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지뢰복(地雷復)에서 다시 돋아난 한 양(陽)은 맨 아래 초구(初九)다. 그 바로 위에 있는 육이는 스스로 길을 뚫은 선구자가 아니다. 음(陰)으로서 유순하고, 하괘의 가운데 자리에 반듯하게 거하는(柔順中正) 평범한 자리다. 그런데도 효사는 ’휴복(休復), 길하다’고 한다. ’휴(休)’는 쉰다는 뜻만이 아니라 고전에서는 ’아름답다(美)’는 뜻으로 쓰인다. 내가 직접 어둠을 뚫지 못하더라도, 이미 돌아온 어진 이 곁에 붙어 그를 존중하고 배우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회복’이 된다는 것이다.
소상전은 그 까닭을 ’어진 이에게 낮추기 때문(以下仁也)’이라 밝힌다. 정이천은 초구를 ’인(仁)이 체화된 사람(仁人之體)’으로 보았다. 육이가 그와 간절히 친하며 뜻이 양을 따라 자기를 낮추니, 이것이 곧 ’하인(下仁)’이다.1 주자는 여기에 배움의 이치를 덧붙인다. “배움은 어진 이를 가까이하는 것보다 편한 것이 없다. 이미 어진 자를 얻어 친애하고 그 선함을 바탕 삼아 스스로를 유익하게 한다면, 힘을 수고롭게 쓰지 않아도 배움이 아름다워진다.”2 어진 이를 가까이하면 저절로 어질어진다(親賢則賢). 사람이 다 현명할 수는 없으나, 현명한 이를 친애하면 곧 현명해진다.
이 효는 주역 384효 가운데 ’인(仁)’이라는 글자가 직접 나오는 드문 대목이다. 남헌 장씨는 이를 두고 공자에게 깊은 뜻이 있다고 보았다.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克己復禮)이 인이다. 사심을 이기고 천리를 회복하는 것이 인이 되는 까닭이다.”3 자존심을 앞세우지 않고 어진 이에게 고개 숙여 따르는 태도야말로, 인에 이르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이라는 뜻이다.
삶에의 적용
수양은 반드시 홀로 이루는 것이 아니다. 내 곁에 진짜 실력자, 진짜 어른이 있다면, 자존심을 세우기보다 그 옆에 낮추어 붙는 것이 훨씬 이롭다. 인격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굴욕이 아니라 격(格)의 상승이다. 마음이 어진 이 쪽으로 기울면 중심이 잡히고 불안이 가라앉는다. 욕심을 움켜쥐고 있으면 집중이 흩어지지만, 어진 이를 향하면 힘을 들이지 않아도 공부가 되고 몸가짐이 바르게 선다. 아래에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不恥下問), 한 수 배우겠다며 자세를 낮추는 것 — 그 낮춤 속에서 음(陰)이던 마음이 서서히 양(陽)으로 바뀐다. 몸은 그대로여도 마음이 어진 쪽으로 돌아서는 것, 그것이 육이의 아름다운 회복이다.
훈장님의 풀이 — 허곡 선생님의 주역 강의에서
"미흐라(美故) 휴복(休復)이니 — 아름답게 회복, 아름다워야 회복. 또는 찾아가니까 아름답지. 휴복이라고 했으니 길(吉)이다, 그래서 좋은 거다."
"유순중정(柔順中正)하니 — 이효(六二)는 음효라 기본적으로 부드럽고 순해. 자리가 중정(中正)이라 가운데고 반듯하고, 근어초구(近於初九) 초구 자리에 가깝고, 능하지(能下之)하야 능히 아래쪽으로 내려가서, 복지휴미(復之休美)니 회복 돌아가는 것이 참으로 아름다우니 길지도(吉之道)라."
"막편근호인(莫便近乎仁) — 학문 배우는 것이 어진 이 가까이 하는 것보다 더 편할 수가 없다. 세상을 악바리같이 살다가 나쁜 마음을 버리면 거기서부터 마음이 도리어 편해지지. 인자(仁者)에 가까운 쪽으로 가면 학문하기가 쉬워, 중심이 잡히고 불안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건 다 현(賢)으로 태어나, 그런데 능히 다 어질고 착하지 못하니(不能皆賢) 욕심 때문이다 — 친현(親賢)한즉 현의(賢矣)라,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 있으면 그쪽으로 친하게 가까이 간즉 그걸 배워서 착하고 훌륭하게 되는 거다."
"복괘에서는 오직 초구 한 효만 양효로 돼 있고 이효는 양이 아니고 — 그런데 능하지(能下之) 능이 초효 양을 따라 내려간즉 음변이 양(陰變陽)이라, 몸뚱이는 음이 맞는데 마음이 변해서 양으로 바뀌게 돼."
원문과 주석 — 경문·소상전과 제가(諸家)의 풀이
효사와 소상전
六二, 休復, 吉.
육이는 아름답게 돌아오니, 길하다.
象曰, 休復之吉, 以下仁也.
