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구오는 비괘 전체의 주인이다. 다섯 음효가 저마다 위와 가까이하려는 이 괘에서, 오직 이 한 양효만이 강건하고 중정한 덕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 그 친함이 어둡거나 은밀하지 않고 환하게 드러나므로 ‘현비(顯比)’, 밝게 드러난 친함이라 한다. 눈여겨볼 것은 이 자리의 사람이 사람을 억지로 그러모으지 않는다는 점이다. 왕이 사냥할 때 세 면만 막고 한 면은 열어둔다(왕용삼구). 그 열린 문으로 달아나는 짐승은 그냥 놓아준다(실전금). 살길을 열어두고, 제 발로 들어오는 것만 거둔다. 다 잡으려 움켜쥐는 손이 아니라, 문을 하나 열어두는 여유가 사람을 모은다.
소상전은 이것을 ‘사역취순(舍逆取順)’, 거스르는 것은 버리고 순한 것은 취한다는 한마디로 눌러놓았다. 사냥의 법칙과 사람을 얻는 법칙은 정반대다. 나를 등지고 떠나는 사람은 붙잡지 않고 놓아주며(사역), 나를 믿고 찾아오는 사람만 받아들인다(취순). 떠나는 이를 쫓지 않는 것은 손해가 아니라 여유다. ’앞의 짐승을 잃는다’는 말은 무능이 아니라 그릇의 크기를 가리킨다. 정이천은 이를 두고 “오는 자는 어루만지고 가는 자는 쫓지 않는다”고 했다. 붙잡을수록 멀어지고, 놓아둘수록 돌아온다.
더 깊은 곳에 ’읍인불계(邑人不誡)’가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 굳이 단속하거나 미리 입을 맞추지 않아도, 윗사람의 마음이 공정하다는 것을 알기에 저절로 따른다. 정이천은 이를 ‘대공무사(大公无私)’—지극히 공변되어 멀고 가까움, 친하고 소원함의 구별이 없는 경지라 했다. 주자는 “시장에 가는 사람이 멈추지 않고 밭 가는 사람이 흔들리지 않는” 평화로운 상태에 견주었다. 내 사람부터 먼저 챙기려는 사심이 없고, 억지로 통제하려는 손이 없을 때, 굳이 명령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편안히 제자리를 지킨다. 반대로 덕이 모자란 사람이 명예를 억지로 구하려 들면(干譽) 오히려 추해지고, 있던 사람마저 떠난다.
삶에의 적용
오늘 누군가를 내 편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들거든, 먼저 붙잡으려는 손부터 풀어라. 관계도 일도 사람도, 쥐려 할수록 빠져나간다. 세 면만 막고 한 면을 열어두는 마음—오는 것은 반기고 가는 것은 보내주되, 내 중심만은 흔들리지 않게 지키는 것이다. 몸으로 익히면 더 분명해진다. 상대가 밀고 들어오면 그 힘을 받아 안으로 거두고, 빠져 달아나면 굳이 쫓아가 무너지지 않는다. 쫓는 순간 내 중심이 먼저 무너지기 때문이다. 척추를 곧게 세워 축을 지키고, 어깨의 힘을 풀어 문을 열어둔 채, 다가오는 것만 고요히 맞이하는 몸. 그 몸이 곧 억지로 모으지 않아도 사람이 모여드는 마음이다. 오늘 하루, 떠나는 것 하나를 붙잡지 않고 놓아주는 연습을 해보라.
통찰
가장 강한 포용은 담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문을 하나 열어두는 것이다. 다 가지려는 손은 결국 아무것도 쥐지 못하고, 한 면을 비워둔 사람에게 천하가 제 발로 걸어 들어온다.
원문과 주석 — 경문·소상전과 정이천·주자·제가(진재 서씨·운봉 호씨·건안 구씨)
경문과 소상전
九五:顯比。王用三驅,失前禽。邑人不誡,吉。 象曰:顯比之吉,位正中也。舍逆取順,失前禽也。邑人不誡,上使中也。
구오는 드러나게 친비함이니, 왕이 사냥함에 세 쪽에서 몰고, 앞으로 도망가는 짐승은 놓아준다(잃는다). 읍 사람이 경계하지 않으니 길하다. 상전에 말하였다. ’현비’가 길함은 지위가 바르고 가운데 하기 때문이다. ’거스르는 것을 버리고 순한 것을 취함’이 바로 ’앞의 짐승을 잃는 것’이다. ’읍 사람이 경계하지 않음’은 윗사람이 중(中)을 쓰기 때문이다.
