火澤睽 · 64괘 사전

육삼(六三) — 見輿曵

見輿曵,其牛掣,其人天且劓。无初有終。
위의 정응(상구)과 합하려 나아가려는 뜻 — 그러나 좌우의 강(2·4효)에 막혀 의심·피해의식에 사로잡힘삼효, 음유가 양의 자리에 처해 자리가 마땅치 않고(不當位) 위아래 두 강(2·4효) 사이에 낌 (부당/부적합)위의 상구와 정응(正應)하나, 어긋남의 때라 오해가 끼어 처음엔 막히다 끝내(有終) 합함위기/경계

풀이

육삼은 음유(陰柔)한 효가 양의 자리(삼효)에 놓여 자리가 마땅치 않고(不當位), 아래위로 굳센 두 양(구이·구사) 사이에 끼여 숨이 막히는 자리다. 본래 위로는 상구와 정응(正應)하여 그와 뜻을 합하려 나아가려 한다. 그러나 효사는 끔찍한 장면을 그린다 — 수레가 뒤로 끌려가고(見輿曵), 소가 앞에서 제지당하며(其牛掣), 그 사람이 이마에 먹을 새기고 코를 베이는 형벌을 당한다(其人天且劓). 뒤에서는 구이가 당기고 앞에서는 구사가 가로막으며, 끝내 정응인 상구마저 나를 의심하여 벌하려는 듯하다. 어긋남(睽)의 때에 좌우로 막히고 위에서 상처 입는, 주역 384효 가운데 가장 험한 말이 쏟아지는 자리다.

그런데 이 효의 열쇠는 맨 앞의 ‘볼 견(見)’ 한 글자에 있다. 원나라 역학자 운봉 호씨(雲峰胡氏)는 여기 나온 모든 장면이 실제로 일어난 사실이 아니라 육삼의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 짚는다 — “이것은 뜻으로 본 것(意見之見)이지 진짜 본 것(眞見)이 아니다.” 본래 수레를 끄는 일도, 소를 막는 일도, 이마를 지지고 코를 베는 일도 없는데, 의심(疑)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疑故其見如此). 어긋남과 갈등의 때에는 내 자리가 불안하니(음이 양의 자리에 끼임) 주위가 다 적으로 보이고, 의심이 의심을 낳아 스스로를 피해망상에 가둔다. 위기는 밖이 아니라, 왜곡된 내 시야가 지어낸 허상이다.

그러나 효사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 “처음에는 없으나 나중에는 있다(无初有終).” 정이천은 육삼이 두 양에게 액운을 당하는 것이 ’처음에 없음(无初)’이요, 끝내 정응인 상구와 반드시 합하는 것이 ’나중에 있음(有終)’이라 했다. 주자는 그 까닭을 한마디로 못 박는다 — “사악함은 바름을 이기지 못하니(邪不勝正), 마침내는 반드시 합함을 얻는다.” 소상전은 이를, 자리가 마땅치 않기에(位不當也) 험함을 겪고 강(상구)을 만나기에(遇剛也) 끝내 합한다고 풀었다. 정이천이 덧붙이듯, 바른 도로써 합하면 끝까지 어그러지는 이치란 없으니(合以正道) — 현자는 이치를 순히 따라 편안히 행하고, 지혜로운 자는 기미를 알아 굳게 지킨다.

삶에 들이기

살다 보면 사방이 나를 가로막고, 믿었던 사람마저 나를 오해하여 벌하려는 듯 느껴지는 때가 온다. 육삼은 먼저 묻게 한다 — 지금 내가 보는 것(見)이 ’사실’인가, ’의심’인가. 상황이 불안할수록 마음은 없는 위협을 그려내고, 그 허상이 근육을 굳히고 판단을 마비시킨다. 그럴 때 몸으로 돌아오라. 두려움에 심장이 조여올 때 시선을 한곳에 못 박지 말고, 눈을 잠시 감아 시각 정보를 끊고 숨을 길게 내려라. 아랫배 중심(단전)에 무게를 실어 몸의 긴장을 풀면, 뇌가 지어내던 망상도 힘을 잃는다. 그리고 묵묵히 바름을 지키며 걸어가라(守正). 허상의 장벽을 뚫고 지나가는 순간, 나를 벌하려는 줄로만 알았던 그 자리(상구)가 실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음(有終)을 알게 된다.

훈장님의 풀이 — 허곡 선생님의 주역 강의에서

'天(천)'은 머리를 깎는 형벌(髡)이요, '劓(의)'는 코를 베는 형벌이다 (…) 正應인 上九가 三을 보고 '저것이 二·四와 사통했구나' 오해하여, 三에게 천벌(髡·劓)을 가하는 것이다.

어긋난 때(睽時)에는 오해가 많아, 도둑놈 죽일 놈이라 목 자르고 코 베지만 다 사실이 아니다 — 시대가 잘못돼 그런 것이다.

