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괘(兌) 다섯 번째 효는 임금의 자리다. 양강이 양의 자리에 있고 가운데를 얻어 중정(中正)하니, 기뻐하는 도(說道)의 선(善)을 다한 가장 반듯한 자리다. 그런데 경문은 뜻밖에도 위태로움을 말한다. “벗기는 것을 믿으니(孚于剝), 위태로움이 있다(有厲).” 박(剝)은 양(陽)을 깎아내는 이름이다. 여기서는 바로 위에 밀착한 음효, 상육(上六)을 가리킨다. 가장 높고 반듯한 자리에서도, 곁에서 기쁨으로 다가오는 자를 참선(實善)으로 믿어버리면 도리어 깎여 위태로워진다는 경계다.
정이천은 이 대목에서 성인의 마음을 읽어낸다. 요·순의 성대한 시대에도 경계가 없은 적이 없었다. 성현이 위에 있어도 천하에서 소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다만 감히 그 악을 드러내지 못할 뿐이다. 소인 또한 성현이 무엇을 기뻐하는지 안다. 그래서 겉을 바꾸고 명을 따르는 척한다. 문제는 그 감추어 품은 것(包藏)을 알아채지 못하고 거짓 선을 참 선으로 믿는 순간에 생긴다. 방비가 지극하지 못하면(備之不至) 선한 것이 도리어 해를 입는다. 주자도 같은 결로 짚는다. 상육은 기쁨의 주인이자 그 극에 처하여, 함부로 기쁘게 하여 양을 깎아내는 자이니, 그를 믿으면 위태롭다.
여러 주석가는 이 위험이 자리 탓이 아니라 기울어짐 탓임을 밝힌다. 건안 구씨는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벗기면 강한 것이 위태로우니, 자리가 비록 바르나 기뻐하는 바가 바르지 못하기 때문(所說不正)“이라 했다. 운봉 호씨는 태(兌)를 가을의 끝에 두어, 그 끝이 곧 벗김의 달(九月 剝卦)로 이어짐을 지적한다. 그래서 여섯 효 가운데 다섯 효가 ’태(兌)’를 말하는데 오직 구오만은 ’박(剝)’을 말한다. 기쁨에 취해 경계를 놓치는 순간, 기쁨은 곧 벗김으로 뒤집힌다.
자기 수양의 자리에서 이 효는 이렇게 읽힌다. 지위가 오르고 여유가 생기면 나를 기쁘게 해 주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 부드러운 접근이 가장 위태로운 순간이다. 정이천의 말대로 순임금 같은 성인조차 교언영색을 두려워했으니, 기쁨이 사람을 미혹함은 “들어오기 쉽고 두려운 것(易入而可懼)“이다. 수련의 자리에서도 다르지 않다. 상대가 부드럽게 다가와 나를 편안하게 풀어 놓는 순간, 이완 속에서 경계를 놓치면 그 자리에서 무너진다. 몸을 풀되 경각(警覺)을 함께 두는 것 — 이완(兌)과 경계(厲)가 한 몸에 있는 상태를 익히는 것이 이 효의 공부다.
훈장님의 풀이 — 허곡 선생님의 주역 강의에서
剝(깎을 박)은 음효(上六)를 가리킨다 — 음효는 무조건 양효를 병들게 만든다(잡아먹어야 배가 부름). 그 음(上六)을 미더이 여기면(孚) 위태함이 있다(有厲). 나한테 임시로 기쁘게 잘해주는 사람을 사람들은 대개 믿어버린다 — 그것이 큰일 날 일이다. 사기꾼이 뒤에 꼭 사기를 친다. 나에게 친하게 가까이 다가오는 자를 도리어 경계해야 한다.
九五는 존위(尊位)에 처해 중정(中正)하니 기뻐하는 도의 선을 다할 자리다. 그런데도 성인이 다시 '有厲'의 경계를 설치한 것은 — 요순 같은 성인도 일찍이 경계함이 없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蓋堯舜之聖 未嘗無戒). 성인도 사람의 몸뚱이를 가졌으니, 양심은 천심·도심이로되 몸뚱이에 붙은 욕심은 소인과 똑같다. 양심을 쓰면 성인, 욕심을 쓰면 소인일 뿐 — 그래서 성인도 경계를 반드시 해야 한다.
