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종아리에서 그치니
육이는 사람의 몸에서 종아리(腓)의 자리다. 종아리는 허벅지가 움직이면 따라가고 허벅지가 멈추면 따라 멈추는 부위이니, 움직이고 멈추는 권한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 육이는 하괘의 가운데에 자리해 중(中)을 얻고, 음효가 음의 자리에 바르게 있어 중정(中正)의 덕을 갖추었다. 그러나 위의 구삼이 하괘의 주인으로서 지나치게 강하고 중을 잃은 채 완강하게 멈추어 있으니, 육이는 옳은 뜻을 품고도 그 잘못된 멈춤을 구제하지 못하고(不拯其隨), 억지로 따를 수밖에 없어 마음이 유쾌하지 않다(其心不快).
정이천은 이 자리를 “말을 해도 듣지 않고 도를 행하려 해도 행해지지 않으니, 그 뜻을 행하지 못한 것”이라 풀었다. 허물이 자기에게 있지 않은데도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성재 양씨는 여기에 맹자를 겹쳐 놓았다. 맹자가 제선왕에게 옳은 말을 올려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답답했던 그 마음, 바로 그것이 육이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실력과 바름을 갖추고도 결정권이 위에 매여 있는 사람의 자리다.
다만 주자는 정이천의 ’억지로 따른다’는 해석에 의문을 남겼다. “군주가 간함을 받아들이지 않고 말을 듣지 않으면 떠나면 그만이다. 힘써 따르는 것은 때에 맞게 멈추는 뜻이 아닐 것”이라 했다. 끌려가며 견디는 것만이 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러나 떠나는 것도 멈춤(時止)의 한 형태일 수 있다.
삶에의 적용
조직에서 옳은 의견을 가지고도 고집 센 윗사람이 듣지 않을 때, 자식이 바른 길을 권해도 부모가 따르지 않을 때 — 우리는 종종 이 종아리의 자리에 선다. 몸의 운동 사슬에서 종아리가 허벅지의 명령 없이 홀로 움직이지 못하듯, 결정권이 없는 구조적 한계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먼저 할 일은 끌려가는 자기 마음의 불쾌함을 억누르지 말고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그다음, 억지로 따르는 이 걸음이 과연 멈춤의 도인지 스스로 점검한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과 내가 떠날 수 있는 것을 가려내는 자리 — 그 알아차림에서 종속은 비로소 선택으로 바뀐다.
훈장님의 풀이 — 허곡 선생님의 주역 강의에서
훈장님의 풀이 — 허곡 선생님의 주역 강의에서
六二는 장단지(腓)다. 장단지는 주관이 없어 — 위 다리·허리(三효)가 움직이면 그냥 따라가니(隨), 아래위 다리를 제재하지 못하고 끌려간다. 三효(止의 주효·강하나 부중)를 구하지(拯) 못하고 그 따라감을 그치지 못하니(不拯其隨) — 마음이 불쾌하다(其心不快). 六二는 居中得正하여 자리도 덕(中正之德)도 다 옳으나 — 위(五효)도 음이라 응원이 없고(無應), 三효가 위에서 止를 주관하니 능히 못 따라간다(不能從).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되는 것 — 이것이 운명이다. 따라가도 내 잘못은 아니나, 어찌 그것을 하고 싶으랴(豈其所欲哉) — 따라가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힘써 따라간다(必勉而隨). (…) 그러나 六二가 주관을 살리면(장단지 노릇을 안 하면) 벗어날 수 있다 — 모르면 끌려가고 알면 뒤집는다. 주역은 '이렇게 살아라'가 아니라 '이렇게 살지 말라'를 비유로 알려주니 — 인생을 주역에서 배운다.
원문과 주석 — 경문·소상전과 정이천·주자·제가
효사와 소상전
六二,艮其腓,不拯其隨,其心不快。
육이는 그 종아리에서 그치니, 그 따르는 것을 구제하지 못하여, 그 마음이 유쾌하지 않다.
象曰:不拯其隨,未退聽也。
상(象)에 말하기를, 그 따르는 것을 구제하지 못함은 위의 구삼이 아직 물러나 듣지 않기 때문이다.
정이천 『이천역전』
六二居中得正,得止之道者也。上无應援,不獲其君矣。三居下之上,成止之主,主乎止者也。乃剛而失中,不得止之宜。剛止於上,非能降而下求。二雖有中正之德,不能從也。
육이가 중에 거하여 바름을 얻었으니 멈추는 도를 얻은 자이다. 위에 응원해줄 짝이 없으니 그 군주를 얻지 못한 것이다. 삼효가 하괘의 위에 거하여 멈춤의 주인이 되었으나, 강하면서 중을 잃어 멈춤의 마땅함을 얻지 못하였다. 강이 위에서 멈추고 있으니 능히 내려와 아래에 구하지 못한다. 이효가 비록 중정의 덕이 있으나 삼효가 자기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二之行止係乎所主,非得自由,故為腓之象。股動則腓隨,動止在股而不在腓也。二既不得以中正之道拯救三之不中,則必勉而隨之。不能拯而唯隨也。雖咎不在己,然豈其所欲哉?言不聽,道不行也,故其心不快,不得行其志也。
이효의 행함과 멈춤이 위의 주인에 매여 있어 자유를 얻지 못하므로 종아리의 상이 된다. 허벅지가 움직이면 종아리가 따르니, 움직이고 멈추는 것이 허벅지에 있지 종아리에 있지 않다. 이효가 이미 중정의 도로써 삼효의 불중(不中)을 구제하지 못하면 반드시 힘써 따를 수밖에 없다. 구제하지 못하고 오직 따를 뿐이다. 비록 허물이 자기에게 있지 않으나, 어찌 그가 원하는 바이겠는가? 말을 해도 듣지 않고 도를 행하려 해도 행해지지 않으니, 그러므로 마음이 유쾌하지 않은 것이요, 그 뜻을 행하지 못한 것이다.
