風地觀 · 64괘 사전

육삼(六三) — 觀我生, 進退

六三, 觀我生, 進退.
나아가거나 실행하려는 의지삼효, 음유가 양위에 거함 (부적합)상효와 정응 관계진출/전진

나를 보고 결정한다

풍지관(風地觀)의 허리, 육삼에 이르면 시선이 밖에서 안으로 돌아선다. 관괘의 앞 효들이 ’어떻게 볼 것인가’를 물었다면, 육삼은 그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린다. 관아생(觀我生), 곧 내 삶을 본다는 것이다. 여기서 ’생(生)’은 목숨이 아니라 내가 낳아온 것, 내 동작과 행위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남을 부러워하거나 비판하는 대신, 거울 앞에 서서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해왔는가”를 묻는 자리다.

육삼은 음(陰)이 양(陽)의 자리에 앉아 바르지 못하고, 순함(順)의 극에 처해 있다. 위로 나아갈까, 아래로 물러날까. 정이천은 바로 이 자리이기 때문에 진퇴의 뜻이 생긴다고 보았다. 자리가 온전히 바르다면 망설일 것도 없이 나아갈 뿐이지만, 육삼은 그렇지 않기에 오히려 자기를 살피는 지혜가 요구된다. 나아갈 수 있고 물러날 수도 있는 것은 오직 육삼뿐이라고 옛 주석가들이 말한 까닭이다.

기준은 단 하나, 내가 만들어낸 결과다. 주자는 이를 통색(通塞), 곧 통하는가 막히는가로 읽었다. 임금을 섬긴다면 내 말이 들리고 내 계책이 따르는가를 보고, 백성을 다스린다면 내 정사와 가르침이 실제로 행해지는가를 본다. 효능이 있으면 나아가고, 막히면 물러난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스스로를 심사(自審)하는 태도다. 그렇게 때를 따라 진퇴하면 처신이 비록 바르지 못해도 도를 잃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으니(未失道), 후회도 허물도 없다.

삶에 들이는 자리

준비되었는지를 감정으로 판단하지 말라. 지난 몇 해 동안 내 몸과 손이 실제로 무엇을 이루었는지, 그 결과를 정직하게 마주하는 것이 관아생이다. 몸을 단련해온 사람은 이 이치를 몸으로 안다. 오늘 나설 자리인지 아껴둘 자리인지는 어제까지 쌓아온 힘이 말해준다. 늙은 짐승이 이빨과 발톱이 무뎌진 것을 먼저 알듯, 스스로의 상태를 정확히 아는 자만이 존엄하게 나아가고 존엄하게 물러난다. 공자가 벼슬을 권했을 때 “저는 아직 자신이 없습니다” 하며 학문에 더 정진한 칠조개(漆雕開)처럼, 주제를 아는 겸손이 곧 도를 잃지 않는 힘이다. 나아가도 당당하고 물러나도 후회 없는 사람, 그 저울추는 바깥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삶 안에 있다.

훈장님의 풀이 — 허곡 선생님의 주역 강의에서

"육삼은 관아생하야 진퇴(觀我生 進退)라 했으니 밑에 점이 없어 — 후회다 허물이다 인색이다 이게 있으면 점사가 되는데, 이건 마무리를 안 했어. 그래서 능순(能順), 그때그때 맞는 쪽으로 따라가라 — 순(順)자는 착하게 살아라가 아니고, 어느 쪽이든 맞는 쪽으로 따라가라."

원문과 주석 — 경문·정이천·주자·제가

효사와 소상전

六三, 觀我生, 進退.

육삼은 나의 생(행동과 결과)을 살펴서, 나아가고 물러난다.

象曰: 觀我生進退, 未失道也.

소상전에 이르길, ’나의 생을 살펴 진퇴한다’는 것은 도를 잃지 않은 것이다.

정이천『이천역전』

三居非其位, 處順之極, 能順時以進退者也. 若居當其位, 則无進退之義也.

육삼은 그 지위가 아닌 곳(양의 자리에 음)에 거하고 있으나, 순함(곤괘)의 극에 처하여 능히 때를 따라 나아가고 물러나는 자이다. 만약 마땅한 지위에 거했다면 진퇴의 뜻이 없었을 것이다.

觀我生, 我之所生, 謂動作施為出於己者. 觀其所生, 而隨宜進退, 所以處雖非正, 而未至失道也. 隨時進退, 求不失道, 故无悔咎, 以能順也.

’관아생’의 ’아생’이란 나의 낳은 바이니, 동작과 베풀어 행한 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이른다. 그 낳은 바를 관찰하여 마땅함을 따름으로써 진퇴를 결정하니, 처신이 비록 바르지 않으나 도를 잃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때를 따라 진퇴하여 도를 잃지 않기를 구하므로 후회나 허물이 없으니, 능히 순종하기 때문이다.