처음은 없다(无初) — 二가 끌고 四가 막아 죽을 일만 있으니 살아도 산 게 아니다. 그러나 끝은 있다(有終) — 오해가 풀리면 上九와 사귀게 되니, 뒤에는 인생이 화려하게 합한다. (…) 간사한 것은 정직한 것을 절대 이기지 못하니(邪不勝正) — 二·四가 아무리 三을 오해했어도, 끝내 三은 제 짝 上九와 만난다. 바름이 이기기에, 처음이 없어도 끝은 반드시 합한다(終必得合).

원문과 주석 — 경문·소상전과 역대 풀이

경문과 소상전

六三,見輿曵,其牛掣,其人天且劓。无初有終。

육삼은 수레가 뒤로 끌어당겨지고(見輿曵), 그 소가 앞에서 제지당하는(其牛掣) 것을 보며, 그 사람이 이마에 먹을 새기고 코를 베이는(其人天且劓) 지경에 이른다. 처음에는 없으나 나중에는 있다(无初有終). (掣는 ’창’과 ’서’의 반절로 끌다·제지하다, 劓는 ’어’와 ’기’의 반절로 코를 베다.)

象曰:見輿曵,位不當也。无初有終,遇剛也。

상전에 이르기를, 수레가 끌어당겨지는 것을 봄은 자리가 마땅하지 않기(位不當) 때문이요, 처음에 없다가 나중에 있음은 강(상구)을 만나기(遇剛) 때문이다.

정이천 『이천역전』

傳:陰柔於平時且不足以自立,况當睽離之際乎?三居二剛之間,處不得其所安,其見侵陵可知矣。三以正應在上,欲進與上合志,而四阻于前,二牽於後。車牛所以行之具也。輿曵,牽於後也;牛掣,阻於前也。

전(傳)에 이르기를, 음유(陰柔)한 자는 평상시에도 족히 자립하기 부족하거늘, 하물며 어그러지고 떨어지는 때를 당해서랴. 삼효는 두 강(2·4효) 사이에 거하여 처함에 편안한 바를 얻지 못했으니, 그 능멸을 당함을 가히 알 수 있다. 삼효는 정응인 상효가 위에 있어 나아가 위와 뜻을 합하고자 하는데, 사효가 앞을 가로막고 이효가 뒤에서 끌어당긴다. 수레와 소는 나아가는 도구다. 수레가 끌린다는 것은 뒤에서 당기는 것이요, 소가 제지당한다는 것은 앞에서 막는 것이다.

在後者牽曵之而已,當前者進者之所力犯也,故重傷於上,為四所傷也。其人天且劓。天,髠首也。劓,截鼻也。三從正應,而四隔止之,三雖陰柔處剛而志行,故力進以犯之,是以傷也。天而又劓,言重傷也。

뒤에 있는 자(2효)는 당기고 끌 뿐이지만, 앞에 있는 자(4효)는 나아가려는 자가 힘써 범하려는 상대다. 그러므로 위에서 중상을 입으니 사효에게 상처 입은 바가 된 것이다. ’그 사람이 천차의’라 함에서, 천(天)은 머리를 미는 형벌(髠首)이요 의(劓)는 코를 베는 형벌(截鼻)이다. 삼효가 정응(상효)을 따르려는데 사효가 가로막아 그치게 하니, 삼효가 비록 음유이나 강한 자리에 처하여 뜻을 행하려 하므로 힘써 나아가 그것을 범하려 했기에 다친 것이다. 이마에 먹을 새기고 또 코를 벤다는 것은 중상을 말한 것이다.

三不合於二與四,睽之時自无合義,適合居剛守正之道也。其於正應則睽極有終合之理,始為二陽所戹,是无初也;後必得合,是有終也。

삼효가 이효·사효와 합하지 않음은 규(睽)의 때에는 자연히 합할 의리가 없는 것이니, 마침내 강한 자리에 거하여 바름을 지키는 도(守正之道)에 합당하다. 그 정응(상효)에 있어서는 어그러짐이 극에 달하면 마침내 합하는 이치가 있으니, 처음엔 두 양(2·4)에게 액운을 당하는 것이 ’처음에 없음(无初)’이요, 나중엔 반드시 합하게 되는 것이 ’나중에 있음(有終)’이다.

傳:以六居三,非正也。非正則不安,又在二陽之間,所以有如是艱戹,由位不當也。无初有終者,終必與上九相遇而合,乃遇剛也。

(상전 해설) 육(음)으로서 삼(양)에 거하니 바르지 않은 것이다. 바르지 않으면 불안하고 또 두 양 사이에 있으니, 이처럼 험난한 액운을 겪는 까닭은 자리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 없고 나중에 있다’는 것은 끝내 반드시 상구와 서로 만나 합함을 이르니, 곧 강(상구)을 만난 것이다.

不正而合,未有乆而不離者也。合以正道,自无終睽之理。故賢者順理而安行,智者知幾而固守。

바르지 않게 합치면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는 자가 일찍이 없었다. 바른 도(正道)로써 합치면 자연히 끝까지 어그러지는 이치란 없다. 그러므로 현자는 이치를 순히 따라 편안히 행하고, 지혜로운 자는 기미를 알아 굳게 지킨다.