(…) 比·中孚·兌·履 네 괘가 모두 九五 양효라 공자가 똑같이 "位正當"이라 했으나 — 比·中孚는 그 자리를 능히 지키고(能保其位), 兌·履만은 지키지 못한다(不能保其位). 兌·履는 아래(또는 위)의 음에 기쁨으로 끌려 빠지기 쉬운 욕심·물질의 괘이기 때문이다. 자리값(位)이 같아도 괘의 맥락이 길흉을 가른다.
원문과 주석 — 경문·소상전·정이천·주자·제가
경문(經文)
九五. 孚于剝, 有厲.
구오. 벗기는 것을 믿으니, 위태로움이 있다.
소상전(小象傳)
象曰: 孚于剝, 位正當也.
상에 이르기를, 벗기는 것을 믿음은 자리가 바로 마땅하기 때문이다.
정이천 『이천역전』— 성현도 소인을 경계해야
九五得尊位而處中正, 盡說道之善矣. 而聖人復設有厲之戒. 蓋堯舜之盛, 未嘗无戒也. 戒所當戒而已. 雖聖賢在上, 天下未嘗无小人. 然不敢肆其惡也. 聖人亦說其能勉而革面也. 彼小人者, 未嘗不知聖賢之可說也. 如四凶處堯朝, 隱惡而順命, 是也. 聖人非不知其終惡也, 取其畏罪而強仁耳.
구오는 존위를 얻고 중정에 처하니 기쁨의 도의 선을 다하였다. 그런데 성인이 다시 ’위태로움이 있다’는 경계를 두셨으니, 대개 요·순의 성대함에도 일찍이 경계 없음이 없었다. 경계할 바를 경계할 뿐이다. 비록 성현이 위에 있어도 천하에 소인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다만 감히 그 악을 드러내지 못할 뿐이다. 성인도 그들이 힘써 겉을 바꾸는 것을 기뻐하신다. 저 소인들도 성현이 무엇을 기뻐할지 모르지 않으니, 네 흉악한 자가 요임금의 조정에서 악을 숨기고 명을 따른 것이 그것이다. 성인이 그 끝내 악함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죄를 두려워하여 억지로 인을 행함을 취할 뿐이다.
정이천 『이천역전』— 부우박의 위태로움
五若誠心信小人之假善爲實善, 而不知其包藏, 則危道也. 小人者, 備之不至則害於善. 聖人爲戒之意深矣. 剝者, 消陽之名, 陰消陽者也. 蓋指上六. 故孚于剝, 則危也. 以五在說之時, 而密比於上六, 故爲之戒. 雖舜之聖, 且畏巧言令色, 安得不戒也. 說之惑人, 易入而可懼也如此.
오효가 만약 성심으로 소인의 거짓된 선을 참 선으로 믿어 그 감추어 품은 것을 알지 못하면 위태로운 도이다. 소인이란 방비가 지극하지 못하면 선한 것에 해가 된다. 성인이 경계의 뜻을 두심이 깊다. 박(剝)이란 양을 깎아내는 이름이니, 음이 양을 깎는 것으로 대개 상육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벗기는 것을 믿으면 위태롭다. 오효가 기뻐하는 때에 상육에 밀접하게 가까이하므로 경계를 둔 것이다. 비록 순의 성인도 교언영색을 두려워하셨거늘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쁨이 사람을 미혹함이 들어오기 쉽고 두려움이 이와 같다.
주자 『주역본의』— 음이 양을 벗김
剝, 謂陰能剝陽者也. 九五陽剛中正, 然當說之時而居尊位, 密近上六. 上六陰柔, 爲說之主, 處說之極, 能妄說以剝陽者也. 故其占但戒以信于上六, 則有危也.
박이란 음이 능히 양을 벗기는 것을 이른다. 구오는 양강중정이나 기쁨의 때에 존위에 있으면서 상육에 밀접하게 가까이한다. 상육은 음유로 기쁨의 주인이 되고 그 극에 처하여, 함부로 기뻐하게 하여 양을 벗기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 점괘는 다만 상육을 믿으면 위태로움이 있다고 경계한 것이다.
주자 — 상육에 가까이함
朱子曰: 九五只是上比於陰, 故有此戒.
주자가 말하였다. 구오는 다만 위에서 음에 가까이하므로 이 경계가 있는 것이다.
진재 서씨 — 상육의 위험
進齋徐氏曰: 上柔處說之極, 无他係應, 惟附五以求說也. 五位雖當, 上柔親附, 說而信之, 必至剝剛. 故曰孚于剝.
