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夬)는 다섯 양이 위에 남은 한 음을 결단해 내는 때다. 구오는 그 결단을 주도하는 군주의 자리로, 양강하고 중정하다. 그런데 하필 그가 처단해야 할 마지막 소인 상육이 바로 옆에 붙어 있다. 오래 함께 밥 먹고 정든 사이다. 상육은 기뻐하는 태(兌)의 몸에 속해 애교를 떠니, 칼을 뽑긴 뽑았으되 손이 떨린다. 경문은 이 미적거림을 현륙(莧陸)이라는 풀에 비유했다. 쇠비름이나 자리공처럼 음기를 잔뜩 머금어 꺾으려 해도 질기게 늘어지는 풀이다. 그러나 바로 그 풀이 연약하여 쉽게 꺾이듯, 마음을 고쳐먹고 두 번 세 번 결단하면(夬夬) 끊을 수 있다.
관건은 어떻게 끊느냐다. 상육과 가장 가까운 자리이기에 구오의 결단은 삼효보다 쉬운 듯 보이지만, 도리어 더 위태롭다. 정에 끌려 미적거리면 중정을 잃고, 반대로 감정이 폭발해 지나치게 사납게 몰아치면(過暴) 그 또한 허물이 된다. 궁지에 몰린 소인은 마지막 발악을 하는 법이니, 군주의 숙청이 원한의 복수극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경문은 “중도로 행하면 허물이 없다(中行无咎)“고 한다. 끊되 과함도 모자람도 없는 가운데를 지키는 것, 그것이 구오에게 요구되는 결단의 품격이다.
그러나 공자는 여기서 한 겹을 더 벗긴다. 소상전은 “허물이 없다 함은, 중(中)이 아직 빛나지 못함이다(中未光也)“라고 덧붙인다. 밖으로 드러난 행동은 바르게 끊었으되, 속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그 사람 일은 참 잘했는데” 하는 미련이 남아 있다. 정이천은 이를 두고 “사람의 마음에 한번 하고자 하는 욕심이 생기면 곧 도에서 떨어져 나간다”고 했고, 주자는 그 남은 미련을 불교의 유주상(流注想), 곧 의식이 물 흐르듯 잠재되어 이어지는 찌꺼기 생각에 비겼다. 혁명의 칼날에는 1%의 사심도 섞여서는 안 된다는 서릿발 같은 경고다.
삶에의 적용
이 효는 몸으로 읽으면 더 분명해진다. 타격을 끝내고 주먹을 거두어들일 때, 주먹은 돌아왔는데 시선과 마음이 여전히 타격 지점에 머물러 아쉬워한다면, 그 찰나의 틈으로 상대의 역공이 들어온다. 행동(形)의 완성이 아니라 의도(意)의 깔끔한 회수가 고수의 조건이다. 삶도 같다. 오래 정든 관계나 습관을 대의를 위해 끊어야 할 때가 온다. 겉으로 끊는 것만으로는 끝이 아니다. 끊고 나서도 자꾸 그쪽을 돌아보며 입맛을 다신다면, 나는 아직 그 자리에서 완전히 떠나지 못한 것이다. 끊었으면 깊은 날숨과 함께 마음을 단전으로 거두어, 남은 미련 한 점까지 태워 없애라. 행동만이 아니라 의도의 단절이 온전해질 때, 비로소 그 결단은 빛난다(光大).
훈장님의 풀이 — 허곡 선생님의 주역 강의에서
九五는 강양이 中正·尊位에 거해 가장 유리하나 — 上六(제거할 소인)과 이웃(친비)이라 사사로운 정에 가장 가깝다. 그래서 도리어 제거할 책임을 크게 진다. '莧陸夬夬' — 쇠비름(莧陸, 마치현, 음기를 많이 머금어 똑똑 잘 끊어지는 풀)을 끊듯 — 정들고 사랑하는 사이라도 사정없이 똑똑 끊어야 한다. 단 결단하되 폭군처럼 과포(過暴)하지 말고 중도로 행해야(中行) 허물이 없다(无咎) — 정에 묶이면 도리어 中正을 잃으니, 정을 끊되 과불급 없는 중도라야 한다.
九五는 中行(중도)으로 결단해 허물이 없으나 — 上六과 친비(이웃)라 한 번 정의 상처를 입었으니, 마음 속이 빛나지 못한다(中未光也). 활발하고 화려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찌꺼기가 남는다. 정은 세월 가며 자연으로 드는 것이라 거기엔 수단·방법·기술이 없으니 — 생명의 힘으로도 과감히 씻어내질 못한다. 그것이 정이라는 병이다.
