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규(睽)는 어긋나고 갈라지는 때다. 초구는 그 어긋남이 이제 막 시작되는 맨 아래 자리에 있다. 양효가 양의 자리에 바르게 앉아 강건하고 밝은 자질을 지녔으나, 위로 손을 잡아 줄 짝(음효)이 없다. 본래 응(應)이 되어야 할 구사마저 같은 양이라 정식으로 응하지 못한다. 그래서 후회가 있을 법하다. 그런데 효사는 도리어 “후회가 없어진다(悔亡)“고 말한다. 어긋난 때에는 정해진 짝이 아니라, 오히려 같은 뜻·같은 결을 지닌 이(同德)와 통하기 때문이다. 처지가 어긋난 자들끼리 도리어 손을 잡는 것, 이것이 규 괘 초입의 역설이다.
나아갈 수단인 말(馬)을 잃었다. 불안하면 당장 쫓아가 붙들고 싶다. 그러나 효사는 “쫓지 말라, 스스로 돌아온다(喪馬勿逐, 自復)“고 한다. 어긋남의 초입에서는 움직일수록 어긋남이 커진다. 억지로 매달리기보다 제자리를 지키며 제 힘을 닦으면, 같은 결을 지닌 이가 때가 무르익어 저절로 돌아온다. 주자는 이를 “말은 처음엔 행하지 못하다가 나중에는 도리어 행하게 된다”고 풀었으니, 규 괘 여섯 효 전체가 “먼저 어긋나고 뒤에 같아지는(先異後同)” 이치를 말한다.
더 깊은 가르침은 “악인을 만나 보아도 허물이 없다(見惡人无咎)“이다. 어긋난 때에 마음 맞는 이만 가려 사귀고 싫은 이를 다 끊어 내면, 그 끊긴 이들이 도리어 무리 지어 나를 겨눈다. 정이천은 그리하면 “천하의 모든 사람이 군자를 원수로 여기게 된다”고 경계했다. 싫은 이라도 문을 닫지 않고 마주해 주는 것 — 그것이 화를 미리 피하는 길(辟咎)이다. 중계 장씨의 말대로 이는 “어쩌다 마주쳤을 때 끊어 내지 않는다”는 뜻이지 그를 굳이 찾아가 사귀라는 것이 아니다. 비굴한 타협이 아니라, 어긋난 세상을 품어 끝내 합(合)으로 돌이키려는 큰 그릇의 처세다.
삶에의 적용
잃었을 때 조급히 쫓는 손을 멈추는 것, 싫은 이 앞에서 얼굴을 돌리지 않는 것 — 둘 다 몸의 훈련이다. 무언가 떠나갔을 때 곧장 붙들러 달려가려는 충동을 한 호흡 눌러 제자리에 고요히 서 보라. 꼴 보기 싫은 이와 마주쳤을 때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돌리는 대신, 어깨의 힘을 풀고 가벼운 눈인사 하나로 지나쳐 보라. 맞이하되 맞서지 않는(迎而不抗) 이 무심한 접촉이, 적을 만들지 않는 안의 굳셈이다. 어긋남의 때를 건너는 힘은 다그침이 아니라 품이 넓어지는 데서 나온다.
훈장님의 풀이 — 허곡 선생님의 주역 강의에서
양(陽)은 본래 위로 올라가는 것이라 어긋나 헤어지나(主動无與), 같은 양인 4효와 끝내 합하니(同類相合) 행할 수 있게 되어 — 잃은 말은 쫓지 않아도 제 발로 돌아온다. 양이 위로만 가고 음이 아래로만 가다가, 자리를 바꿔 사귀면 구름이 끼고 비가 오듯 — 어긋났던 것이 다시 합한다. 그러니 억지로 쫓을 일이 아니다.
(…) 나쁜 사람(惡人)을 피하지 말고 만나야 허물이 없다(見惡人无咎) — 원수를 피해 끊으면 도리어 그가 나를 죽이려 들고, 만나서 가면을 쓰고 웃으면 '나를 미워하지 않는구나' 하여 화를 면한다. 무기를 들었을 때는 멀리하되, 보통 때는 나쁜 놈을 가까이해야 경계가 되어 나를 해치지 않는다.
(…) 악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무리이니, 군자가 그들을 다 버려 끊으면(舍絶) 천하를 다 원수로 삼아 군자가 도리어 죽는다(不可舍絶) — 그래서 옛 성인은 악인도 만나 교화하고(化姦) 원수를 신하·백성으로 바꾸었다. 공자가 양화(陽貨)를 피하기도 하고 만나기도 한 것이 바로 睽 初九의 뜻이다.
