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구사(九四)는 함괘(咸卦)의 심장이다. 초효의 엄지발가락에서 시작해 장딴지와 넓적다리를 지나 마침내 마음(心)의 자리에 이른 효다. 함괘의 여섯 효 가운데 오직 이 자리만 신체 부위를 말하지 않는다. 감응할 감(感) 자가 이미 마음 심(心)을 품고 있으니, ’그 마음에 느낀다(咸其心)’고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정이천은 4효가 위아래의 한가운데인 마음의 자리에 있어 감응의 주인이 되므로, 신체를 빌리지 않고 곧바로 감응의 도를 말했다고 풀었다. 다만 이 효는 굳센 양(陽)이 부드러운 음(陰)의 자리에 앉아 제자리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효사는 다짐하듯 ’바르게 하라(貞)’는 경계를 먼저 건다. 바르게 하면 길하여 후회가 없다.
그 ’바름(貞)’을 정이천과 주자는 조금 다르게 읽었다. 정이천은 貞을 “속을 비워 나를 없앰(虛中無我)“이라 하여, 사사로운 나를 지운 텅 빈 마음이라야 천하와 두루 통한다고 보았다. 주자는 더 담백하게 貞을 “바르고 굳셈(正而固)“이라 새기되, 바르고 굳셈을 참으로 깨달으면 허중무아 또한 그 안에 들어 있다고 했다. 두 해석이 겨누는 곳은 하나다. 문제는 그 반대편, 곧 ’동동왕래(憧憧徃來)’다. 오고 감 자체는 허물이 아니다. 주자의 말대로 천지 사이에 오고 감은 본래 끊이지 않는다. 다만 거기에 ‘동동’, 곧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재고 셈하는 마음이 붙는 순간 사사로움이 된다. 한 마음으로는 남을 감동시키려 하면서 또 한 마음으로는 그가 응답해 주기를 바라는 것, 베풀면서 답장을 기다리는 그 계산이 병통이다. 주자는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할 때 깜짝 놀라 구하러 가면 될 것을, “그 부모가 나를 좋은 사람이라 여겨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곧 동동이라 했다.
그렇게 계산하는 마음으로 감응하면 어떻게 되는가. 생각이 미치는 곳만 통하고 미치지 못하는 곳은 닫히니, 결국 끼리끼리 모인 무리(朋)만이 내 뜻을 따를 뿐이다. 소상전이 이를 두고 ’아직 빛나고 크지 못하다(未光大)’고 했다. 감응의 폭이 제 편의 울타리를 넘지 못한 것이다. 반대로 바르게 하여 길한 까닭은 ‘아직 사사로운 느낌의 해를 입지 않았기(未感害)’ 때문이다. 공자는 계사전에서 바로 이 효사를 끌어와 우주의 이치로 넓혔다. “천하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근심하랴(何思何慮).” 해가 가면 달이 오고 추위가 가면 더위가 오듯, 굽힘과 폄(屈信)이 서로 밀며 이로움을 낳는다. 억지로 머리를 굴려 천하를 다루려 들지 말고 그 자연한 리듬에 마음을 맡기라는 것이다. 함괘 구사는 지난 일을 돌아보는 자리가 아니라 앞을 여는 자리다. 셈을 놓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애쓰지 않고도 천하와 통하는 길이 열린다.
삶에의 적용
누구에게나 마음을 주면서 돌아올 답을 세는 버릇이 있다. 좋은 일을 하고도 알아주기를 기다리고, 말 한마디를 건네고도 상대의 반응에 마음이 매인다. 그 계산이 드는 순간 몸이 먼저 안다. 가슴 한복판이 조여들고 호흡이 얕아지며 어깨가 안으로 말린다. 마음이 옹졸해지면 몸도 함께 닫히는 것이다. 그럴 때는 하던 셈을 멈추고, 숨을 깊게 내려 가슴을 활짝 연다. 준 것은 준 순간 끝난 것으로 두고, 보답을 기다리는 마음을 비운다. 굽힐 때 온전히 굽히고 펼 때 온전히 펴는 굴신(屈信)의 리듬에 몸을 맡기면, 애써 밀어붙이지 않아도 마음은 저절로 넓어진다. 텅 비운 마음이라야 세상 전체를 품을 수 있고, 그 넓이가 곧 사람의 빛(光大)이다.
원문과 주석 — 구사(九四) 경문·소상전과 역대 주석
경문·소상전
九四:貞吉,悔亡。憧憧徃來,朋從爾思。 구사는 바르게 하면 길하여 후회가 없다. 자주 오가며 마음을 졸이면(동동왕래), 무리들만이 네 뜻을 따른다(붕종이사).
象曰:貞吉悔亡,未感害也。憧憧徃來,未光大也。 소상전에 이르되, ’바르면 길하고 후회가 없음’은 아직 사사로운 감응의 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요(미감해), ’동동거리며 오감’은 감응의 도가 아직 빛나고 크지 못함이다(미광대).
