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 힘이 있어도 스스로 서지 못할 때
구삼은 양(陽)이 굳센 자리에 앉아 힘이 넘친다. 하괘 간(艮)의 맨 위, 곧 그침(止)의 정점에 놓여 본래는 묵직하게 제 자리를 지켜야 하는 자리다. 몸으로 보면 넓적다리(股)에 해당한다. 넓적다리는 인체에서 가장 크고 강한 근육이지만, 스스로 방향을 정하지 못한다. 발이 가면 따라가고 몸통이 돌면 딸려 돈다. 힘은 세지만 주체가 없는 것 — 이것이 구삼이 처한 자리다.
문제는 이 강한 힘이 엉뚱한 데 쓰인다는 데 있다. 아래의 두 음효(초육·육이)가 먼저 들떠 움직이자, 그쳐야 할 구삼마저 덩달아 휩쓸린다. 위로는 상육의 이끌림에 마음이 기운다. 정이천은 이를 두고 강양한 바탕이 있으면서도 스스로 주재하지 못하고 뜻이 도리어 남을 따르는 데 있다고 했다. 힘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그 힘을 무엇을 향해 쓸지 스스로 정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효사는 그 따름에 얽매여 나아가면 부끄럽다(執其隨,往吝)고 경계한다. 붙들고 지켜야 할 것이 고작 남을 따르는 일이라면, 그 고집은 비천하다(所執下). 소상전은 머물지 못한다(亦不處)고 짚는다. 멈춰야 할 자리에서 멈추지 못하고 분위기에 밀려 움직이는 것 — 그것이 이 효의 병통이다. 힘이 없어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중심이 없어서 끌려간다.
오늘 하루의 태도
군중이 한쪽으로 쏠릴 때, 무리의 속도에 발을 맞추다 제 페이스를 잃는 순간이 있다. 그때 필요한 것은 더 센 힘이 아니라 멈출 줄 아는 중심이다. 몸으로 익히면 분명해진다. 스쿼트에서 다리 힘만 믿고 허리(코어)를 놓으면 관절이 상하듯, 삶에서도 다리가 몸통을 끌고 가면 자세가 무너진다. 태극무예에서 상대가 하단을 흔들어 스텝을 유도할 때, 끌려가지 않는 힘은 단전과 허리의 축을 고정하는 데서 나온다. 오늘 무언가에 급히 휩쓸린다면 한 호흡 멈추고 물어보라. 이것은 내 판단인가, 아니면 발이 가니까 허벅지가 그냥 딸려가는 것인가. 힘을 기르기 전에, 그 힘의 방향을 스스로 정하는 주인 자리를 먼저 세워야 한다.
통찰
멈출 줄 아는 것이 곧 힘이다. 남들이 다 움직인다고 나까지 움직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리가 흔들릴수록, 제 자리를 지키는 한 사람의 무게가 방향을 만든다. 힘을 기르는 일과 그 힘의 주인이 되는 일은 다르다. 근육은 훈련으로 자라지만, 주체성은 흔들림 앞에서 한 번 멈추어 본 사람에게만 자란다. 오늘 휩쓸리고 싶은 자리에서 한 번 멈추어 서 보라. 그 멈춤이 당신을 끌려다니는 넓적다리에서, 걸음을 정하는 주인으로 바꾼다.
원문과 주석 — 정이천·주자·제가
경문과 소상전
九三:咸其股,執其隨,往,吝。
구삼은 그 넓적다리에 느끼니, 그 따름에 얽매여 있어 나아가면 부끄럽다.
象曰:咸其股,亦不處也。志在隨人,所執下也。
상전에 말하였다. 넓적다리에 느낀다는 것은 또한 머물러 있지 못함이다. 뜻이 남을 따르는 데 있으니, 그 고집하는 바가 비천하다.
정이천 『이천역전』
九三以陽居剛,有剛陽之才而爲主於内,居下之上,是宜自得於正道以感於物。而乃應於上六,陽好上而說隂,上居感說之極,故三感而從之。股者,在身之下,足之上,不能自由,隨身而動者也。故以爲象。言九三不能自主,隨物而動,如股然。其所執守者隨於物也。剛陽之才,感於所說而隨之,如此而往,可羞吝也。
구삼은 양으로서 굳센 자리에 거하여 강양(剛陽)한 재주가 있고, 안(하괘)에서 주인이 되어 아랫사람들의 위에 거한다. 마땅히 스스로 바른 도를 얻어 사물에 감응해야 한다. 그런데 도리어 상육에게 응하니, 양은 올라가 음을 기뻐하기를 좋아하는데 상효가 감응과 기쁨의 극치에 거하므로 삼효가 감응하여 그를 따른다. 넓적다리(股)는 몸의 아래, 발의 위에 있어 스스로 자유롭지 못하고 몸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으로 상을 삼았다. 구삼이 능히 스스로 주재하지 못하고 사물을 따라 움직임이 마치 넓적다리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그 고집하여 지키는 바가 사물을 따르는 데 있다. 강양한 재주로 기뻐하는 바에 감응하여 그를 따르니, 이렇게 나아가면 부끄러울 만하다.
