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산천대축(山天大畜)의 두 번째 효, 구이(九二)입니다. 효사는 단 세 글자, “여설복(輿說輹)“입니다. 수레와 차축을 이어주는 가죽끈을 벗겨낸다는 뜻입니다. 수레는 끈이 풀리면 나아가지 못합니다. 곧 스스로 멈춤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앞의 초구(初九)는 경험이 없어 무작정 나아가려다 제지를 당해 멈췄습니다. 그래서 “위태로움이 있으니 멈추라”는 경계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구이는 다릅니다. 정이천은 “구이가 비록 강건한 몸이나 그 처신이 중도(中道)를 얻었으므로 나아가고 멈춤에 실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위에 육오(六五)라는 큰 힘이 막고 있음을 미리 헤아려, 부딪치기 전에 스스로 시동을 끄고 끈을 푼 것입니다. 주자 역시 “그가 중에 처했으므로 능히 스스로 멈추어 나아가지 않는다”고 풀이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멈춤이 무능이나 굴복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남이 나를 강제로 멈추게 하면 좌절이지만, 내가 나를 멈추면 여유이자 지혜입니다. 정이천이 강조한 강중(剛中)과 유중(柔中)의 차이가 이 대목의 핵심입니다. 유중은 부드러워 지나치게 유약함에 이르지 않을 뿐이지만, 강중은 능력이 차고 넘치는데도 균형을 잡는 것입니다. 힘이 없어 못 가는 것이 아니라, 갈 수 있는데도 형세를 읽고 스스로 가지 않는 것(能不行). 이것이 구이의 격조입니다.
삶에의 적용
강한 것보다 어려운 것이 멈출 줄 아는 것입니다. 일이 벽에 부딪쳤을 때, 억지로 밀어붙이다 부서지지 말고 “지금은 정비할 때”라고 스스로 선언하는 힘. 상사나 거대한 흐름에 막혔을 때 들이받는 대신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여유. 몸을 닦는 자리에서도 같습니다. 맹수가 근육을 떨면서도 결정적 순간까지 뛰쳐나가지 않듯, 힘이 넘칠수록 그 힘을 통제하는 데서 진짜 수양이 드러납니다.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능력, 그것이 강중의 사람이 지닌 무게입니다.
훈장님의 풀이는 이 대목의 강의 전사가 도달하는 대로 더해집니다.
원문과 주석 — 정이천『이천역전』·주자『주역본의』·제가
효사(爻辭)와 상전(象傳)
九二,輿說輹。
구이는 수레의 바퀴통 끈(복)을 벗겨낸다. (설說은 벗을 탈脫과 통함. 복輹은 차축과 수레를 잇는 가죽끈)
象曰:輿說輹,中无尤也。
상전에 이르길, ’수레의 끈을 벗긴다’는 것은 중도를 얻어 허물이 없기 때문이다.
정이천『이천역전』
二為六五所畜止,勢不可進也。五據在上之勢,豈可犯也?
구이는 육오에게 멈춤을 당하는 바가 되니 형세상 나아갈 수가 없다. 오효가 위에 있는 세력에 의거하고 있으니(왕의 자리), 어찌 가히 범할 수 있겠는가?
二雖剛健之體,然其處得中道,故進止无失。雖志於進,度其勢之不可,則止而不行。如車輿脱去輪輹,謂不行也。
구이가 비록 강건한 몸이나 그 처신이 중도를 얻었으므로 나아가고 멈춤에 실수가 없다. 비록 뜻은 나아감에 있으나 그 형세의 불가함을 헤아려 곧 멈추어 행하지 않는다. 마치 수레에서 바퀴와 차축을 묶은 끈을 벗겨버린 것과 같으니, 가지 않음을 이른다.
輿說輹而不行者,盖其處得中道,動不失宜,故无過尤也。善莫善於剛中。柔中者,不至於過柔耳。剛中,中而才也。
수레의 끈을 벗겨 가지 않는 것은 대개 그 처신이 중도를 얻어 움직임이 마땅함을 잃지 않으므로 과실과 허물이 없다. 선함은 강중(剛中)보다 더 선한 것이 없다. 유중(柔中)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유약함에 이르지 않을 뿐이지만, 강중은 중용이면서도 재능이 있는 것이다.
初九處不得中,故戒以有危宜已;二得中,進止自无過差,故但言輿說輹,謂其能不行也。不行則无尤矣。
초구는 중을 얻지 못했으므로 ’위태로움이 있으니 멈추라’고 경계한 것이고, 구이는 중을 얻어 진퇴에 스스로 실수가 없으므로 단지 ’여설복’이라고만 말했으니, 이는 능히 가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가지 않으니 허물이 없다.
