風火家人 · 64괘 사전

구삼(九三) — 家人嗃嗃

九三,家人嗃嗃,悔厲,吉。婦子嘻嘻,終吝。
지나침과 방종 사이에서 중도와 절제로 집안의 기강을 세우려는 의지삼효, 양강이 하괘 리(離)의 끝에 거함 — 바르나 중(中)을 얻지 못해 위태로움상구와 응하는 자리이나 둘 다 양(陽)이라 정응하지 않음 — 밖의 호응 없이 홀로 집안을 다스림절제/중도

풀이 — 후회될 만큼 매서워도 집을 살린다

구삼은 하괘 리(離)의 맨 위, 집안을 직접 다스리는 실질적 가장의 자리다. 양효가 양의 자리에 있어 바르기는 하나(正), 가운데(中)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강함이 지나쳐(過剛) 한쪽으로 치우치기 쉽다. 이런 자리에서 집안을 다스리면 자칫 불같이 엄격해져(家人嗃嗃), 식구들이 위축되고 은정이 상한다. 정이천은 이를 두고 “뼈와 살을 나눈 사이라 은혜가 이기게 마련인데 엄격함이 지나치므로 후회한다”고 했다. 그러니 후회스럽고 위태롭다(悔厲).

그런데 효사는 뜻밖에 “길하다(吉)“고 매듭짓는다. 지나친 엄격함이 은정을 상하게 할지언정, 그 덕에 집안의 법도가 가지런하고 엄숙해져 사람의 마음이 공경하고 두려워하게 되기 때문이다. 반대편을 보면 이유가 분명해진다. 부인과 자식이 희희낙락 절도를 잃으면(婦子嘻嘻), 당장은 화기애애하나 법도가 무너지고 윤리가 어지러워져 끝내 부끄러움에 이른다(終吝). 정이천의 말대로 “그 방종함에 잘못을 저지르느니, 차라리 엄격함이 지나친 편이 낫다.” 소상전이 “가인학학은 아직 잃지 않음(未失)이요, 부자희희는 집안의 절도를 잃음(失家節)“이라 가른 까닭이 여기 있다.

원나라 역학자 운봉 호씨는 이 두 길의 방향을 짚는다. 학학은 의(義)로 정(情)을 이긴 것이라 후회는 되나 흉에서 길로 향하고, 희희는 정으로 의를 이긴 것이라 길에서 흉으로 기운다. 후회(悔)는 제 잘못을 돌아보아 마음을 뒤집는 힘이고, 인색(吝)은 한번 정한 것을 고집해 마음을 닫는 굳음이다. 원나라 역학자 쌍호 호씨는 여섯 효 가운데 유독 이 구삼에만 ’가인(家人)’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을 지적한다 — 한 괘의 한가운데 두 음 사이에 끼어 한 집안의 주인이 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다스림의 무게가 바로 이 자리에 걸려 있다.

삶에 들이기

편안함이 곧 좋은 것은 아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선을 넘는 나태를 눈감아 줄 때, 정이 의를 이겨 집안도 조직도 서서히 무너진다. 쓴소리가 입에서 나갈 때의 불편함, 훈육 뒤에 남는 후회(悔厲)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라. 그 매서움이 뼈대를 세워 미래의 붕괴를 막는다. 다만 그 기강은 남을 향한 호통이 아니라 먼저 내 몸을 곧게 하는 데서 선다. 몸의 이치도 다르지 않다. 코어의 긴장을 놓고 흐느적거리면 당장은 편하나 척추가 무너지고, 뼈를 잡아 주는 근육이 팽팽히 당겨져 있어야 자세가 산다. 처음 자세를 익힐 때 각도를 정확히 지키는 딱딱함(嗃嗃)을 견뎌야, 비로소 힘을 뺀 참된 부드러움이 나온다. 규율이 먼저 서고 나서야 화합(至和)이 온다.

