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물의 자리, 그러나 아직 길어 올리기 전
구오는 우물의 한가운데다. 양효가 양의 자리에 바르게 앉아 강중(剛中)이면서 정(正)하니, 양강중정(陽剛中正)의 덕을 온전히 갖춘 자리다. 우물물이 맑고 깨끗하며(洌) 찬 샘(寒泉)이어서 그대로 먹을 수 있다. 정이천은 이를 두고 우물의 도에서 지극히 선한 것(至善)이라 하였고, 주자는 그 덕이 만물에 미치는 상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 완성된 자리에 정작 길(吉)이라는 말이 붙지 않는다. 정이천의 설명은 명료하다. 우물은 위로 길어 올려져 쓰일 때 비로소 공을 이루는데, 구오는 아직 상효에 이르지 못해 그 쓰임에 닿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큰 길함인 원길(元吉)은 마지막 상효에 가서야 놓인다. 덕이 다 익었다고 곧바로 결실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제가의 풀이가 이 자리의 결을 더 깊게 한다. 운봉 호씨는 “설(渫, 깨끗이 청소함)과 렬(洌, 맑고 참)은 성(性)이요, 식(食)과 불식(不食)은 명(命)“이라 하였다. 맑게 닦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몫이지만, 그 물이 마침내 누구에게 먹히느냐는 때와 자리에 달려 있다. 백운 곽씨는 렬(洌)을 사람의 노력(人事·學), 한(寒)을 자연의 성질(天理·命)로 나누어, 두 가지를 모두 얻을 때 지극함에 이른다고 하였다.
삶에의 적용
구오가 우리에게 건네는 말은 조급함을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안을 맑히는 일과 그 맑음이 세상에 쓰이는 일은 다른 층위에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샘을 차고 깨끗하게 지키는 일 — 몸을 바르게 세우고, 마음을 흐리지 않고, 매일의 수련으로 근본을 맑게 유지하는 일뿐이다. 중정(中正)한 자세에서 억지로 힘을 쓰지 않아도 경(勁)이 저절로 솟듯, 안이 맑으면 쓰임은 때를 따라 스스로 찾아온다. 먹히기를 서두르지 말고, 먼저 먹을 만한 물이 되어 있으라.
훈장님의 풀이 — 허곡 선생님의 주역 강의에서
九五는 양이 양자리에 거해 양강이요 中正·존위라(陽剛中正·居尊位) — 그 재주와 덕이 진선진미하니(才德盡善盡美), '맑고 찬 샘물을 먹는다(井冽 寒泉食)' — 冽은 달고 깨끗하며 차다는 것이니, 이런 물은 먹으면 아무리 지독한 이라도 목구멍에서 감탄 소리가 난다(물에서 소리가 난다). 샘에 고개를 숙이면 찬 기운이 뺨에 부딪히는 — 그런 맑고 찬 우물물이다.
그런데 길하다(吉)고 말하지 않은 까닭은 — 우물은 위로 넘침(上出)을 성공으로 삼는데, 九五는 아직 上六에 이르지 못해(未及上) 길어 쓰는 데까지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元吉'이라는 가장 큰 길함은 上六에 가서 있다.
三효의 '청소함(渫)'은 흐려진 물의 본성을 되찾은 것이요, 五효의 '맑고 참(冽)'은 그 본성을 다한 것이다(性也乎) — 물은 본디 차고 깨끗한 것이 본성이니(寒·潔이 本性), 흐림은 본성이 아니라 관리를 잘못한 것이다. (…) '먹고 못 먹음(食/不食)'은 命이다 — 四효는 못 먹고 五효는 먹으니, 본성은 다 찾았어도 먹고 못 먹음이 갈리는 것은 사람의 일을 주관해 말한 것(主人事)이라 命이다.
원문과 주석 — 경문·소상전·정이천·주자·제가
경문
九五:井洌,寒泉食。
구오는 우물물이 맑고 깨끗하며(洌), 찬 샘물(寒泉)이니 먹을 수 있다(食).
소상전
象曰:寒泉之食,中正也。
상(象)에 이르기를, ‘찬 샘물을 먹는다’ 함은 중정(中正)하기 때문이다.
정이천 『이천역전』
五以陽剛中正居尊位,其才其德盡善盡美。井洌寒泉食也。洌,謂甘潔也。井泉以寒為美,甘潔之寒泉可以人食也。於井道為至善也。然而不言吉者,井以上出為成功,未至於上,未及用也,故至上而後言元吉。
오효는 양강·중정으로 존귀한 자리에 거하니 그 재질과 덕이 진선진미하다. 우물이 맑고 깨끗하며 찬 샘물이니 먹을 수 있다. 렬(洌)이란 감미롭고 깨끗함을 이른다. 우물의 샘은 찬 것을 아름다움으로 삼으니, 감미롭고 깨끗한 찬 샘물은 사람이 먹을 수 있다. 우물의 도에서 지극히 선한 것이다. 그러나 길하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우물은 위로 나옴으로 공을 이루는데 아직 상효에 이르지 않아 쓰임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효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원길이라 한다.
