重澤兌 · 64괘 사전

상육(上六) — 引兌

上六. 引兌.
아직 빛나지 못함 (뜻이 펴지지 않음)상효, 음유가 극에 거함 (한계·종결)삼효와 정응 관계고립/단절

기쁨의 극에서 또 끌어당기다

상육(上六)은 태(兌) 괘의 맨 위, 기쁨의 극(極)에 처한 음유(陰柔)한 효다. 부드러움으로 부드러움의 자리에 있어, 기쁨을 이룬 주인(成說之主)이면서 그 기쁨의 끝에 서 있다. 다른 괘라면 극에 이르러 변하겠지만, 태는 기쁨이라 극에 이르면 도리어 더 기뻐하려 한다. 기쁨이 이미 다했는데도 그칠 줄 모르고, 아래 두 양(구사·구오)을 끌어당겨 함께 기뻐하려 하니, 이것이 끌어당겨 기뻐함(引兌)이다.

그런데도 흉(凶)이라는 말이 붙지 않는다. 정이천은 그 까닭을 이렇게 밝힌다. 아직 그 기뻐하는 것이 선(善)인지 악(惡)인지 드러나지 않았고, 아래에 구오의 중정(中正)함이 있어 사악한 기쁨을 베풀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전은 흉이라 단정하지 않고 다만 “빛나지 못한다(未光)“고 에둘러 말했다. 일이 성한 때에는 빛남이 있으나, 이미 극에 이른 기쁨을 억지로 끌어 늘리면 그 뜻과 맛이 사라져 실로 기뻐할 것이 없다. 빛날 수가 없는 것이다.

운봉 호씨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경계한다. 상육이 두 양을 끌어당기는 것은 결국 그 양을 벗기려는 것(引之者將以剝之)이라고. 눈에 보이는 아첨(육삼의 來兌)보다, 고요히 다가와 꾀는 유혹(상육의 引兌)이 알아차리기 어려워 더 위험하다. 임천 오씨의 한마디가 이 효의 핵심을 꿰뚫는다. “즐거움은 극에 이르러서는 안 된다(樂不可極).”

삶에의 적용 — 극에서 그치는 힘

즐거움이 정점에 닿았거든 스스로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잔치가 끝났으면 자리를 뜨고, 좋은 기운이 흐르거든 억지로 붙잡지 않는다. 몸의 지혜도 다르지 않다. 어떤 감각이든 극에 이르면 무뎌지고, 쾌락을 더 늘리려 하면 오히려 불쾌가 온다. 좋은 동작이 나왔다고 무리하게 반복하면 형(形)이 무너지고 몸이 상한다. 자연스러운 절정에서 멈추어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 — 끌어당기지 않는 것(不引), 극에 이르면 그치는 것(極則止)이 도리어 기쁨을 온전히 지키는 길이다.

훈장님의 풀이 — 허곡 선생님의 주역 강의에서

上六은 기쁨(兌)의 끝자락에 처한 음효라 기쁨의 주인(成說之主)이 되어, 아래 두 양(九四·九五)을 끌어당겨 함께 기뻐하려 한다(引而說之). (…) 기쁨이 이미 극에 달했는데도(說旣極) 또 끌어서 더 길게 끌고 가려 한다 — 다른 괘의 上효는 極而變(극에 달하면 변함)인데, 兌만은 변하지 않는다 — "내가 최고로 좋은데 왜 변하나, 계속 좋은 세상만 살고 싶다"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기쁘게 살아야지, 실컷 기쁘게 살라"는 말은 세상을 모르는 바보의 소리다 — 한번 기쁨을 맛봤으면 기쁘지 않은 일도 올 줄 알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지 꾸미지 말아야 한다.