士之處高位,則有拯而无隨。在下位,則有當拯有當隨,有拯之不得而後隨。
선비가 높은 자리에 처하면 구제함이 있고 따름이 없다. 낮은 자리에 있으면 마땅히 구제할 때와 마땅히 따를 때가 있고, 구제하지 못한 뒤에야 따르는 것이 있다.
소상전 주석: 구제하지 못하고 오직 따르는 까닭은 위에 있는 자(구삼)가 아직 능히 아래로 내려와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퇴청(退聽)’은 아래로 내려와 따르는 것이다.
주자 『주역본의』
六二居中得正,既止其腓矣。三為限,則腓所隨也。而過剛不中,以止乎上。二雖中正而體柔弱,不能往而拯之。是以其心不快也。此爻占在象中。下爻放此。
육이가 중에 거하여 바름을 얻었으니 이미 그 종아리를 멈추게 한 것이다. 삼효는 허리(限)이니 곧 종아리가 따르는 바이다. 그런데 삼효가 지나치게 강하고 중을 잃어 위에서 멈추고 있으니, 이효가 비록 중정이나 체질이 유약하여 가서 그를 구제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그 마음이 유쾌하지 않은 것이다. 이 효는 점(占)이 상(象) 가운데 있다. 아래 효들도 이에 따른다.
소상전 주석: 삼효가 위에서 멈추고 있으니, 또한 물러나 이효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때의 군주가 간함을 받아들이지 않고 말을 듣지 않으면 떠나면 그만이다. 힘써 따르는 것은 아마도 때에 맞게 멈추는 뜻(時止之義)이 아닐 것이다.”
제가(諸家)
중계 장씨(中溪張氏)
中溪張氏曰:股動則腓動,股止則腓止。是動止之權不在腓也。九三居下體之上,為艮之主。二既不得以柔中之道而拯救九三過剛之失,而亹亹隨之。又豈其心之所欲哉?故其心不快也。
허벅지가 움직이면 종아리가 움직이고 허벅지가 멈추면 종아리가 멈추니, 움직이고 멈추는 권한이 종아리에 있지 않다. 구삼이 하체의 위에 거하여 간(艮)의 주인이 되었으니, 이효가 유중(柔中)의 도로써 구삼의 과강한 잘못을 구제하지 못하고 오직 부지런히 따를 뿐이다. 이것이 어찌 그 마음이 원하는 바이겠는가? 그러므로 마음이 유쾌하지 않은 것이다.
성재 양씨(誠齋楊氏)
誠齋楊氏曰:六二有艮其腓之象。九三居艮體之上,則猶背也。九三陽也,六二陰也。陽唱則陰和。今以六二之柔而欲止九三之剛,以六二之腓而欲止九三之背,吾知六二不拯其隨也。王曰好色而軻亦曰太王好色,王曰好貨而軻亦曰公劉好貨。軻豈不拯其隨者哉?軻之心則不快也。
육이에는 간기비의 상이 있다. 구삼이 간체의 위에 거하니 곧 등(背)과 같다. 구삼은 양이요 육이는 음이니, 양이 선창하면 음이 화응한다. 지금 육이의 유(柔)로써 구삼의 강(剛)을 멈추려 하고 육이의 종아리로써 구삼의 등을 멈추려 하니, 나는 육이가 그 따르는 것을 구제하지 못할 줄 아노라. 맹자가 제선왕에게 왕이 ’여색을 좋아한다’고 하자 태왕도 여색을 좋아했다 하고, 왕이 ’재물을 좋아한다’고 하자 공류도 재물을 좋아했다 한 것이다. 맹자가 어찌 왕을 구제하지 못하는 자이겠는가? 맹자의 마음이 유쾌하지 않았을 뿐이다.
운봉 호씨(雲峰胡氏)
雲峰胡氏曰:咸六二與艮六二皆象腓。咸下體即艮也。艮於二言腓又言隨。隨三而止者也。三列夤不得止之宜,而二陰柔不能救其所隨,故其心不快。
함(咸) 괘의 육이와 간(艮) 괘의 육이가 모두 종아리를 상으로 삼았다. 함의 하체는 곧 간이다. 간 괘에서 이효에 대해 ’비(腓/종아리)’라 하고 또 ’수(隨/따름)’라 하였으니, 삼효를 따라 멈추는 자이다. 삼효가 ’열기인(列其夤)’하여 멈춤의 마땅함을 얻지 못하는데, 이효가 음유하여 그 따르는 바를 구제하지 못하므로 그 마음이 유쾌하지 않은 것이다.
雲峰胡氏曰:二與三占皆在象中,皆有一心字。二不能拯乎三,故心不快。三不肯下聽乎二,故厲薰心。
이효와 삼효의 점은 모두 상(象) 가운데 있고, 모두 ‘심(心)’ 자가 한 자씩 있다. 이효가 삼효를 구제하지 못하므로 ’심불쾌’요, 삼효가 이효의 말을 내려와 듣지 않으므로 ’여훈심’이다.
태극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