좋아하던 사람을 끊었는데도, 안 끊어진 채 마음속에 남아 나도 모르게 계속 움직이는 것 — 그것을 석가모니는 有住相이라 했다. 마음에 잔상(찌꺼기)이 남아 흘러다니는 것이다. (…) 사람 마음을 평범히 분석하건대, 한 번이라도 욕심내는 바가 있으면(人有所欲) 그쪽으로 마음을 뺏겨 자연 섭리의 도를 떠난 것이 된다(離道). 정은 물질이지 도가 아니니 — 정들면 물질론에 떨어진다.
원문과 주석 — 경문·소상전과 정이천·주자·제가의 풀이
경문(爻辭)
九五,莧陸夬夬,中行无咎。
구오는 현륙(자리공·쇠비름)처럼 결단하고 결단하니, 중도로 행하면 허물이 없다. (莧의 발음은 현과 견의 반절이요, 陸은 자리공이라는 풀이다.)
소상전(象傳)
象曰:中行无咎,中未光也。
상전에 이르기를, 중도로 행하여 허물이 없다 함은, 중(中)이 아직 빛나지 못함이다.
정이천『이천역전』
五雖剛陽中正居尊位,然切近於上六。上六說體而卦獨一隂,陽之所比也。五為決隂之主,而反比之,其咎大矣。
오효는 비록 강양 중정으로 존귀한 자리에 거하나 상육에게 절박하게 가깝다. 상육은 기뻐하는 몸(태)에 속하고 괘에서 유독 하나의 음이니 양이 친비하는 바이다. 오효는 음을 결단해 내는 주인인데 도리어 그와 친비하니, 그 허물이 크다.
故必決其決如莧陸然,則於其中行之徳為无咎也。中行中道也。莧陸今所謂馬齒莧是也,曝之難乾,感隂氣之多者也,而脆易折。五若如莧陸雖感於隂,而決斷之易,則於中行无過咎矣。不然則失其中正也。
그러므로 반드시 그 결단을 결단함이 현륙과 같이 해야, 그 중도에 맞는 덕에 허물이 없게 된다. 중행은 중도다. 현륙은 지금의 마치현(쇠비름)이니, 볕에 말려도 잘 마르지 않아 음기를 많이 감응한 것이나 연약하여 쉽게 꺾인다. 오효가 현륙처럼 비록 음에 감응했더라도 그 결단함이 단호하면 중도에 과실과 허물이 없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그 중정을 잃는다.
夫人心正意誠,乃能極中正之道而充實光輝。五心有所比,以義之不可而決之,雖行於外,不失中正之義,可以无咎,然於中道未得為光大也。蓋人心一有所欲,則離道矣。夫子於此示人之意深矣。
무릇 사람의 마음이 바르고 뜻이 정성스러워야 비로소 중정의 도를 극진히 하여 충실하고 빛날 수 있다. 오효는 마음속으로 상육과 친비하는 바가 있는데 의리상 안 되기에 억지로 그를 결단한 것이다. 비록 밖으로 행함에 중정의 의리를 잃지 않아 허물이 없으나, 중도에 있어서는 아직 빛나고 커짐을 얻지 못한 것이다. 대개 사람의 마음에 한번 하고자 하는 욕심이 생기면 곧 도에서 떨어져 나간다. 공자께서 여기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뜻이 깊도다.
주자『주역본의』
莧陸,今馬齒莧。感隂氣之多者,九五當決之時,為決之主,而切近上六之隂。如莧陸然,若決而決之,而又不為過暴合於中行,則无咎矣。戒占者當如是也。(象傳)程傳備矣。
현륙은 지금의 마치현이니 음기를 많이 감응한 것이다. 구오는 결단할 때를 당하여 결단의 주인이 되면서 상육의 음에 절박하게 가깝다. 현륙과 같이 만약 결단하고 또 결단하되 지나치게 사납지 않게 하여 중행에 합치하면 허물이 없다. 점치는 자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함을 경계한 것이다. (상전에 대하여는) 정전에 다 갖추어져 있다.
朱子曰:莧陸是兩物。莧者馬齒莧,陸者章陸,一名商陸。皆感隂氣多之物,藥中用商陸治水腫,其物難乾,其子紅。
주자가 말하였다. 현륙은 두 가지 물건이다. 현은 쇠비름이요 륙은 장륙이니 일명 상륙(자리공)이다. 모두 음기를 많이 감응한 물건으로, 약재로 상륙을 써서 수종을 치료하는데 그 물건이 잘 마르지 않고 씨앗이 붉다.
朱子曰:中行无咎,言人能剛決自勝其私,合乎中行則无咎,但能補過而已,未是極至處。這是說那微茫間有些箇意思斷未得。釋氏所謂流注想,荀子謂偷則自行,便是這意思。
주자가 말하였다. 중행무구는 사람이 능히 굳세게 결단하여 스스로 그 사사로움을 이기고 중행에 합하면 허물이 없다는 것이나, 단지 허물을 보충한 것일 뿐 아직 지극한 곳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 희미하고 아득한 사이에 어떤 미련을 아직 다 끊어내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불교의 이른바 유주상(流注想)이요, 순자가 이른바 ’구차하게 몰래 스스로 행한다’고 한 것이 바로 이 뜻이다.
