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는 음효가 음의 자리에 있어 유약하고, 위아래가 모두 음(육삼·육오)으로 둘러싸여 있다. 몽매함을 깨우쳐 줄 밝은 양(구이·상구)과는 멀리 떨어져 있고 바르게 응하는 이도 없다. 구이를 따르려 하면 아래로 육삼이 가로막고, 상구를 따르려 하면 위로 육오가 가로막는다. 사방이 어둠이고, 알맹이 있는 이는 저 멀리 있다. 이것을 ‘곤몽(困蒙)’, 곧 몽매함에 갇혀 곤한 상태라 한다. 소상전은 그 부끄러움의 까닭을 한마디로 짚는다. “홀로 실(實)과 멀어졌기 때문이다(독원실, 獨遠實).” 여기서 실이란 속이 꽉 찬 양강, 곧 나를 밝혀 줄 스승이자 실질이다.
주목할 것은 이 효가 ’흉(凶)’이 아니라 ‘인(吝)’, 곧 부끄러움이라는 점이다. 모르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다. 정이천은 “강명한 원조가 없어 그 몽매함을 펴낼 길이 없다”고 했고, 주자는 “능히 강명한 덕을 구하여 친근히 한다면 면할 수 있다”고 여지를 남겼다. 부끄러움은 모른다는 사실이 아니라, 모르면서도 스승을 찾지 않고 비슷한 사람끼리만 모여 안주하는 태도에 있다. 절재 채씨는 이 곤(困)을 논어의 ’곤하여도 배우지 않는다(곤이불학, 困而不學)’는 그 곤으로 읽었다. 속이 텅 빈 껍데기들끼리 아무리 모여 있어도 몽매함만 더해질 뿐이다.
그러나 곤몽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다. 중계 장씨의 말이 이 효의 출구를 연다. “천하의 몽매함은 다 가르칠 수 있다. 스승을 높이고 벗을 친히 한다면(융사친우), 곤하여서 아는 자(곤이지지)도 나면서 아는 자·배워서 아는 자와 한가지가 된다.” 늦게 깨쳤다는 사실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멀리 있는 실질을 찾아가는 한 걸음이면, 갇힘은 곧 풀린다. 끝내 그 자리에 머무를 때에만 ’인’이 된다.
오늘 벽에 부딪혔다면, 먼저 내가 지금 누구와 둘러앉아 있는지를 돌아보라. 편하고 익숙한 사람들끼리만 어울리는 자리는 마음을 편하게 하지만 사람을 자라게 하지는 못한다. 불편하더라도 나보다 밝고 실한 사람을 찾아가 그 앞에 나를 세우는 일, 그것이 곤몽을 깨는 유일한 길이다. 몸을 닦는 자리에서도 그러하다. 스승의 교정 없이 혼자 흉내만 내다 보면 잘못된 자세가 굳어져 버린다. 겉모양은 그럴듯해도 속이 채워지지 않은 헛됨을 경계하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바로잡아 줄 눈 앞에 나를 내어놓는 것. 자기 부족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그 낮춤이야말로, 텅 빈 껍데기를 알맹이로 바꾸는 시작이다.
원문과 주석 — 경문·소상전과 역대 풀이
경문과 소상전
六四:困蒙,吝。 象曰:困蒙之吝,獨遠實也。
육사는 몽매함에 곤하니(곤몽), 부끄럽다(인색하다, 인). 소상전에 말하였다. ’곤몽의 부끄러움’은 홀로 실(實, 양·현명함)과 멀어졌기 때문이다(독원실).
정이천 『이천역전』
四以隂柔而䝉闇,无剛明之親援,无由發其䝉,困於昏䝉者也。其可吝甚矣。吝,不足也,謂可少也。
4효는 음유(陰柔)로서 몽매하고 어두운데, 강명(剛明)한 친한 원조가 없어 그 몽매함을 펴낼 말미암음이 없으니, 혼몽함에 곤한 자이다. 그 가히 부끄러움(인색함)이 심하다. ’인(吝)’은 부족함이니, 적다고 할 만함(비판받을 만함)을 이른다.
