以同而異。同以理言,異以事言也。葢天下无不同之理,而有不同之事。異其事而同其理,所以同而異,非苟異矣。
리의 불과 태의 연못은 두 음(陰)이 체를 같이하나, 위로 타고 아래로 적시는 성질이 향하는 바가 다르니 규의 상이다. 그러므로 군자가 이를 체득하여 ‘같으면서 다르게 한다’. ’같음’은 이치로 말한 것이고 ’다름’은 일로 말한 것이다. 대개 천하에 같지 않은 이치가 없고 같지 않은 일이 있다. 그 일을 달리하되 그 이치를 같이하니, 이것이 같으면서 다른 까닭이지 구차하게 다른 것이 아니다.
평암 항씨(平菴項氏)
睽非善事,然有當睽者,同而異是也。二女同居,同也;其志不同行,異也。此人道之當然。其在君子則周而不比,和而不同,羣而不黨,皆同而異也。
어긋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나 마땅히 어긋나야 할 것이 있으니 ’이동이이(同而異)’가 이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거하는 것은 ’같음’이요 그 뜻이 같이 가지 않는 것은 ’다름’이니, 이것이 인도의 당연함이다. 그것이 군자에게 있어서는 주이불비하고 화이부동하며 군이불당하는 것이니 모두 같으면서 다른 것이다.
성재 양씨(誠齋楊氏)
禹稷回同道而異趣,夷惠同聖而異行,未足為同之異也。孔子一孔子也,而齊魯之去異遲速;孟子一孟子也,而今昔之餽異辭受。此同而異也。
우임금과 직, 안회가 도는 같으나 그 취지를 달리했고, 백이와 유하혜가 성인임은 같으나 그 행실을 달리했으니 족히 ’같음 속의 다름’이 된다. 공자는 한 분 공자이되 제나라와 노나라를 떠날 때 지체함과 신속함이 달랐고, 맹자는 한 분 맹자이되 오늘과 어제의 예물에 대해 거절함과 받음이 달랐으니, 이것이 바로 같으면서 다름이다.
운봉 호씨(雲峰胡氏)
當同於理,而不同,亂常拂理以為異也;當異於理,而不異,隨俗習非以為同也。同人類族辨物,審異以致同,此則於同而審異。
이치에 마땅히 같아야 하는데 같지 않은 것, 그것이 ’떳떳함을 어지럽히고 이치를 거스르는 다름’이다. 이치에 마땅히 달라야 하는데 다르지 않은 것, 그것이 ’세속을 따르고 그릇됨을 익히는 같음’이다. 동인(同人)괘에서는 족속을 분류하고 사물을 분별하여 다름을 살펴 같음에 이르렀으나, 이 괘(규)에서는 같음 속에서 다름을 살피는 것이다.
융산 이씨(隆山李氏)
孔子於彖言睽中有合,所以責君子濟睽之功;象言同中有異,所以論君子不苟同之性。君子之性不苟於同,而其出而同心協力以合天下之睽異者則同。嗚呼!安得不苟同之君子,而與共議和同天人之事也哉!
공자께서 단전에서는 ’어긋남 속에 합함이 있다’고 하셨으니 군자의 어긋남을 구제하는 공로를 책려하신 것이요, 상전에서는 ’같음 속에 다름이 있다’고 하셨으니 군자의 구차하게 같지 않은 본성을 논하신 것이다. 군자의 본성은 구차하게 똑같아지려 하지 않으나, 그가 세상에 나아가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천하의 어긋나고 다름을 합하려 할 때는 곧 같은 것이다. 아아! 어찌하면 구차하게 같이 하지 않는 군자를 얻어, 그와 함께 하늘과 사람을 조화시키고 하나 되게 하는 일을 의논할 수 있겠는가!
— 출전: 주역전의대전(정이천『이천역전』·주자『주역본의』·건안 구씨·평암 항씨·성재 양씨·운봉 호씨·융산 이씨 잔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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