初與二乾體剛健,而不足以進;四與五隂柔,而能止。時之盛衰,勢之強弱,學易者所宜深識也。
초효와 이효는 건체(乾體)로서 강건하지만 족히 나아가지 못하고, 사효와 오효는 음유하지만 능히 멈추게 한다. 때의 성하고 쇠함과 형세의 강하고 약함, 역(易)을 배우는 자는 마땅히 이것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주자『주역본의』
九二亦為六五所畜。以其處中,故能自止而不進,有此象也。(說吐活反,輹音服又音福,一有其字)
구이 또한 육오에게 멈춤을 당한다. 그러나 그가 중에 처했으므로 능히 스스로 멈추어 나아가지 않으니 이러한 상이 있는 것이다.
제가(諸家)
운봉 호씨(호병문)
雲峯胡氏曰:初剛居剛,性欲上進,曰利已者,勉其止也。二剛中,自能止而不行,可謂知時者矣。
초구는 강으로서 강한 자리에 거하여 본성이 위로 나아가고자 하므로 ’멈춤이 이롭다’고 한 것은 억지로 그를 멈추게 권면한 것이다. 구이는 강중하여 스스로 능히 멈추어 행하지 않으니, 가히 ’때를 아는 자(知時者)’라 할 만하다.
한상 주씨(주진)
漢上朱氏曰:初剛正也,二剛中也,四五柔也。柔能畜剛,剛知其不可遽犯而安之時也。夫氣雄九軍者,或屈於賔贊之儀;才力盖世者,或聽於委裘之命。故曰大畜時也。
초구는 강정하고 구이는 강중하며, 육사와 육오는 유하다. 유가 능히 강을 멈추게 하니, 강이 급하게 범할 수 없음을 알고 그 때에 편안해하는 것이다. 대저 기운이 아홉 군대를 압도할 만큼 웅장한 자라도 혹 빈객을 돕는 작은 예절에 굽히기도 하며, 재주와 힘이 세상을 덮을 만한 자라도 혹 임금이 옷자락을 드리우고 내리는 명령을 듣기도 한다. 그러므로 ’대축의 때’라고 하는 것이다.
동계 왕씨(왕신자)
童溪王氏曰:小畜之九三,見畜於六四,而曰輿說輻,四說其輻也;大畜之九二,受畜於六五,又曰輿說輹,是自說其輹也。夫說人之輻與自說其輹,語其勢之逆順,盖有間矣。何者?九三剛過,而九二則剛得中故也。剛而得中,則進止无失,故象釋之曰中无尤也。
풍천소축 괘의 구삼은 육사에게 저지를 당하여 ’수레의 바퀴살이 벗겨졌다’고 했으니 이는 사효가 강제로 벗긴 것이다. 대축의 구이는 육오에게 저지를 당하여 ’수레의 바퀴끈을 벗겼다’고 했으니 이는 구이가 스스로 벗긴 것이다. 대저 남이 내 바퀴살을 벗긴 것과 스스로 내 끈을 푼 것은 그 형세의 거스름과 순응함에 차이가 있다. 어째서인가? 소축의 구삼은 강함이 지나쳤고, 대축의 구이는 강하되 중을 얻었기 때문이다. 강하되 중을 얻으면 나아가고 멈춤에 실수가 없으므로 상전이 풀이하여 ’중을 얻어 허물이 없다’고 한 것이다.
난 정서(난정서)
蘭氏廷瑞曰:小畜以一隂而畜五陽,而六四為小畜之主,近畜九三。以小畜大,以隂畜陽,又非正應,所以九三不受畜,而有夫妻反目之象。大畜則艮能止三陽之健。九二在下卦之中,而止受六五大君所畜。以君畜臣,以上畜下,二五皆中,其正應居中相應,何尤之有?
소축은 한 음이 다섯 양을 멈추게 하는데 육사가 소축의 주인으로 가까이 구삼을 멈추게 한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멈추게 하고 음으로 양을 멈추게 하며 또 정응도 아니므로 구삼이 멈춤을 받아들이지 않아 ’부부가 반목하는 상’이 있다. 대축은 간(艮)이 세 양의 굳셈을 멈추게 한다. 구이는 하괘의 가운데에 있고 육오 대군의 멈춤을 받아들이니, 임금이 신하를 멈추게 하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이효와 오효가 모두 중이고 정응으로 서로 응하니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식재 여씨(여정)
息齋余氏曰:小畜待隂廹之而後說輻,故反目;大畜才及中而自說其輹,此有知幾之吉,彼有來廹之嫌,故无尤。
소축은 음이 핍박하기를 기다린 뒤에야 바퀴살이 벗겨지므로 반목하고, 대축은 재주가 중도에 미쳐 스스로 그 바퀴끈을 벗었으니, 이것은 ’기미를 아는 길함(知幾之吉)’이 있는 것이요 저것(소축)은 닥쳐와 핍박하는 혐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축 구이는 허물이 없다.
태극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