주자 『주역본의』
洌,潔也。陽剛中正,功及於物,故為此象。占者有其德則契其象也。
렬(洌)은 깨끗함이다. 양강중정하여 공이 만물에 미치므로 이러한 상이 된다. 점치는 자가 그 덕이 있으면 그 상에 부합한다.
숭산 조씨(嵩山晁氏)
井者陰之質也,故靜而虛。泉者陽之用也,故動而實。
우물은 음의 본질이므로 고요하고 비어 있다. 샘은 양의 작용이므로 움직이고 충실하다.
사수 정씨(沙隨程氏)
水始達曰泉。坎水之正性則寒,坎北方也。
물이 처음 통하는 것을 샘이라 한다. 감(坎)의 물의 바른 성질은 찬 것이니, 감은 북방이기 때문이다.
노천 모씨(瀘川毛氏)
三與五皆泉之潔者也。三居甃下,未汲之泉也,故曰不食。五出乎甃,已汲之泉也,故曰食。
삼효와 오효는 모두 샘의 깨끗한 것이다. 삼효는 벽돌 아래 거하니 아직 길어지지 않은 샘이므로 ’불식’이라 하고, 오효는 벽돌 위로 나왔으니 이미 길어진 샘이므로 ’식’이라 한다.
운봉 호씨(雲峰胡氏)
寒泉而可食,井道之至善者也。九五中正之德,為至善之義。井道全矣。所謂井養而不窮者,正在此爻。寒者水之性也。洌,潔也。三之渫,潔之也。潔之可食矣,而不如五之食者何哉?五在上,三猶在下故也。然則渫與洌,性也。食與不食,命也。
찬 샘물을 먹을 수 있으니 우물의 도에서 지극히 선한 것이다. 구오의 중정한 덕이 지극히 선한 뜻이다. 우물의 도가 온전해졌다. 이른바 ’정양이불궁(우물의 양육이 다하지 않음)’이 바로 이 효에 있다. 찬 것은 물의 성질이다. 렬은 깨끗함이다. 삼효의 설(渫)은 깨끗이 한 것이다. 깨끗이 하면 먹을 수 있는데 오효의 먹음만 못한 까닭은, 오효가 위에 있고 삼효가 아직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설과 렬은 성(性)이요, 식과 불식은 명(命)이다.
백운 곽씨(白雲郭氏)
洌,言井之修潔,主人事言。寒言泉,自然之性,主天理言。人事,學也。天理,命也。兩得之,斯為至矣。
렬은 우물이 수양하여 깨끗해진 것을 말하니 인사를 주로 한 것이다. 한(寒)은 샘을 말하니 자연의 성질이요 천리를 주로 한 것이다. 인사는 학(學)이요 천리는 명(命)이다. 두 가지를 모두 얻으면 지극한 것이다.
합사 정씨(合沙鄭氏)
井以陽為泉者,水固天之一陽而生也。巽二陽,二在地位趨下射谷而非井矣。三在人位,居甃之下,汲之不及。不若坎之一陽浮溢於甃上也。井欲溢而鼎戒盈,德與器之辨也。
우물이 양을 샘으로 삼는 것은 물이 본래 하늘의 일양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손(巽)의 두 양 중 이효는 땅의 자리에 있어 아래로 흘러 골짜기에 쏟아지니 우물이 아니다. 삼효는 사람의 자리에 있어 벽돌 아래 거하니 길어도 미치지 못한다. 감(坎)의 일양이 벽돌 위에 떠올라 넘치는 것만 못하다. 우물은 넘치고자 하고 솥(鼎)은 가득 참을 경계하니, 이것이 덕과 그릇의 구별이다.
건안 구씨(建安丘氏)
井六爻惟五曰泉。蓋九五為井之主,位中而正,泉洌而寒,井之德已盡美矣。井至九五,雖未能收上出之功,而寒泉之食則異乎井泥之不食、井渫之不食者。非坎中之泉洌而且寒,則人亦將出而吐之,況食之乎。
우물 여섯 효에서 오직 오효만이 ’샘(泉)’이라 하였다. 대개 구오가 우물의 주인이요 자리가 중정하며 샘이 맑고 차니, 우물의 덕이 이미 다 아름답다. 우물이 구오에 이르러 비록 위로 나오는 공은 아직 거두지 못했으나, 찬 샘물을 먹는다는 것은 우물 진흙의 못 먹음(井泥不食)이나 청소 후에도 안 먹는 것(井渫不食)과는 다르다. 감 가운데의 샘이 맑고 차지 않다면 사람이 도리어 내뱉을 것이거늘, 하물며 먹겠는가.
출전: 주역전의대전 — 정이천『이천역전』·주자『주역본의』·제가 잔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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