주공이 효사에 길흉을 달지 않고 '引兌'라고만 한 것을, 공자가 "未光也(빛을 보지 못한다)"로 풀었다. '未光'은 곧 '안 된다'는 말이로되, 성인은 단정해서 '흉하다'고 딱 잘라 말하지 않는다 — 논어에서 자로가 화법을 묻자 공자가 "其然, 豈其然乎(그럴까, 그게 왜 그럴까)"라고만 답한 것처럼. 딱 잘라 맞다/틀리다 하면 틀렸을 때 고칠 수 없고, 남의 기운을 꺾기 쉽기 때문이다. 未(미)는 '반드시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未者 非必之辭) — 미결(未決)의 미처럼,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으니 네가 노력해 깨달으면 더 기쁠 수도 있고 이대로면 안 된다는 뜻이다.

원문과 주석 — 경문·소상전과 역대 주해

경문(經文)

上六. 引兌.

상육(上六). 끌어당겨 기뻐한다(引兌).

象曰: 上六引兌, 未光也.

상육이 끌어당겨 기뻐하니, 빛나지 못한다(未光).

정이천 『이천역전』

他卦至極則變. 兌爲說, 極則愈說. 上六成說之主, 居說之極, 說不知已者也. 故說既極矣, 又引而長之. 然而不至悔咎何也? 曰, 方言其說不知已, 未見其所說善惡也. 又下乘九五之中正, 无所施其邪說. 六三則承乘皆非正, 是以有凶.

다른 괘에서는 극에 이르면 변하지만, 태(兌)는 기쁨이니 극에 이르면 더욱 기뻐한다. 상육은 기쁨을 이루는 주인이 되어 기쁨의 극에 있으니, 기뻐함을 그칠 줄 모르는 자이다. 그러므로 기쁨이 이미 극에 달했는데 또 끌어당겨 늘린다. 그런데도 뉘우침이나 허물에 이르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바야흐로 그침을 모른다고 말할 뿐, 아직 기뻐하는 것이 선인지 악인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아래에 구오의 중정을 타고 있으니 사악한 기쁨을 베풀 곳이 없다. 육삼은 承乘이 모두 바르지 않으므로 흉하다.

(상전) 說既極矣, 又引而長之. 雖說之之心不已, 而事理已過, 實无所說. 事之盛則有光輝, 既極而強引之, 長其无意味甚矣, 豈有光也. 未, 非必之辭. 象中多用. 非必能有光輝, 謂不能光也.

기쁨이 이미 극에 달했는데 또 끌어 늘린다. 기뻐하는 마음은 그치지 않으나 일의 이치가 이미 지났으니 실로 기뻐할 것이 없다. 일이 성한 때에는 빛남이 있으나, 이미 극에 달했는데 억지로 끌어당기면 그 뜻과 맛 없음이 심하니 어찌 빛남이 있겠는가. ’미(未)’란 반드시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상전에 많이 쓰인다. 반드시 빛남이 있을 수 없으니, 빛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주자 『주역본의』

上六成說之主, 以陰居說之極, 引下二陽相與爲說, 而不能必其從也. 故九五當戒, 而此爻不言其吉凶.

상육은 기쁨을 이루는 주인으로, 음으로 기쁨의 극에 있으면서 아래 두 양을 끌어당겨 함께 기뻐하려 하나, 반드시 따르게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구오가 마땅히 경계해야 하고, 이 효는 그 길흉을 말하지 않았다.

임천 오씨(臨川吳氏)

說至於上, 可以已矣. 樂不可極也. 陰柔但知以說爲事, 於說之終, 又引而長之. 豈君子之說哉.

기쁨이 상효에 이르면 그칠 수 있다. 즐거움은 극에 이르러서는 안 된다. 음유한 자는 다만 기뻐하는 것만을 일삼아, 기쁨의 끝에서 또 끌어 늘리니 어찌 군자의 기쁨이겠는가.

(미광) 引長已終之說, 於說之道爲未光.

이미 끝난 기쁨을 끌어 늘리니, 기쁨의 도에서 빛나지 못한 것이다.

