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무너지는 자리
육삼(六三)은 우리 대부분의 모습이다. 초구(初九)가 한 번 어긋나면 곧바로 바로잡는 안회(顔回) 같은 사람이었고, 육이(六二)가 어진 이 곁에 낮추어 배우는 사람이었다면, 육삼은 아침에 결심하고 저녁에 무너지는 평범한 사람이다. 효사는 이를 “빈복(頻復)”, 곧 “자주 돌아온다”고 했다. 자주 돌아온다는 말은 뒤집으면 자주 잃는다는 뜻이다. 결심이 사흘을 넘기지 못하는, 위태로운 자리다.
육삼은 하괘 진(震)의 맨 위, 움직임이 극에 이른 곳에 있다. 음(陰)의 부드러움이 양(陽)의 자리에 앉아 중정(中正)을 얻지 못했으니, 마음이 들뜨고 조급하다. 정이천은 이를 “회복함이 잦으나 견고하지 못한 자”라 했다. 회복은 편안하고 굳건함을 귀하게 여기는데, 자주 돌아오고 자주 잃으니 회복에 안착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경문은 “위태로우나 허물은 없다(厲无咎)“고 한다. 여기에 주역의 깊은 포용이 있다. 정이천의 풀이가 그 핵심을 짚는다. 허물은 잃음에 있는 것이지 돌아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주 잃는 것은 위태롭게 여겨 경계하되, 자주 돌아오려는 그 노력만은 결코 막아서는 안 된다. 성인은 바로 이 사람을 위해 착함으로 옮겨가는 길(遷善之道)을 열어 두었다.
삶에의 적용
몸을 만드는 이치가 이와 같다. 근육은 찢어지고 붙기를 거듭하며 자란다. 한 번의 실패는 끝이 아니라 다시 붙을 자극이다. 중요한 것은 무너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자리에서 얼마나 빨리 돌아서는가다. 하루에 열 번 무너지던 것을 다섯 번으로 줄이고, 돌아오는 속도를 조금씩 높여가는 것 — 그 반복 자체가 수행이다. 오늘 또 실패했더라도 다시 “해보자”고 마음을 돌이키는 그 순간, 허물은 이미 없다.
훈장님의 풀이 — 허곡 선생님의 주역 강의에서
"6 3은 빈복(頻復)이니 — 자주 빈, 자주자주 양심을 회복하니. 자주 회복한다는 건 속에 '자주 나빠'가 있다는 얘기야, 나쁜 마음이 없으면 어떻게 회복을 해. 그래서 자주 회복을 하니 자주 회복 못 한다는 말이 되는 거니, 항상 이중해석이다."
"여(厲)하나 위험하나, 위험해도 회복을 하니까 되지 — 무구(无咎) 허물이 없으리라, 노력을 하니까. (…) 복은 귀안고(貴安固)라, 한 번 돌아온 양심은 꽉 잡고 잊지 말아야 되는데 그게 안 된다."
"성인이 천선지도(遷善之道)하야 열어줘 — 인간을 착한 쪽으로 옮기는 방법을 열어줘서 이걸 알면 되지. 어찌됐든 죄악이든 싫든 좋든 자주 양심을 회복하면 결국은 성공하는 거다."
원문과 주석 — 경문·소상전과 정이천『이천역전』, 주자『주역본의』, 제가(諸家)
경문(經文)과 소상전(小象傳)
六三, 頻復, 厲无咎.
육삼은 자주 돌아오니, 위태로우나 허물은 없다.
象曰, 頻復之厲, 義无咎也.
상전에 이르길, “자주 돌아오니 위태롭다”는 것은 의리상 허물이 없는 것이다.
정이천『이천역전』 — 허물은 잃음에 있지 돌아옴에 있지 않다
三以陰躁處動之極, 復之頻數而不能固者也. 復貴安固, 頻復頻失, 不安於復也.
삼효는 음의 조급함으로 움직임(진괘)의 극치에 처했다. 회복함이 잦아 견고하지 못한 자이다. 회복은 편안하고 견고함을 귀히 여기는데, 자주 돌아오고 자주 잃으니 회복에 편안하지 못한 것이다.
復善而屢失, 危之道也. 聖人開遷善之道, 與其復而危其屢失, 故云厲无咎.
선으로 돌아왔다가 누차 잃으니 위태로운 도이다. 그러나 성인께서 선으로 옮겨가는 도를 열어주시어, 그 돌아옴은 허여하고 그 누차 잃음은 위태롭게 여기셨다. 그러므로 “위태로우나 허물은 없다”고 하셨다.
不可以頻失而戒其復也. 頻失則爲危, 屢復何咎? 過在失而不在復也.
자주 잃는다 하여 그 회복하려는 노력마저 경계해서는 안 된다. 자주 잃는 것은 위태로우나, 누차 돌아오는 것에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허물은 잃음에 있는 것이지 돌아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주자『주역본의』 — 위태로우나 탓할 수 없다
以陰居陽, 不中不正, 又處動極, 復而不固, 屢失屢復之象. 屢失故危, 復則无咎. 故其占又如此.
음으로서 양의 자리에 거하여 중정하지 못하고, 또 움직임의 극치에 처했으니, 회복하되 견고하지 못하여 “자주 잃고 자주 돌아오는 상”이다. 자주 잃으므로 위태로우나, 돌아오면 허물은 없다. 그러므로 그 점(占)이 또한 이와 같다.
제가(諸家)의 통찰
성재 양씨(양만리)
頻復非危, 頻過爲危. 復義故无咎. 聖人危其頻過, 故曰厲以警之; 開其頻復, 故曰无咎以勸之.
자주 돌아오는 것이 위태로운 것이 아니라, 자주 실수하는 것이 위태롭다. 돌아옴은 의로우므로 허물이 없다. 성인께서 그 자주 실수함을 위태로이 여겨 “려(厲)“라 하여 경계하셨고, 그 자주 돌아옴을 열어주어 “무구(无咎)“라 하여 권면하셨다.
운봉 호씨(호병문)
三上下進退之間, 故曰頻.
삼효는 위아래로 나아가고 물러나는 사이에 있으므로 “빈(頻, 자주)“이라 했다.
巽以柔爲主, 九三剛而不中, 失之以其比柔, 故頻巽. 復以剛爲主, 六三柔而不中, 失之以其比柔位剛, 故頻復. 然頻巽吝, 頻復雖厲无咎, 此又不同也.
손(巽)괘는 유(柔)를 주인으로 삼는데 구삼이 강하면서 중이 아니니, 잃음은 유와 친하기 때문이라 “빈손(頻巽)“이라 했다. 복(復)괘는 강(剛)을 주인으로 삼는데 육삼이 유하면서 중이 아니니, 잃음은 유와 친하되 자리는 강이기 때문이라 “빈복”이라 했다. 그러나 빈손은 부끄러운 것이고, 빈복은 비록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으니, 이것이 또한 다른 점이다.
임천 오씨(오징)
頻雖有厲, 復則能補過矣, 故於義爲无咎也.
자주 하는 것에 비록 위태로움이 있으나, 돌아오면 능히 허물을 기울 수 있다. 그러므로 의리상 허물이 없는 것이다.
태극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