훈장님의 풀이 — 허곡 선생님의 주역 강의에서

'嗃嗃(학학)'은 너무 엄숙(嚴肅)함이다 — 가장(아버지)이 지나치게 엄하면 집안 식구들이 위축되어 두려워 벌벌 떤다. '悔厲(회려)'는 후회하고 엄려(嚴厲)함이니, 그렇게 후회는 되나 — 집안 법도가 흐트러져 엉망이 된 것보다, 엄하게 잘 관리하는 편이 자유는 없어도 훨씬 좋다(파괴가 안 되니까). 그래서 吉이다.

悔는 마음 심(忄)에 매양 매(每) — 한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매양 뒤집어 생각하는 것이니(내가 잘못이 없을까), 흉한 쪽에서 길한 쪽으로 간다. 반대로 吝(문 밑에 갇힌 글자)은 한 번 정한 걸 고집해 마음을 안 움직이니(융통성 없음), 길한 쪽에서 흉한 쪽으로 망해 간다. 그러니 사람은 마음을 자주 뒤집어 봐야 제 잘못을 깨달아 오판 없이 산다 — '나는 한번 정한 걸 뒤집는 법이 없다'는 자치고 잘 사는 너그러운 자가 없다.

원문과 주석 — 정이천 · 주자 · 동래 여씨 · 진재 서씨 · 운봉 호씨 · 쌍호 호씨 · 중계 장씨

효사와 소상전

九三,家人嗃嗃,悔厲,吉。婦子嘻嘻,終吝。

구삼은 집안사람들에게 호되게 하여 집안이 엄숙하니(家人嗃嗃), 후회스럽고 위태로우나 길하다(悔厲吉). 부인과 자식이 희희낙락 웃으니(婦子嘻嘻), 마침내 부끄러움에 이른다(終吝). (嗃은 ‘학’, 嘻는 ’희’로 읽는다.)

象曰:家人嗃嗃,未失也。婦子嘻嘻,失家節也。

상전에 이르기를, ’가인학학’은 아직 (법도를) 잃지 않음이요, ’부자희희’는 집안의 절도를 잃음이다.

정이천 『이천역전』

嗃嗃未詳字義,然以文義及音意觀之,與嗷嗷相類,又若急束之意。九三在内卦之上,主治乎内者也。以陽居剛而不中,雖得正而過乎剛者也。治内過剛則傷於嚴急,故家人嗃嗃然。

학학(嗃嗃)은 글자 뜻이 자세하지 않으나, 문맥과 음의 뜻으로 보건대 오오(嗷嗷, 시끄럽게 떠듦)와 서로 비슷하고, 또 조급하게 묶는 뜻과 같다. 구삼은 내괘의 위에 있으니 안(집안)을 다스림을 주관하는 자이다. 양으로서 강에 거하고 중(中)하지 못하니 비록 바름(正)은 얻었으나 강함에 지나친 자이다. 안을 다스림에 지나치게 강하면 엄격하고 조급함에 상하게 되므로 집안사람들이 ’학학’거리는 것이다.

治家過嚴不能无傷,故必悔於嚴厲。骨肉恩勝,嚴過故悔也。雖悔於嚴厲,未得寛猛之中,然而家道齊肅,人心祗畏,猶為家之吉也。

집안을 다스림에 지나치게 엄격하면 상함이 없을 수 없으므로, 반드시 그 엄격하고 매서움을 후회하게 된다. 뼈와 살을 나눈 사이라 은혜가 이기게 마련인데 엄격함이 지나치므로 후회하는 것이다. 비록 엄격하고 매서움에 후회하여 관대함과 사나움의 중용을 얻지 못하였으나, 그러나 가도가 가지런하고 엄숙해지며 사람의 마음이 공경하고 두려워하게 되니, 오히려 집안의 길함이 되는 것이다.