원문과 주석 — 경문·소상전, 정이천·주자와 제가(諸家)
경문·소상전
初九,悔亡。喪馬勿逐,自復。見惡人,无咎。 象曰:見惡人,以辟咎也。
초구는 후회가 없어진다. 말을 잃더라도 쫓아가지 말라, 저절로 돌아올 것이다. 악인을 만나 보아도 허물이 없다. 소상전에 이르기를, 악인을 만나 본다는 것은 그로써 허물을 피하기 위함이다.
정이천 『이천역전』
九居卦初,睽之始也。在睽乖之時,以剛動於下,有悔可知。所以得亡者,九四在上,亦以剛陽睽離无與,自然同類相合。同是陽爻,同居下,又當相應之位,二陽本非相應者,以在睽故合也。上下相與故能亡其悔也。
구(九)가 괘의 처음에 거하니 어긋남의 시작이다. 어그러진 때에 강(剛)으로써 아래에서 움직이니 후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후회가 없어질 수 있었던 까닭은, 구사가 위에 있으면서 또한 강양(剛陽)으로서 어긋나 떨어져 더불 이가 없으니 자연히 같은 무리끼리 서로 합하기 때문이다. 똑같이 양효요 각각 아랫자리에 거하며 또 서로 상응하는 자리에 해당하니, 두 양은 본래 상응하는 것이 아니지만 어긋난 때에 있기 때문에 합하는 것이다. 위아래가 서로 더불기 때문에 능히 그 후회가 없어진다.
在睽諸爻皆有應,夫合則有睽,本異則何睽?唯初與四雖非應而同德相與故相遇。馬者所以行也,喪,陽上行者也。睽獨无與則不能行,是喪其馬也。四既與之合則能行矣,是勿逐而馬復得也。
규 괘의 여러 효는 모두 응(應)이 있다. 무릇 합해야 어긋남이 있는 것이지 본래 달랐다면 어찌 어긋나겠는가. 오직 초구와 구사는 비록 응은 아니나 같은 덕(同德)으로 서로 더불기 때문에 서로 만난다. 말(馬)은 행하는 수단이요, 잃는다(喪) 함은 양이 위로 행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어긋난 때에 홀로 더불 이가 없으면 능히 행할 수 없으니 이것이 ’그 말을 잃음’이다. 구사가 이미 그와 합하게 되면 곧 능히 행할 수 있으니, 이것이 ’쫓지 않아도 말이 다시 돌아옴’이다.
惡人與己乖異者也。見者與相通也。當睽之時,雖同德者相與,然小人乖異者至衆。若棄絶之,不幾盡天下以仇君子乎?如此則失含之義,致凶咎之道也。又安能化不善而使之合乎?故必見惡人則无咎也。古之聖王所以能化奸凶為善良,革仇敵為臣民者,由弗絶也。
’악인’은 자기와 어그러지고 다른 자이다. ’만나 본다(見)’는 것은 그와 서로 통하는 것이다. 어그러진 때를 당하여 비록 같은 덕을 지닌 자와 서로 더불지만, 어그러지고 다른 소인배가 지극히 많다. 만약 그들을 버리고 끊어 버린다면 거의 천하의 모든 사람이 군자를 원수로 여기게 되지 않겠는가. 이와 같이 하면 머금어 품는 뜻을 잃고 흉함과 허물로 이르는 길이다. 또 어찌 불선한 자를 교화하여 합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반드시 악인을 만나 보아야 허물이 없는 것이다. 옛 성왕이 간사하고 흉악한 자를 교화하여 선량한 자로 만들고 원수를 바꾸어 신민(臣民)으로 만들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을 끊어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자 『주역본의』
上无正應,有悔也。而居睽之時,同德相應,其悔亡矣。故有喪馬勿逐而自復之象。然亦必見惡人,然後可以辟咎,如孔子之於陽貨也。
위에 정응이 없으므로 후회가 있다. 그러나 어긋난 때에 거하여 같은 덕끼리 서로 응하니 그 후회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말을 잃어도 쫓지 말라, 스스로 돌아온다’는 상이 있다. 그러나 또한 반드시 악인을 만나 본 연후에야 허물을 피할 수 있으니, 공자가 양화(陽貨)를 대한 것과 같다.