中未光也,言事雖正而意濳有所係,吝,流注不斷,皆意不誠之本也。
‘중이 아직 빛나지 못하다’ 함은, 일은 비록 바르나 뜻이 은밀하게 얽매인 바가 있어 아쉬우니, 찌꺼기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은 모두 뜻이 진실하지 못한 근본임을 말한 것이다.
제가(諸家)의 풀이
한상 주씨(漢上朱氏)
莧蕢,澤草也,葉柔根小,堅且赤。陸,商陸,亦澤草也,葉大而柔,根猥大而深,有赤白二種。
현 비름은 연못 풀이니 잎은 부드럽고 뿌리는 작으나 단단하고 붉다. 륙 상륙 또한 연못 풀이니 잎은 크고 부드러우나 뿌리는 함부로 크고 깊으며, 적색과 백색 두 종류가 있다.
건안 구씨(建安丘氏)
夬五陽爻,而三五皆稱夬夬者,蓋三應上,五比上,皆當決柔之任,故欲其決而又決,而不係累於柔也。又皆以剛居剛,亦有夬夬之義。
쾌 괘의 다섯 양효 중 삼효와 오효가 모두 ’쾌쾌’라 칭한 것은, 삼효는 상효에 응하고 오효는 상효와 친비하여 모두 유(음)를 결단할 임무를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단하고 또 결단하여 유에게 얽매이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또 모두 양이 양자리에 거했으므로 ’쾌쾌’의 뜻이 있다.
운봉 호씨(雲峰胡氏)
決隂者陽也。初九陽位在下不能決,三五陽位當決者也。而三有相應之情,五有相比之情,故皆曰夬夬。三取雨象,五取莧陸象,皆象其感於隂,而莧陸又感隂氣之多者。勉之以夬夬,而又戒其中行則无咎者,五當可決之位,其勢易於三。三唯其夬夬即可以无咎,五之夬夬或失之過暴,則猶為有咎也。
음을 결단하는 것은 양이다. 초구는 양자리이나 아래에 있어 결단하지 못하고, 삼효와 오효는 양자리에 있어 마땅히 결단해야 할 자다. 삼효는 상효와 상응하는 정이 있고 오효는 친비하는 정이 있으므로 모두 ’쾌쾌’라 하였다. 삼효는 비(雨)의 상을, 오효는 현륙의 상을 취했으니 모두 음에 감응함을 상징한 것이요, 현륙은 음기를 더 많이 감응한 것이다. 쾌쾌로써 힘쓰게 하고 또 중행하면 허물이 없다고 경계한 것은, 오효가 결단할 수 있는 지위에 있어 그 형세가 삼효보다 쉽기 때문이다. 삼효는 쾌쾌하기만 하면 곧 허물이 없으나, 오효의 쾌쾌는 혹 지나치게 사나운 것으로 잘못될 수 있으므로 오히려 허물이 되는 것이다.
或曰:夬三月卦,莧始生之時;姤五月卦,瓜始生之時。故以取象。
혹자가 말하기를, 쾌 괘는 삼월의 괘라 쇠비름이 비로소 생겨날 때이고, 구(姤) 괘는 오월의 괘라 참외가 비로소 생겨날 때다. 그러므로 이로써 상을 취한 것이다.
정강중(鄭氏剛中)
五陽竝進同力為夬,而夬夬之戒獨見於三五者,蓋三與六應,五與六比。當決隂之時,二爻容有牽私愛昵近習之心,故雖以九五之尊得中行之道,而象猶以為未光也。
다섯 양이 나란히 나아가 힘을 합쳐 결단하는데 ’쾌쾌’의 경계가 유독 삼효와 오효에서만 보이는 것은, 삼효는 상육과 응하고 오효는 상육과 친비하기 때문이다. 음을 결단할 때를 당하여 이 두 효는 사사로운 사랑에 이끌리고 가까이 익숙한 것에 친압하는 마음을 용납하기 쉽다. 그러므로 비록 구오의 지존으로 중행의 도를 얻었더라도 상전에서 오히려 ’아직 빛나지 못했다’고 한 것이다.
雲峰胡氏曰:本義於履大象及此,獨曰「程傳備矣」,蓋其於履也痛後世風俗之弊甚切,於夬也誅後世君心之非甚嚴。
운봉 호씨가 말하였다. 본의(주자)가 천택리 괘의 대상전과 이 효에 대해서만 유독 “정전에 다 갖추어져 있다”고 한 것은, 리 괘에서는 후세 풍속의 폐단을 통렬히 꾸짖음이 절실했고, 쾌 괘에서는 후세 임금들의 마음의 잘못을 주벌함이 엄격했기 때문이다.
※ 경문·주석 원문은 주역전의대전 통행본을 따랐다.
태극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