운봉 호씨(雲峯胡氏)

凡陰爻稱引. 萃六二引吉, 引下而升也, 故吉. 兌上六引二陽而說, 引之者, 將以剝之也. 五言有厲, 上不言凶, 可知矣. 或曰, 兌爲口舌, 六爻之辭簡抑, 以滕口說爲戒歟.

무릇 음효에서 ’인(引)’이라 칭한다. 췌(萃) 육이의 ’인길’은 아래를 끌어 올림이므로 길하다. 태 상육의 ’인’은 두 양을 끌어당겨 기뻐하는 것인데, 끌어당기는 것은 장차 벗기려 함이다. 오효에서 ’유려’라 했으니 상효에서 흉이라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혹자는 태가 입(口舌)이 되니 육효의 말이 간략하고 억제된 것은 ’입으로 말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라 하였다.

중계 장씨(中溪張氏)

柔道以牽爲引. 上六柔居五上, 能牽誘五而爲說媚者也. 然九五乃陽明之主, 以剝爲懼, 不信上六之牽引. 故小人說媚之跡, 隱晦而未至於光顯也.

유도(柔道)에서는 끌어당기는 것을 ’인’이라 한다. 상육은 부드러운 것이 오효 위에 있으면서 능히 오효를 끌어 꾀어 아첨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오는 양의 밝음의 주인이니 벗겨짐(剝)을 두려워하여 상육의 끌어당김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인의 아첨하는 자취가 숨겨지고 어두워져 빛나게 드러나는 데 이르지 못한다.

성재 양씨(誠齋楊氏)

驩兜薦共上而堯吁. 僉言薦鯀而堯咈. 皆引兌而未光者歟.

환두(驩兜)가 공공(共工)을 천거하매 요(堯)가 탄식하셨고, 여러 사람의 말로 곤(鯀)을 천거하매 요가 거절하셨다. 이것이 모두 ’끌어당겨 기뻐하되 빛나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건안 구씨(建安丘氏)

兌, 說也. 以一陰而說乎下之二陽也. 在卦以二陰爲說主, 四陽則皆爲所說者. 三以柔居剛, 爲下兌之主, 動而求陽之說, 故曰來兌. 上以柔居柔, 爲上兌之主, 靜而誘陽之說, 故曰引兌. 來兌之惡易見, 故本爻凶. 引兌之情難知, 故比爻當戒. 是以四陽爻, 在下兌者多吉, 在上兌者多凶. 初剛在下, 與陰无係, 故和兌吉. 二已近三, 入說猶淺, 故孚兌吉悔亡. 四入上兌, 處二五之間, 莫知所決, 故有商兌未寧之象. 五與上比, 處說將極, 故孚于剝則有厲矣.

태는 기쁨이다. 한 음이 아래의 두 양에게 기뻐하는 것이다. 괘에서 두 음(삼·상)이 기쁨의 주인이 되고, 네 양은 모두 기뻐함을 받는 자이다. 육삼은 부드러움으로 강의 자리에 있어 하괘 태의 주인이 되니 움직여 양의 기쁨을 구하므로 ’래태’라 한다. 상육은 부드러움으로 부드러움의 자리에 있어 상괘 태의 주인이 되니 고요히 양을 꾀어 기뻐하게 하므로 ’인태’라 한다. 래태의 악함은 보기 쉬우므로 본 효가 흉하고, 인태의 정상은 알기 어려우므로 이웃 효가 마땅히 경계한다. 이 때문에 네 양효 중 아래 태에 있는 것은 길함이 많고, 위 태에 있는 것은 흉함이 많다. 초효는 강이 아래에 있어 음과 얽매임이 없으니 화태 길이다. 이효는 이미 삼효에 가까우나 기쁨에 빠진 것이 아직 얕으므로 부태 길 회망이다. 사효는 위 태에 들어가 이효·오효 사이에 처하여 결정할 바를 모르니 상태미녕의 상이 있다. 오효는 상효에 가까이하여 기쁨이 장차 극에 이르니 부우박 유려이다.

이 효가 動하면天澤履(10번 괘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