朱子曰:馬是行底物,初間行不得,後來却行得。大率睽之諸爻都如此,多説先異而後同。問睽見惡人其義何取?曰:以其當睽之時,故須見惡人乃能无咎。
주자가 말하였다. “말(馬)은 행하는 물건인데 처음엔 행할 수 없다가 나중에는 도리어 행할 수 있게 된다. 대개 규 괘의 여러 효가 모두 이와 같으니, 대부분 ’먼저 어긋나고 뒤에 같아진다(先異後同)’는 것을 설한 것이다.” 묻기를 “규 괘에서 악인을 만나 본다는 뜻은 무엇을 취한 것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어그러진 때를 당했기 때문에 모름지기 악인을 만나 보아야 능히 허물이 없는 것이다.”
제가 — 운봉 호씨(雲峰胡氏)
六五陰居陽故悔,初九陽居陽亦曰悔者,无正應故也。雖无正應,四同德相應,其悔亡矣。
육오는 음이 양자리에 거하므로 후회가 있고, 초구는 양이 양자리에 거했는데도 ’후회가 있다’고 한 것은 위로 정응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정응은 없으나 구사와 같은 덕으로 상응하니 그 후회가 없어진다.
睽離之時,人情乖違,求和合之且病其不能得也。若以惡人而拒絶之,則將衆仇於君子而禍咎至矣。故必見之所以免辟怨咎也。无怨咎則有可合之道。
(정이천 상전 풀이를 이어) 어그러지고 떨어진 때에는 인지상정이 어그러져 화합을 구하려 해도 능히 얻지 못할까 걱정이다. 만약 악인이라 하여 그를 거절한다면 무리가 장차 군자를 원수로 여겨 화와 허물이 이를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를 만나 봄으로써 원망과 허물을 피하는 것이다. 원망과 허물이 없어야 합할 수 있는 길이 있다.
爻曰无咎,象曰辟咎,睽之時不得不辟也。
효사에는 ’허물이 없다(无咎)’고 하고 상전에는 ’허물을 피한다(辟咎)’고 하였으니, 어긋난 때에는 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제가 — 성재 양씨(誠齋楊氏)
見惡人,子見南子,陳寔弔張讓是也。若非辟咎,則无事乎見惡人矣,孔子不見陽貨是也。
’악인을 만나 본다’는 것은 공자가 (위나라의 음란한 왕비인) 남자(南子)를 만나 본 것과, (후한의 명사인) 진식(陳寔)이 (악명 높은 환관) 장양(張讓)의 상가에 조문 간 것이 이것이다. 만약 허물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악인을 만나 볼 일도 없으니, 공자가 양화를 만나 주지 않으려 한 것이 이것이다.
제가 — 조병(趙秉)
无應悔也。剛足以自守,故悔亡。又曰:初四睽而同德,終必相與。睽極必通,天下之常理也。故有勿逐自復之象。
응(應)이 없으므로 후회한다. 강(剛)하여 족히 스스로 지키므로 후회가 없어진다. 또 말하기를 “초효와 구사가 어긋나면서도 덕을 같이하니 마침내 반드시 서로 더불게 된다. 어그러짐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통하는 것이 천하의 떳떳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쫓지 않아도 스스로 돌아온다’는 상이 있다.”
제가 — 쌍호 호씨(雙湖胡氏)
此爻以爻為象,悔亡為占。喪馬以下為象,見惡人以下為占。然象亦取占中。六爻唯初九正,時既乖異,辭亦艱險也。
이 효는 효의 위치를 상(象)으로 삼고 ’회망(悔亡)’을 점(占)으로 삼았다. ‘상마(喪馬)’ 이하는 상이요 ‘견악인(見惡人)’ 이하는 점이다. 그러나 상 또한 점 가운데서 취한 것이다. 여섯 효 가운데 오직 초구만이 바르나, 때가 이미 어그러지고 다르므로 그 말씀 또한 험난하고 위태롭다.
제가 — 중계 장씨(中溪張氏)
見者,遇而勿絶之辭,非必欲見之也。
’만나 본다(見)’는 것은 어쩌다 마주쳤을 때 끊어 내지 않는다(勿絶)는 말이지, 반드시 내가 그를 보고자 원했다는 것이 아니다.
제가 — 건안 구씨(建安丘氏)
既見惡人,則非避矣。唯初九不以避為避,而以見為避。化惡人而為善人,則終能合初四之睽而无咎也。
이미 악인을 만났다면 (물리적으로) 피한 것이 아니다. 오직 초구는 피함으로써 피함을 삼지 않고 만나 줌으로써 피함(辟咎)을 삼은 것이다. 악인을 교화하여 선인으로 만들면 마침내 능히 초효와 구사의 어긋남을 합하여 허물이 없게 된다.
(출전: 경문·소상전 및 정이천『이천역전』, 주자『주역본의』, 제가 잔주는 모두 『주역전의대전』에 따름)
태극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