정이천『이천역전』
五居君位,處中得正,盡比道之善者也。人君比天下之道,當顯明其比道而已。如誠意以待物,恕己以及人,發政施仁,使天下蒙其惠澤,是人君親比天下之道也。如是,天下孰不親比於上?若乃暴其小仁,違道干譽,欲以求下之比,其道亦狹矣,其能得天下之比乎? 故聖人以九五盡比道之正,取三驅為喻。曰:「王用三驅,失前禽,邑人不誡,吉。」先王以四時之畋,不可廢也。故推其仁心為三驅之禮,乃禮所謂「天子不合圍」也。成湯祝網,是其義也。天子之畋,圍合其三面,前開一路,使之可去。不忍盡物,好生之仁也。只取其不用命者,不出而反入者也。禽獸前去者皆免矣,故曰失前禽也。 王者顯用其比道,天下自然來比。來者撫之,固不煦煦然求比於物。若田之三驅,禽之去者從而不追,來者則取之也。此王道之大,所以其民皞皞而莫知為之者也。 邑人不誡吉,言其至公不私,无遠邇親疎之别也。邑者,居邑;誡,期約也。待物之仁,不期誡於居邑。如是則吉也。聖人以大公无私治天下,於顯比見之矣。非唯人君比天下之道如此,大率人之相比莫不然。以臣於君言之,竭其忠誠,致其才力,乃顯其比君之道也。用之與否在君而已,不可阿諛逢迎,求其比己也。在朋友亦然,修身誠意以待之,親己與否在人而已,不可巧言令色、曲求茍合,以求人之比己也。於鄉黨親戚、於衆人,莫不皆然。
오효는 군위에 거하고 중(中)에 처하며 바름(正)을 얻었으니, 친비하는 도의 선함을 다한 자다. 인군이 천하를 친비하는 도는 마땅히 그 친비하는 도를 드러내어 밝힐 뿐이다. 성의로써 사물을 대하고 자기를 미루어 남에게 미치며, 정사를 펴고 인(仁)을 베풀어 천하로 하여금 그 혜택을 입게 하는 것, 이것이 인군이 천하를 친비하는 도다. 이와 같다면 천하에 누가 윗사람과 친비하지 않겠는가. 만약 그 작은 어짊을 드러내어 도를 어기고 명예를 구하며(干譽) 이로써 아랫사람의 친비를 구하려 한다면, 그 도가 좁으니 능히 천하의 친비를 얻겠는가.
그러므로 성인이 구오가 비(比)의 바른 도를 다하였으므로 ’삼구(三驅)’를 취하여 비유하였다. ‘왕이 세 쪽으로 몰아 앞의 짐승을 잃으나 읍인이 경계하지 않으니 길하다’ 하였다. 선왕이 사시(四時)의 사냥을 폐할 수 없으므로, 그 어진 마음을 미루어 ’삼구의 예’를 만들었으니, 곧 『예기』에 이른바 ’천자는 포위를 합하지 않는다(天子不合圍)’는 것이다. 성탕(成湯)이 그물을 축원한 것이 그 뜻이다. 천자의 사냥은 3면만 포위를 합치고 앞쪽 한 길을 열어두어 짐승이 떠나갈 수 있게 한다. 차마 씨를 말리지 못하는 호생(好生)의 인(仁)이다. 단지 살라고 열어준 명을 쓰지 않는 자, 곧 나가지 않고 도리어 들어오는 자만 취한다. 앞으로 가는 짐승은 다 면하니, 그러므로 ’실전금(失前禽)’이라 하였다.
왕자가 그 비의 도를 드러내어 쓰면 천하가 자연히 와서 친비한다. 오는 자는 어루만지되, 구구하게 남에게 친비를 구하지 않는다. 사냥의 삼구와 같아서, 가는 짐승은 쫓지 않고 오는 자만 취한다. 이것이 왕도(王道)의 큼이니, 그 백성이 하하(皞皞)하여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읍인불계길’은 지극히 공변되어 사사로움이 없어, 멀고 가까움과 친하고 소원함의 구별이 없음을 말한다. ’읍(邑)’은 거주하는 고을이요, ’계(誡)’는 기약하고 약속함이다. 사물을 대하는 인(仁)을 거주하는 읍 사람에게조차 기약하거나 단속하지 않으니, 이와 같으면 길하다. 성인이 대공무사로 천하를 다스림을 ’현비’에서 볼 수 있다. 비단 인군만이 아니라 사람이 서로 친비함이 다 그러하다. 신하는 충성과 재력을 다하여 임금과 친비하는 도를 드러낼 뿐, 쓰고 안 쓰고는 임금에게 달렸으니 아첨하고 영합하여 자기를 친비해주기를 구해서는 안 된다. 붕우도 그러하여 몸을 닦고 뜻을 성실히 하여 대할 뿐, 교언영색하고 굽혀 구차히 합하여 남이 나를 친비하기를 구해서는 안 된다. 향당·친척·뭇사람에게도 다 그러하다.