정이천 『이천역전』
感者,人之動也,故皆就人身取象。拇取在下而動之㣲,腓取先動,股取其隨。九四无所取,直言感之道。不言咸其心,感乃心也。四在中而居上,當心之位,故爲感之主,而言感之道。 감응이란 사람의 움직임이므로 모두 사람의 몸에 나아가 상(象)을 취하였다. 엄지발가락은 아래에 있어 그 움직임이 미세함을 취했고, 장딴지는 먼저 움직임을 취했으며, 넓적다리는 따름을 취했다. 구사는 취한 신체가 없이 곧바로 감응의 도를 말하였다. ’그 마음에 느낌(咸其心)’이라 말하지 않은 것은 감(感)이 곧 마음이기 때문이다. 4효는 전체의 가운데에 있으면서 상괘에 거하니 마음의 자리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감응의 주인이 되어 감응의 도를 말한 것이다.
貞正則吉而悔亡,感不以正則有悔也。又四說體居隂而應初,故戒於貞。感之道,无所不通,有所私係,則害於感通,乃有悔也。聖人感天下之心,如寒暑雨暘,无不通无不應者,亦貞而已矣。貞者,虗中无我之謂也。 바르게 하면 길하여 후회가 없고, 감응함을 바름으로써 하지 않으면 후회가 있다. 또 4효는 기뻐하는 태(兌)의 체에 속하고 음자리에 거하면서 초효와 응하므로 바르게 할 것을 경계하였다. 감응하는 도는 통하지 않는 바가 없어야 하는데, 사사롭게 얽매인 바가 있으면 느끼어 통함에 해가 되어 마침내 후회가 있게 된다. 성인이 천하의 마음을 감동시킴이 마치 춥고 덥고 비 오고 볕 나는 것과 같아 통하지 않음이 없고 응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또한 ’바르게 함’일 뿐이다. 정(貞)이란 속을 비워 내가 없음을 이른다.
夫貞一,則所感无不通。若徃來憧憧然,用其私心以感物,則思之所及者有能感而動,所不及者不能感也。是其朋類則從其思也。以有係之私心,既主於一隅一事,豈能廓然无所不通乎? 무릇 바르고 한결같으면 감응하는 바가 통하지 않음이 없다. 만약 오가며 마음을 졸이고 동동거리며 그 사사로운 마음으로 사물과 감응한다면, 생각이 미치는 곳은 능히 감응하여 움직이겠으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감응할 수 없다. 이는 그 무리들만이 그 뜻을 따르는 것이다. 얽매임이 있는 사사로운 마음으로 이미 한 구석과 한 가지 일에만 치중하니, 어찌 툭 트여서 통하지 않음이 없겠는가?
貞則吉而悔亡,未爲私感所害也。係私應則害於感矣。憧憧徃來,以私心相感,感之道狹矣,故云未光大也。 (소상 전) 바르면 길하고 후회가 없다는 것은 아직 사사로운 느낌에 의해 해를 입지 않은 것이다. 사사로운 응함에 얽매이면 곧 감응함에 해가 된다. ’동동왕래’는 사사로운 마음으로 서로 감응하는 것이니 감응의 도가 좁다. 그러므로 ’아직 빛나고 크지 못하다’고 한 것이다.
출전: 정이천 『이천역전』咸卦 구사 전(傳) 및 소상 전.
주자 『주역본의』
九四居股之上,脢之下,又當三陽之中,心之象,咸之主也。心之感物,當正而固,乃得其理。今九四乃以陽居隂,爲失其正而不能固,故因占設戒,以爲能正而固則吉而悔亡。若憧憧徃來,不能正固而累於私感,則但其朋類從之,不復能及逺矣。 구사는 넓적다리(3효)의 위, 등살(5효)의 아래에 거하고, 또 세 양효의 가운데에 해당하니 마음(心)의 상이며 함(咸)의 주인이다. 마음이 사물과 감응할 때는 마땅히 바르고 굳세어야 그 이치를 얻는다. 지금 구사는 양으로서 음에 거하여 그 바름을 잃고 능히 굳세지 못하므로, 점에 인하여 경계를 베풀어 “능히 바르고 굳세면 길하고 후회가 없을 것”이라 한 것이다. 만약 동동거리며 오가고 능히 바르고 굳세지 못하여 사사로운 감응에 얽매인다면, 단지 그 무리들만 따를 뿐 다시는 능히 먼 곳까지 미치지 못한다.
感害,言不正而感則有害也。 (소상 본의) ’감해(感害)’는 바르지 못하게 감응하면 곧 해로움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출전: 주자 『주역본의』咸卦 구사.
주자 어록 『주자어류』
或問:程傳云「貞者虗中无我之謂」,本義云「貞者正而固」,不同何也?朱子曰:某尋常觧經,只要依訓詁說字,如貞字作正而固。子細玩索,自有滋味。若曉得正而固,則虗中无我也在裏靣。 어떤 이가 묻되 “정전에서는 貞을 ’마음을 비워 내가 없음’이라 하고 본의에서는 貞을 ’바르고 굳셈’이라 하니, 같지 않음은 어째서입니까?” 주자가 답하되 “내가 평소 경을 풀 때는 오직 훈고에 의지하여 글자를 설명하니, 貞자를 ’바르고 굳셈’으로 새기는 것과 같다. 자세히 음미하면 절로 그 안에 맛이 있다. 만약 ’바르고 굳셈’을 참으로 깨닫는다면 ‘마음을 비워 내가 없음’ 또한 그 안에 들어 있다.”