주자 『주역본의』
既逺於陽,又无正應,為困於䝉之象。占者如是,可羞吝也。能求剛明之徳而親近之,則可免矣。
이미 양(구이·상구)과 멀리 있고 또 정응도 없으므로, 몽매함에 곤한 상이 된다. 점치는 자가 이와 같으면 가히 부끄러운 것이다. 능히 강명한 덕을 구하여 친근히 한다면 면할 수 있을 것이다.
象曰:實,謂陽剛也。(實,叶韻去聲。遠,于萬反。)
(소상전 해설) ’실(實)’은 양강(陽剛)을 이른다. (주: 실은 운을 맞추어 거성으로 읽고, 원은 우만 반절로 읽는다.)
제가 — 절재 채씨(節齋蔡氏)
困,讀如「困而不學」之困。
곤(困)은 (논어의) ’곤하여도 배우지 않는다(곤이불학)’고 할 때의 곤과 같이 읽는다.
제가 — 용산 이씨(隆山李氏)
六四以隂居隂,而上下又皆隂,䝉暗之甚者也。欲從九二,則下隔六三;欲從上九,則上隔六五。獨逺於陽,无以發䝉而乆困。
육사는 음으로서 음자리에 거하고 위아래가 또 다 음이니, 몽암함이 심한 자이다. 구이를 따르려 하면 아래로 육삼이 막고 있고, 상구를 따르려 하면 위로 육오가 막고 있어, 홀로 양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 몽매함을 피어낼 수 없어 오래도록 곤하다.
제가 — 중계 장씨(中溪張氏)
天下之䝉皆可教也,茍能隆師親友,則困而知者,與生知學知一也。若終於困,則吝矣。
천하의 몽매함은 다 가르칠 수 있다. 만약 몽매하더라도 능히 스승을 높이고 벗을 친히 한다면(융사친우), 곤하여서 아는 자(곤이지지)도 나면서 아는 자(생지)나 배워서 아는 자(학지)와 더불어 한가지가 된다. 허나 끝까지 곤함에 그친다면 부끄러운 것이다.
제가 — 산 양씨(山楊氏)
隂資陽以為明者。六四之困,逺於陽故也。陽實隂虛,實謂陽也。
음은 양을 바탕으로 하여 밝아지는 것인데, 육사의 곤함은 양과 멀기 때문이다. 양은 꽉 차고(양실) 음은 비어 있으니(음허), ’실(實)’은 양을 이른다.
제가 — 평암 항씨(平菴項氏)
初三近九二,五近上九,三五皆與陽應。惟六四所比所應皆隂,故曰獨逺實也。
초육과 육삼은 구이와 가깝고, 육오는 상구와 가깝다. 3효와 5효는 모두 양과 호응한다. 오직 육사만이 친한 바와 응하는 바가 모두 음이다. 그러므로 ’홀로 실과 멀다(독원실)’고 한 것이다.
제가 — 사수 정씨(沙随程氏)
小象叶聲韻,故太測亦有韻。孔氏正義於離爻亦嘗論之。
소상(小象)은 성운(聲韻, 압운)을 맞추었으므로 태측(太測) 또한 운이 있다. 공씨(공영달)의 정의에서도 리괘 효사에서 일찍이 이를 논하였다.
제가 — 파양 동씨(鄱陽董氏)
今易自坤以後六十三卦,小象散入爻辭之下,遂不可以韻讀之。本義一用古易,故多論叶韻,而尤詳備於小過、既濟二卦,則通一部易皆可類推矣。
지금의 역은 곤괘 이후 63괘의 소상이 효사 아래에 흩어져 들어가서, 마침내 운(韻)으로써 읽을 수 없게 되었다. 본의(주희)는 한결같이 고역(古易, 효사와 상전이 분리된 판본)을 썼으므로 압운을 많이 논하였는데, 특히 소과와 기제 두 괘에서 상세히 갖추었으니, 역 전체를 통하여 다 유추할 수 있다.
태극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