소상전에 대하여 말하였다.
顯比所以吉者,以其所居之位得正中也。處正中之地,乃由正中之道也。比以不偏為善,故云正中。凡言正中者,其處正得中也,比與隨是也;言中正者,得中與正也,訟與需是也。 舍逆取順,失前禽也。禮取不用命者,乃是舍順取逆也。順命而去者皆免矣。比以向背而言,謂去者為逆,來者為順也。故所失者前去之禽也。言來者撫之,去者不追也。 邑人不誡,上使中也。不期誡於親近,上之使下中平不偏,遠近如一也。
’현비’가 길한 까닭은 그 거하는 지위가 정중(正中)을 얻었기 때문이다. 정중한 자리에 처하면 곧 정중한 도를 행한다. 비(比)는 치우치지 않음을 선으로 삼으므로 ’정중’이라 하였다. 무릇 ’정중(正中)’이라 한 것은 바른 곳에 처하여 중을 얻은 것이니 비괘와 수괘(隨)가 그것이요, ’중정(中正)’이라 한 것은 중을 얻고 바른 것이니 송괘와 수괘(需)가 그것이다. ‘사역취순 실전금’. 예법에서는 명을 쓰지 않는 자를 취하니, 이는 순한 것을 놓아주고 거스르는 것을 취하는 것이다(사냥의 예). 명을 순히 하여 떠나는 자는 다 면한다. 그러나 비(比)는 향하고 등지는 것으로 말하였으니, 떠나가는 자를 ‘역(逆)’, 오는 자를 ’순(順)’이라 한다. 그러므로 잃는 바는 앞으로 가는 짐승이다. 오는 자는 어루만지고 가는 자는 쫓지 않음을 말한다. ‘읍인불계 상사중’. 친근한 사이에 단속을 기약하지 않음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림이 중평(中平)하고 치우치지 않아 멀고 가까움이 한결같기 때문이다.
주자『주역본의』
一陽居尊,剛健中正,卦之羣隂皆來比己。顯其比而无私,如天子不合圍,開一面之網,來者不拒,去者不追。故為用三驅失前禽,而邑人不誡之象。葢雖私屬,亦喻上意,不相警備以求必得也。凡此皆吉之道,占者如是則吉也。
한 양(一陽)이 존위에 거하고 강건중정하니, 괘의 뭇 음이 다 와서 자기와 친비한다. 그 친비함을 드러내되 사사로움이 없어, 마치 천자가 포위를 합치지 않고 그물 한 쪽을 열어 오는 자는 막지 않고 가는 자는 쫓지 않음과 같다. 그러므로 ‘삼구를 써서 전금을 잃으나 읍인이 경계하지 않는’ 상이 된다. 대개 비록 사사로운 측근이라도 윗사람의 뜻을 깨달아, 서로 경비하여 반드시 잡으려 하지 않는다. 무릇 이것이 다 길한 도이니, 점치는 자가 이와 같으면 길하다.
소상전에 대하여 말하였다.
由上之徳使不偏也。
윗사람의 덕으로 말미암아 부림(使)이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주자의 문답과 어록.