상전에 이르길, ’휴복이 길하다’는 것은 어진 사람에게 자기를 낮추기 때문이다.
정이천『이천역전』
二雖隂爻, 處中正而切比於初, 志從於陽, 能下仁也. 復之休美者也.
육이는 비록 음효이나 중정(中正)에 거하고 초구와 간절히 친하며, 뜻이 양을 따르니 능히 어진 이에게 자기를 낮추는 자이다. 이는 회복함의 아름다운 자이다.
復者, 復於禮也. 復禮則為仁. 初陽復, 復於仁也. 二比而下之, 所以美而吉也.
복(復)이라는 것은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로 돌아가면 곧 인(仁)이 된다. 초구의 양이 돌아온 것은 인으로 돌아온 것이다. 육이가 그와 친하면서 그에게 자기를 낮추니, 이 때문에 아름답고 길한 것이다.
주자『주역본의』
柔順中正, 近於初九而能下之, 復之休美, 吉之道也.
유순하고 중정하며, 초구와 가까이 있으면서 능히 그에게 자기를 낮추니, 회복함이 아름다워 길한 방도이다.
問, 休復之吉, 以下仁也. 朱子曰, 初爻為仁人之體, 六二爻能下之, 謂附下於仁者. 學莫便於近乎仁. 既得仁者而親之, 資其善以自益, 則力不勞而學美矣. 故曰休復吉.
“’휴복지길 이하인야’란 무엇입니까?” 주자가 답하기를, 초효는 ’어진 사람의 본체(仁人之體)’가 되고 육이 효는 능히 그에게 낮추니, 인에게 붙어서 낮추는 자를 말한다. 배움은 인을 가까이하는 것보다 편한 것이 없다. 이미 어진 자를 얻어 친애하고 그 선함을 바탕 삼아 스스로를 유익하게 한다면, 힘을 수고롭게 쓰지 않아도 배움이 아름다워진다. 그러므로 ’휴복 길’이라 했다.
제가(諸家)
건안 구씨(구부국)
建安丘氏曰, 人不能皆賢, 親賢則賢矣, 六二下仁之謂也.
사람이 다 현명할 수는 없으나, 현명한 이를 친애하면 곧 현명해지는 것이니, 육이가 인에게 낮춘다는 것이 이를 말함이다.
卦惟初九一爻為陽, 二非陽而能下之, 則隂變而陽, 小人變而君子, 而復之六二亦變為臨之九二矣. 烏得而不吉哉.
이 괘는 오직 초구 한 효만이 양이다. 이효는 양이 아니지만 능히 그에게 낮추니, 곧 음이 변하여 양이 되고 소인이 변하여 군자가 되며, 지뢰복의 육이가 변하여 지택림의 구이가 되는 것이다. 어찌 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헌 장씨(장식)
南軒張氏曰, 易三百八十四爻未嘗言仁, 此獨言之, 夫子盖有深旨.
주역 384효에서 일찍이 ’인’을 말하지 않았는데, 이 효(상전)에서만 유독 그것을 말했으니, 공자께서 대개 깊은 뜻이 있으신 것이다.
克己復禮為仁. 克其私心, 復其天理, 所以為仁. 二去初未逺, 上无係應, 能從初而復, 所以為下仁也.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克己復禮)이 인이다. 사심을 이기고 천리를 회복하는 것이 인이 되는 까닭이다. 이효는 초효와의 거리가 멀지 않고 위로 매여 응하는 곳이 없어, 능히 초효를 따라서 회복하니, 이것이 ’인에게 낮춤’이 되는 까닭이다.
至四但言以從道也, 而不謂之仁矣. 盖道者舉其大凡, 不若仁為切至也.
사효에 이르러서는 단지 ’도를 따른다’라고만 말하고 ’인’이라고는 이르지 않았다. 대개 도(道)라는 것은 대략적인 것을 든 것이라, 인(仁)이 간절하고 지극함과는 같지 않기 때문이다.
서산 진씨(진덕수)
西山真氏曰, 伊川語録中説仁者以天地萬物為一體, 説得太寛, 无捉摸處. 易傳只云四徳之元, 猶五常之仁, 偏言則一事, 専言則包四者.
이천어록 중에서 인을 설명할 때 ’천지 만물을 한 몸으로 여긴다’고 한 것은, 설명이 너무 넓어서 종잡을 곳이 없다. 『역전』에서는 단지 ’사덕의 으뜸(元)이 오상의 인과 같다’고 하여, 치우쳐 말하면 하나의 일이요 오로지하여 말하면 넷을 포함한다고 했다.
又云仁者天下之公, 善之本也, 只此兩處説仁, 極平正確實. 學者且當玩此. 此是程子手筆也.
또 (정이천이) 이르기를 ’인이란 천하의 공평함이요 선의 근본이다’라고 했으니, 단지 이 두 곳에서 인을 설명한 것이 지극히 평이하고 바르며 확실하다. 배우는 자는 마땅히 이것을 깊이 음미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자의 친필이다.
태극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