진재 서씨가 말하였다. 상효는 부드러운 것이 기쁨의 극에 처하여 다른 계응이 없고 오직 오효에 붙어 기쁨을 구할 뿐이다. 오효의 자리가 비록 마땅하나 상효의 부드러운 것이 친히 붙어 기쁘게 하여 이를 믿으면 반드시 강을 벗기는 데 이른다. 그러므로 ’부우박’이라 한 것이다.
건안 구씨 — 양이 음에 기뻐하면
建安丘氏曰: 九五剛中當位, 說將極而密與上比. 陽方有說陰之意, 而上復引之以爲說. 五若不虞其害己而妄信之, 則將見剝於陰矣. 故曰孚于剝. 柔剝剛, 則剛危, 故有厲. 五位雖正, 而所說不正, 故也.
건안 구씨가 말하였다. 구오는 강중으로 마땅한 자리에 있으나 기쁨이 장차 극에 이르면서 상효에 밀접하게 가까이한다. 양이 바야흐로 음에 기뻐하려는 뜻이 있는데 상효가 또 이를 끌어당겨 기쁨을 만든다. 오효가 만약 자기에게 해가 됨을 걱정하지 않고 함부로 믿으면 장차 음에게 벗김을 당한다. 그러므로 ’부우박’이라 한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벗기면 강한 것이 위태로우니 위태로움이 있다. 오효의 자리가 비록 바르나 기뻐하는 바가 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정이천 『이천역전』— 상전: 위정당
戒孚于剝者, 以五所處之位正當戒也. 密比陰柔, 有相說之道, 故戒在信之也.
’부우박’을 경계한 것은 오효가 처한 자리가 바로 경계해야 마땅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음유에 밀접하게 가까이하여 서로 기뻐하는 도가 있으므로 경계는 이를 믿는 데 있다.
주자 『주역본의』— 이괘 구오와 같다
與履九五同.
이(履)괘 구오와 같다.
운봉 호씨 — 태괘와 박괘의 연결
雲峯胡氏曰: 說之感人, 最爲可懼. 感之者, 將以剝之也. 況爲君者, 易狃於所說. 故雖聖人, 且畏巧言令色, 而況凡爲君子者乎? 兌, 秋之終, 九月爲剝. 他爻皆稱兌, 五不稱兌而稱剝, 深爲君子戒也.
운봉 호씨가 말하였다. 기쁨이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가장 두렵다. 감동시키는 것은 장차 벗기려 함이다. 하물며 임금된 자는 기뻐하는 바에 익숙해지기 쉽다. 그러므로 비록 성인이라도 교언영색을 두려워하셨거늘 하물며 범인으로서 군자이겠는가. 태는 가을의 끝이니 구월은 박이다. 다른 효는 모두 ’태’라 칭하였으나 오효만은 ’태’라 하지 않고 ’박’이라 칭하였으니 깊이 군자를 위해 경계한 것이다.
사수 정씨 — 이효와 오효의 대비
沙隨程氏曰: 二五同爲陰所乘, 而所孚不同者, 二陰位不過剛, 故孚于五. 五以剛居陽, 故孚于剝. 孔子謂位正當者如此.
사수 정씨가 말하였다. 이효와 오효가 모두 음에게 올려탐을 받으나 믿는 바가 다르다. 이효는 음의 자리에 있어 강에 넘치지 않으므로 오효를 믿는다. 오효는 강으로 양의 자리에 있으므로 벗기는 것을 믿게 된다. 공자가 ’자리가 바로 마땅하다’고 하신 것은 이와 같다.
운봉 호씨 — 이(履)와 태(兌)의 유려
雲峯胡氏曰: 履否兌中孚九五, 皆曰位正當. 而此獨與履同, 何也? 否中孚九五, 位正當而能稱其居. 履兌不能稱其位者也. 兼履兌皆有厲之辭. 履五當君位而凡事決之以己見, 雖正且危. 兌五當君位而密比於小人, 不正之危, 又何如也.
운봉 호씨가 말하였다. 이·비·태·중부의 구오가 모두 ’위정당’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유독 이(履)와 같은 것은 왜인가. 비와 중부의 구오는 그 거처를 감당할 수 있으나 이와 태는 그 자리를 감당하지 못한다. 이와 태 모두 ’유려’의 말이 있다. 이의 오효는 군위에 있으면서 범사를 자기 소견으로 결단하니 비록 바르나 또한 위태롭다. 태의 오효는 군위에 있으면서 소인에 밀접하게 가까이하니 그 바르지 못한 위태로움이 또 어떠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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