或問:伊川觧顯比王用三驅失前禽,所謂來者撫之、去者不追,與失前禽而殺不去者,所譬頗不相類,如何? 朱子曰:田獵之禮,置旃以為門,刈草以為長圍。田獵者自門驅而入,禽獸向我而出者皆免,惟被驅而入者皆獲。故以前禽比去者不追,獲者譬來則取之。大意如此,无緣得一一相似。 朱子曰:但邑人不誡吉一句,似可疑。恐易之文義不如此耳。 朱子曰:邑人不誡,葢上之人顯明其比道,而不必人之從己,而其私屬亦化之,不相戒約而自然從己也。邑人不誡,如有聞无聲,言其自不消相告誡。又如歸市者不止,耕者不變相似。
(문) 이천이 ’현비 왕용삼구 실전금’을 풀며 ’오는 자는 어루만지고 가는 자는 쫓지 않는다’고 한 것과, 사냥에서 ’앞의 짐승을 잃고 가지 않는 자를 잡는다’는 것이 비유가 자못 서로 비슷하지 않은 듯한데 어떠합니까. (답) 주자가 말하였다. 사냥의 예법은 깃발을 세워 문을 만들고 풀을 베어 긴 포위망을 만든다. 사냥꾼이 문으로부터 몰아 들어가면, 나를 향해 나가는 짐승은 다 면하고 오직 몰려 들어오는 자만 잡힌다. 그러므로 ’전금(前禽)’으로 ’가는 자를 쫓지 않음’에 비유하고, 잡히는 것으로 ’오면 취함’에 비유하였다. 대의가 이러하니 낱낱이 딱 맞기는 어렵다.
주자가 말하였다. 다만 ‘읍인불계길’ 한 구절은 의심할 만하니, 아마 역의 문장 뜻이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주자가 말하였다. ’읍인불계’는, 윗사람이 그 친비하는 도를 밝게 드러내어 굳이 남이 자기를 따르기를 기필하지 않는데도, 그 가까운 측근조차 교화되어 서로 경계하고 약속하지 않아도 자연히 따르는 것이다. ‘들림은 있으나 소리가 없는’ 것과 같으니, 스스로 서로 고하고 단속할 필요가 없음을 말한다. 또 ‘시장에 가는 자가 멈추지 않고 밭 가는 자가 변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제가(諸家) — 진재 서씨
출전: 『주역전의대전』수지비 구오.
進齋徐氏曰:王者田獵,合三面之網,而開其一面以驅逐禽獸,至再至三,使之可去。其順而來者則取之,以喻下四隂之順乎五也;其逆而去者則舎之,以喻上一隂之背乎五也。前禽,指上六也。一卦五隂,而四隂從陽。上獨背之,是失前禽也。
왕자가 사냥할 때 3면의 그물을 합치고 그 1면을 열어 금수를 몰아낸다. 두세 번 하여 떠나갈 수 있게 한다. 순하여 오는 자는 취하니 아래 네 음이 오효에게 순종함을 비유하고, 거슬러 떠나는 자는 놓아주니 위의 한 음(상육)이 오효를 등짐을 비유한다. ’전금(前禽)’은 상육을 가리킨다. 한 괘에 다섯 음이 있는데 네 음은 양을 따르나 상육만 홀로 등지니, 이것이 ’전금을 잃음’이다.
제가(諸家) — 운봉 호씨 (읍인불계)
출전: 『주역전의대전』수지비 구오.
雲峰胡氏曰:然使邑人不喻上意,或有惟恐失之之心,則禽无遺類,其仁不廣矣,未可以吉言也。
그러나 가령 읍 사람이 윗사람의 뜻(놓아주려는 뜻)을 깨닫지 못하고 혹 ’놓칠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둔다면, 짐승은 남는 종류가 없을 것이니 그 인(仁)이 넓지 못하여 길하다 말할 수 없다.
제가(諸家) — 건안 구씨
출전: 『주역전의대전』수지비 구오 소상전.
建安丘氏曰:舎逆,謂舎上一隂,而隂以乘陽為逆也;取順,謂取下四隂,而隂以承陽為順也。失上一隂,故曰失前禽。
거스르는 것을 버린다 함은 위의 한 음(상육)을 버림을 이르니, 음이 위에서 양을 타므로(乘陽) ’역(逆)’이 된다. 순한 것을 취한다 함은 아래 네 음을 취함이니, 음이 아래에서 양을 받드므로(承陽) ’순(順)’이 된다. 위의 한 음을 잃으므로 ’실전금’이라 한다.
제가(諸家) — 운봉 호씨 (사괘와 비괘의 ‘사使’ 비교)
출전: 『주역전의대전』수지비 구오 소상전.
雲峰胡氏曰:使字與師六五同。師之使不當,誰使之?五也。比之使中,誰使之?亦五也。
‘사(使)’ 자는 지수사(師) 육오와 같다. 사괘의 ’부림이 마땅치 않다(使不當)’는 누가 부린 것인가. 오효다. 비괘의 ’부림이 중도에 맞다(使中)’는 누가 부린 것인가. 역시 오효다.
태극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