徃來自不妨,天地間自是徃來不絶,只不合著憧憧了,便是私意。 오고 가는 것 자체는 방해될 것이 없다. 천지 사이에 오고 감은 본래 끊이지 않으니, 다만 ’동동’을 붙이는 것이 합당치 않다. 그것이 곧 사사로운 뜻(私意)이다.
徃來固是感應,憧憧是一心方欲感他,一心又欲他來應。如正其義便欲謀其利,明其道便欲計其功。又如赤子入井之時,此心方怵惕要去救他,又欲他父母道我好,這便是憧憧底病。 왕래는 진실로 감응이지만, ’동동’이란 한 마음으로는 그를 감동시키려 하면서 또 한 마음으로는 그가 와서 응답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마치 그 의리를 바르게 하면서 곧 그 이익을 도모하려 하고, 그 도를 밝히면서 곧 그 공을 계산하려는 것과 같다. 또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할 때, 이 마음이 깜짝 놀라 그를 구하러 가야 하는데 ‘또 그 부모가 나를 좋은 사람이라 말해 주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바로 ’동동’의 병통이다.
출전: 주자 어록 『주자어류』咸卦 구사.
제가 — 중계 장씨(中溪張氏)
四當心位而不言心,爻言思,象言感者,即心也。夫本然虗静之天,純乎貞一,未有私感之害,故吉而悔亡。若憧憧然徃來乎比應之間,則意向不定,其所感者狹矣。匪其朋則不從,故曰未光大也。 4효가 마음의 자리에 해당하는데 마음이라 말하지 않고, 효사에서는 ’생각(思)’을 말하고 상전에서는 ’감응(感)’을 말한 것은 그것들이 곧 마음이기 때문이다. 무릇 본연의 비어 있고 고요한 하늘은 바르고 한결같음에 순수하여 아직 사사로운 느낌의 해가 없다. 그러므로 길하고 후회가 없다. 만약 동동거리며 친함(比)과 응함(應) 사이에서 오간다면 뜻이 향하는 바가 정해지지 않아 그 감응하는 바가 좁아진다. 그 무리가 아니면 따르지 않으므로 ’빛나고 크지 못하다’고 한 것이다.
제가 — 쌍호 호씨(雙湖胡氏)
四不正而云貞吉悔亡者,貞則吉而悔可亡,戒之也。葢四與初爲徃來之爻,而二爻皆不正,故戒以憧憧徃來,則所感者狹而不廣矣。四當心象而不言心者,以心在内而不可見,故特言心之用,思者心之用也。 구사가 바르지 못한데 ’정길회망’이라 한 것은, 바르게 하면 길하고 후회가 없어질 것이니 경계한 것이다. 대개 4효와 초효는 오고 가는 효인데 두 효가 모두 바르지 못하므로 “동동거리며 오가면 그 감응하는 바가 좁고 넓지 못하다”고 경계하였다. 4효가 마음의 상에 해당하는데 마음을 말하지 않은 것은, 마음은 안에 있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마음의 작용(用)을 말한 것이니, 생각(思)이란 마음의 작용이다.
제가 — 운봉 호씨(雲峯胡氏)
爻言貞吉悔亡,凡四卦皆先占後象。巽九五、咸、大壯、未濟皆九四。九居四本非貞而有悔,聖人因占設戒,兩開其端。以爲貞者正而固也,如是則吉而悔亡。若憧憧於徃來,則失其正而固者矣。寂然不動,心之體;感而遂通天下之故,心之用。憧憧徃來,已失其寂然不動之體,所思者朋類之從爾,安能感而遂通天下之故哉! 효사에서 ’정길회망’을 말한 것은 무릇 네 괘인데 모두 점을 먼저 말하고 상을 뒤에 말했다(선점후상). 손(巽) 구오와 함·대장·미제의 구사이다. 구(양)가 4위(음)에 거함은 본래 바르지 못하여 후회가 있으나, 성인이 점에 인하여 경계를 베풀어 양 끝을 열어 놓았다. ’정(貞)은 바르고 굳셈’이니 이와 같이 하면 길하고 후회가 없다는 것이요, 만약 오가며 동동거리면 그 바르고 굳셈을 잃는다는 것이다. 고요히 움직이지 않음(寂然不動)은 마음의 본체요, 느끼어 마침내 천하의 연고를 통함(感而遂通)은 마음의 작용이다. 동동거리며 오가는 것은 이미 그 적연부동의 본체를 잃었으니, 그 생각하는 바는 무리들의 따름일 뿐, 어찌 능히 느끼어 천하의 연고를 통할 수 있겠는가!
二與四皆有吉。四正而感,則亦免於害。 2효(육이)와 4효(구사)는 모두 ’길(吉)’함이 있다. 4효가 바르게 하여 감응하면 또한 해로움을 면할 수 있다.
출전(제가): 『주역전의대전』咸卦 구사 소주(小註).
태극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