주자『주역본의』

我生, 我之所行也. 六三居下之上, 可進可退, 故不觀九五, 而獨觀己所行之通塞, 以為進退. 占者宜自審也. 一作吝.

’아생’은 나의 행한 바이다. 육삼은 하괘의 위에 거하여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구오를 보지 않고 홀로 자기 행한 바의 통함과 막힘을 관찰하여 그로써 진퇴를 삼는다. 점치는 자는 마땅히 스스로 살펴야 한다. (어떤 본에는 ‘인(吝)’ 자가 있다.)

朱子曰: 我者彼我對待之言, 是以彼觀此; 觀其生, 是以此自觀. 六三之觀我生進退者, 事君則觀其言聼計從, 治民則觀其政教可行膏澤可下, 可以見自家所施之當否而為進退.

주자가 말하기를: “’나(我)’라는 것은 저쪽과 이쪽을 상대하여 하는 말이니, 저쪽으로써 이쪽을 보는 것이다. ’그 생을 본다(구오 효사)’는 것은 이쪽으로써 스스로를 보는 것이다. 육삼의 ’관아생 진퇴’라는 것은, 임금을 섬길 때는 나의 말이 들리고 계책이 따르는가를 보고, 백성을 다스릴 때는 나의 정사와 가르침이 행해지고 은택이 내려가는가를 보아서, 내 자신이 베푼 것의 당부(當否)를 보고서 진퇴를 삼는 것이다.”

제가(諸家)

동계 왕씨(童溪王氏, 왕신자)

童溪王氏曰: 我生者, 吾身之動作施為也. 六三處進退之間, 宜誰從? 曰: 進退者, 時也; 可以進可以退者, 我也. 觀我生, 以决其進退爾.

동계 왕씨가 말하기를: “’아생’은 내 몸의 동작과 시위이다. 육삼은 나아감과 물러남의 사이에 처했으니 마땅히 누구를 따라야 하는가? 말하자면, 진퇴는 때이고, 나아갈 수 있고 물러날 수 있는 것은 나이다. 나의 생을 관찰하여 그 진퇴를 결단할 따름이다.”

양씨(楊氏, 양만리)

楊氏曰: 觀我生而進退, 所謂可以仕則仕, 可以止則止. 我无官守, 我无言責, 則進退之間, 豈不綽綽乎有餘裕哉者是也.

양씨가 말하기를: “’나의 생을 보고 진퇴한다’는 것은 이른바 ’벼슬할 만하면 벼슬하고, 그칠 만하면 그친다’는 것이다. 나는 지킬 관직이 없고 말할 책임이 없으니, 진퇴의 사이에 어찌 너그럽고 여유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성재 양씨(誠齋楊氏, 양만리)

誠齋楊氏曰: 三五皆曰觀我生, 辭同而德異. 六三察己以從人, 九五察人以修己. 六三似漆雕開.

성재 양씨가 말하기를: “3효와 5효가 모두 ’관아생’이라 했으나, 말은 같아도 덕은 다르다. 육삼은 자기를 살피어 남을 따르는 것이고, 구오는 남(백성)을 살피어 자기를 닦는 것이다. 육삼은 마치 칠조개(漆雕開)와 같다.” (칠조개: 공자가 벼슬을 권했을 때 사양하고 학문에 정진한 제자)

운봉 호씨(雲峰胡氏, 호병문)·중계 장씨(中溪張氏)

雲峰胡氏曰: 三處上下之間, 有進退之象. … 中溪張氏曰: 五為觀之主, 近五者宜進, 遠五者宜退. 若初二去五遠, 則无可進之理; 四去五近, 則用賓于王矣. 可進可退, 唯三之特為然. 道, 觀之道也. 觀四陰爻, 惟四得觀之道, 初二則失觀之道, 三之進退在我, 故曰未失道也.

운봉 호씨가 말하기를: “3효는 상하의 사이에 처하여 진퇴의 상이 있다. …” 중계 장씨가 말하기를: “5효는 관(觀)의 주인이다. 5효와 가까운 자는 마땅히 나아가고, 먼 자는 마땅히 물러나야 한다. 초효와 2효는 5효와 머니 나아갈 이치가 없고, 4효는 5효와 가까우니 왕에게 손님으로 대접받는다.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있는 것은 오직 3효가 유독 그러하다. 도(道)는 ’관의 도’이다. 네 음효를 보건대 오직 4효만이 관의 도를 얻었고 초효와 2효는 잃었다. 3효의 진퇴는 나에게 달려 있으므로 ’도를 잃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이 효가 動하면風山漸(53번 괘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