주자 『주역본의』

本義:六三、上九正應。而三居二陽之間,後為二所曵,前為四所掣。而當睽之時,上九猜狠方深,故又有髠劓之傷。然邪不勝正,終必得合。故其象占如此。

본의(本義)에 이르기를, 육삼과 상구는 정응이다. 그런데 삼효가 두 양(2·4효) 사이에 거하여, 뒤로는 이효에게 당겨지고 앞으로는 사효에게 제지당한다. 게다가 규의 때를 당하여 상구(짝)가 시기하고 모질게 구는 것(猜狠)이 바야흐로 깊으므로, 또 머리를 밀고 코를 베는 상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악함은 바름을 이기지 못하니(邪不勝正), 마침내는 반드시 합함을 얻는다. 그러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다.

朱子曰:天合作而剃鬚也,篆文天作□,而作□。

주자가 말하였다. 천(天)은 마땅히 ’이(而)’와 합하여 수염을 깎는 형벌이니, 전서(篆文)에서 두 글자의 모양이 서로 비슷하다.

제가 — 평암 항씨(平庵項氏)

平庵項氏曰:天,去髪之刑;劓,去鼻之刑。

평암 항씨가 말하였다. 천(天)은 머리카락을 자르는 형벌이요, 의(劓)는 코를 베는 형벌이다.

제가 — 운봉 호씨(雲峰胡氏)

雲峰胡氏曰:見,離目象。輿在下,二在三下,見有輿曵象;牛在前,四在三前,見有牛掣象;天與劓傷於上,見上有傷之象。

운봉 호씨가 말하였다. 견(見, 봄)은 리(離)의 눈(目) 상이다. 수레는 아래에 있는데 이효가 삼효 아래에 있으니 ’수레가 끌리는 상’을 본 것이요, 소는 앞에 있는데 사효가 삼효 앞에 있으니 ’소가 제지당하는 상’을 본 것이요, 머리와 코가 베이는 것은 위에서 다치는 것인데 상효에 상처가 있는 상을 본 것이다.

三上兩爻皆提起一「見」字,意見之見,非眞見也。火澤之睽生於動,三上之睽生於見。本无輿曵,本无牛掣,本无天且劓,疑故其見如此耳。其見如此故无初,正理本不如此故有終。

삼효와 상효 두 효는 모두 ‘볼 견(見)’ 자를 하나씩 끌어올렸으니, 이것은 뜻으로 본 것(意見之見)이지 진짜 본 것(眞見)이 아니다. 물과 불의 어그러짐(전체 괘)은 움직임(動)에서 생겨났으나, 삼효와 상효의 어그러짐은 봄(見)에서 생겨났다. 본래 수레를 끄는 일도 없고, 소를 가로막는 일도 없으며, 본래 이마를 밀고 코를 베는 일도 없는데, 의심(疑)하기 때문에 그 보는 것이 이와 같을 뿐이다. 그 보는 것(피해망상)이 이와 같으므로 ’처음엔 없는 것(无初)’이요, 바른 이치(正理)는 본래 이와 같지 않기 때문에 오해가 풀려 ’나중에 있는 것(有終)’이다.

제가 — 쌍호 호씨(雙湖胡氏)

雙湖胡氏曰:六爻中唯此爻辭最險。葢以不正之隂乘承應又皆不正之陽,當此睽時,故進退无據而受刑傷。特以隂陽配偶,終當有合。其亦可憐不足恤者矣。

쌍호 호씨가 말하였다. 여섯 효 가운데 유독 이 효사(삼효)가 가장 험악하다. 대개 바르지 않은 음이 타고 받들고 응하는 자들(2·4·6효)이 또 모두 바르지 않은 양인데, 이 어그러진 때를 당하였으므로 나아가고 물러남에 근거가 없어 형벌과 상해를 받는 것이다. 다만 음양의 짝이 되므로 마침내 마땅히 합함이 있긴 하나, 그 또한 가련하여 동정하기에 족하지 않다.

제가 — 중계 장씨(中溪張氏)

中溪張氏曰:三與上本為正應,非睽者也。但三以孤陰而處於二剛之間,則睽我者二與四也。輿所以載己者也,牛所以引車者也。六三居不當位,欲進而應乎上,則九二曵之於後,九四掣之於前。前者掣之而不得行,後者曵之而不得上。進退齟齬間而未合,故上乃刑之使服。

중계 장씨가 말하였다. 삼효와 상효는 본래 정응이니 어긋난 자가 아니다. 다만 삼효가 외로운 음(孤陰)으로 두 강(2·4효) 사이에 처했으니, 나를 어긋나게 하는 것은 이효와 사효다. 수레는 나를 싣는 것이고 소는 수레를 이끄는 것이다. 육삼이 마땅치 않은 자리에 거하여 나아가 위에 응하려 하니, 구이가 뒤에서 당기고 구사가 앞에서 가로막는다. 앞의 것이 막아 나아가지 못하고 뒤의 것이 당겨 위로 오르지 못한다. 진퇴가 꽉 막혀 어긋나고 아직 합하지 못하므로, 오해한 상효가 곧 그를 형벌하여 굴복시키려 하는 것이다.

이 효가 動하면火天大有(14번 괘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