有剛陽之質而不能自主,志反在於隨人,是所操執者,卑下之甚也。
강양한 바탕이 있으면서도 능히 스스로 주재하지 못하고, 뜻이 도리어 남을 따르는 데 있으니, 그 지조와 고집이 비천함의 심함이다.
주자 『주역본의』·『주자어류』
股隨足而動,不能自專者也。執者,主當持守之意。下二爻皆欲動者,三亦不能自守而隨之往,則吝矣。故其象占如此。
넓적다리는 발(초·이효)을 따라 움직이니, 능히 스스로 오로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집(執)은 주로 주장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아래의 두 효가 모두 움직이고자 하는데, 삼효 또한 능히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그들을 따라 나아가니 부끄럽다. 그래서 그 상과 점이 이와 같다.
本義言亦者,因前二爻皆欲動而云也。二爻隂躁,其動也宜;九三陽剛,居止之極,宜静而動,可吝之甚也。
『주역본의』에서 또한(亦)이라 한 것은 앞의 두 효가 모두 움직이고자 함으로 인하여 말한 것이다. 두 음효는 조급하니 그 움직임이 마땅하지만, 구삼은 양강으로서 그침(艮)의 극치에 거하므로 마땅히 고요해야 하는데도 움직이니, 부끄러움의 심함이다.
제가(諸家)
운봉 호씨(雲峰胡氏)
腓居下體之中,二象;股居下體之上,三象。程子謂三隨上,蔡氏謂三動而二隨之,本義以爲股隨足而動。艮言隨在二,二腓隨三之限而止也。咸言隨在三,三股隨下之足而動也。
장딴지(腓)는 하체의 가운데 있으니 이효의 상이요, 넓적다리(股)는 하체의 위에 있으니 삼효의 상이다. 정자(정이천)는 삼효가 위(상육)를 따른다고 했고, 채씨는 삼효가 움직이고 이효가 따른다고 했으며, 『주역본의』는 넓적다리가 발을 따라 움직인다고 하였다. 중산간괘에서는 따름(隨)을 이효에서 말했으니 이효의 장딴지가 삼효의 허리(限)를 따라 그친 것이요, 택산함괘에서는 따름을 삼효에서 말했으니 삼효의 넓적다리가 아래의 발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동곡 정씨(東谷鄭氏)
初與二隂也,感於陽而動,故其咸爲拇爲腓。三陽爲艮主,宜止而不動,今亦說上隂而應之,故爲咸其股。
초효와 이효는 음이니 양에 감응하여 움직인다. 그래서 그 느낌이 발가락이 되고 장딴지가 된다. 삼효는 양으로서 간(艮)의 주인이니 마땅히 그쳐 움직이지 않아야 하는데, 지금 또한 위의 음(상육)을 기뻐하여 응하므로 넓적다리에 느낀다고 한 것이다.
진재 서씨(進齋徐氏)
世之君子,位居人上,所守不正,感不以道,而反徇夫䙝御臣僕在下者之私情,至於多行可愧者,皆執其隨者也。
세상의 군자가 지위가 남의 위에 있으면서 지키는 바가 바르지 못하고 도로써 감응하지 않으며, 도리어 곁에서 시중드는 아랫사람들의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부끄러운 짓을 많이 하는 데 이르는 자들은, 모두 그 따름을 고집하는 자이다.
건안 구씨(建安丘氏)
下卦二隂感物而動,故不知止。三剛而止體,乃亦如二隂之爲,故曰亦不處。陽在上而下隨二隂,故曰所執下也。
하괘의 두 음(초·이효)은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므로 그칠 줄 모른다. 삼효는 강하고 그치는 체(艮)인데도 이에 또한 두 음이 하는 것처럼 하므로 또한 머물지 않는다고 하였다. 양이 위에 있으면서 아래로 두 음을 따르므로 고집하는 바가 천하다고 하였다.
彼不處而我亦不處,不能自立而日究乎汚下者也。
(운봉 호씨 보충) 저들이 머물지 않는데 나 또한 머물지 못하니, 능히 자립하지 못하고 날마다 더럽고 비천한 데로 빠져드는 자이다.
출전: 정이천 『이천역전』, 주자 『주역본의』·『주자어류』, 운봉 호씨·동곡 정씨·진재 서씨·건안 구씨는 『주역전의대전』소인(所引).
태극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