若婦子嘻嘻,則終至羞吝矣。在卦非有嘻嘻之象,葢對嗃嗃而言,謂與其失於放肆,寧過於嚴也。嘻嘻,笑樂无節也。自恣无節,則終至敗家可羞吝也。

만약 부인과 자식이 희희낙락거린다면, 마침내 부끄러움(수린)에 이를 것이다. 괘에는 본래 ’희희’의 상(象)이 없으나, 대개 학학(嗃嗃)에 대조하여 말한 것이니, “그 방사(방종)함에 잘못을 저지르느니, 차라리 엄격함이 지나친 것이 낫다”고 이른 것이다. 희희(嘻嘻)는 웃고 즐김에 절도가 없는 것이다. 스스로 방자하고 절도가 없으면 마침내 집안을 망치는 데 이르러 부끄러울 것이다.

葢嚴謹之過,雖於人情不能无傷,然苟法度立、倫理正,乃恩義之所存也。若嘻嘻无度,乃法度之所由廢,倫理之所由亂,安能保其家乎?嘻嘻之甚則致敗家之凶,但云吝者,可吝之甚則至於凶,故未遽言凶也。

대개 엄격하고 삼감이 지나치면 비록 인지상정에 상함이 없을 수는 없으나, 만일 법도가 서고 윤리가 바르게 된다면 곧 그 엄격함 속에 은의가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희희’거리며 절도가 없다면 곧 법도가 그로 말미암아 폐기되고 윤리가 그로 말미암아 어지러워지니, 어찌 능히 그 집안을 보전할 수 있겠는가. ’희희’가 심하면 집안을 망치는 흉함에 이르거늘, 단지 ’인색하다(吝)’고만 말한 것은, 인색함이 심하면 흉함에 이르므로 아직 대번에 흉(凶)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소상전 해설(정이천):

雖嗃嗃於治家之道未為甚失,若婦子嘻嘻是无禮法失家之節,家必亂矣。

비록 집안을 다스리는 도에 있어 ’학학’거리는 것이 심한 잘못은 되지 않으나, 만약 처자가 ’희희’거리는 것은 예법이 없어 집안의 절도를 잃은 것이니 집안이 반드시 어지러워질 것이다.

주자 『주역본의』

以剛居剛而不中,過乎剛者也。故有嗃嗃嚴厲之象。如是則雖有悔厲而吉也。嘻嘻者嗃嗃之反,吝之道也。占者各以其德為應,故兩言之。

강으로써 강에 거하고 중하지 못하니, 강함에 지나친 자이다. 그러므로 학학하고 엄려한 상이 있다. 이와 같이 하면 비록 회려(후회와 위태로움)가 있으나 길하다. 희희라는 것은 학학의 반대이니, 인색한 도이다. 점치는 자가 각기 그 덕으로써 응하므로 두 가지를 다 말한 것이다.

주자 문답(朱子曰):

禮本天下之至嚴,行之各得其分,則至和。如家人嗃嗃悔厲吉、婦子嘻嘻終吝,都是此理。

예(禮)는 본래 천하의 지극히 엄격한 것이니, 이를 행함에 각기 그 분수를 얻으면 곧 지극히 화합(至和)하게 된다. 가인학학 회려길, 부자희희 종린이 모두 이 이치다.

동래 여씨(東萊呂氏) — 두 가문의 대비

此爻如對兩家而言。且如入一家,見其父子夫婦濟濟有禮,可以知其必興;見其嘻嘻然日以歌舞為樂,可以知其必敗。

이 효는 마치 두 집안을 대조하여 말한 것과 같다. 가령 한 집안에 들어갔는데, 그 부자와 부부가 단정하고 질서 있게(濟濟) 예의가 있는 것을 보면 그 집안이 반드시 흥할 것을 알 수 있고, ’희희’거리며 날마다 춤과 노래로 쾌락만을 일삼는 것을 보면 그 집안이 반드시 망할 것을 알 수 있다.

진재 서씨(進齋徐氏) · 운봉 호씨(雲峰胡氏) — 강(剛)의 위치와 悔·吝의 방향

進齋徐氏曰:九三以剛居剛而不中,故有嗃嗃之象。比乎二四兩柔之間,故又有嘻嘻之象。治家之道,易以情勝義。苟剛而不中,雖過於嚴而有悔厲,然而家道齊肅,人心祗畏,猶為家之吉而未失道也。若笑樂无節,而情愛暱比之私勝,則敗度喪禮,失節亂倫,家道所由以壞也。豈不終可吝乎?

진재 서씨가 말하였다. 구삼은 강으로써 강에 거하고 중하지 못하므로 학학의 상이 있고, 2효와 4효 두 유(柔)의 사이에 친비하므로 또한 ’희희’의 상이 있는 것이다. 집안을 다스리는 도는 정(情)이 의(義)를 이기기 쉽다. 진실로 강하되 중하지 못하면 비록 지나치게 엄하여 후회와 위태로움이 있으나, 그러나 가도가 가지런해지고 민심이 두려워하니 오히려 집안의 길함이 되어 도를 잃지 않은 것이다. 만약 웃고 즐김에 절도가 없어, 정과 사랑과 친압하는 사사로움이 이기면 곧 법도를 무너뜨리고 예를 잃어버리며, 절개를 잃고 윤리를 어지럽히니 가도가 이로 말미암아 무너진다. 어찌 끝내 인색하지 않겠는가.

雲峰胡氏曰:嗃嗃以義勝情,雖悔厲而吉;嘻嘻以情勝義,終吝。悔自凶而吉,吝自吉而凶。九三以剛居剛,若能嚴於家人者;比乎二柔,又若易昵於婦子者。三其在吉凶之間乎!故悔吝之占兩言之。

운봉 호씨가 말하였다. 학학(嗃嗃)은 의(義)로써 정(情)을 이긴 것이니 비록 회려하나 길하고, 희희(嘻嘻)는 정(情)으로써 의(義)를 이긴 것이니 끝내 인색하다. ’회(悔)’는 흉함으로부터 길함으로 가는 것이요, ’린(吝)’은 길함으로부터 흉함으로 가는 것이다. 구삼은 강이 강에 거하니 능히 집안사람들에게 엄격할 수 있는 자 같기도 하고, 두 유(柔, 여자들)와 친비하니 또 부인과 자식들에게 쉽게 끈적거리는 자 같기도 하다. 구삼이 길흉의 사이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회와 인색함의 점을 두루 다 말한 것이다.

쌍호 호씨(雙湖胡氏) · 중계 장씨(中溪張氏) — 한 집안의 주인

雙湖胡氏曰:六爻獨於九三稱家人,以其當一卦之中,介乎二陰之間,有夫婦焉,為一家之主者也。

쌍호 호씨가 말하였다. 여섯 효 중에 유독 구삼 한 효에서만 ’가인(家人)’이라 칭한 것은, 그가 한 괘의 한가운데(하괘 상)에 해당하고 두 음의 사이에 끼어 부부가 있으니, 한 집안의 주인이 되는 자이기 때문이다.

中溪張氏曰:治家嚴急,寧无傷恩之悔,然猶未失治家之道也。若夫婦子嘻嘻,笑樂无度,豈不失治家之節乎?

중계 장씨가 말하였다. 집안을 다스림이 엄격하고 조급하면 어찌 은혜를 상했다는 후회가 없겠는가. 그러나 오히려 집안 다스리는 도를 잃은 것은 아니다. 만약 처자가 희희거리며 웃고 즐김에 한도가 없다면 어찌 집안을 다스리는 절도를 잃은 것이 아니겠는가.

출전: 정이천 『이천역전』, 주자 『주역본의』; 동래 여씨·진재 서씨·운봉 호씨·쌍호 호씨·중계 장씨는 『주역전의대전』소인(所引).

이 효가 動하면風雷益(42번 괘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