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육삼은 하괘 태(兌)의 맨 위, 곧 기쁨의 극에 처한 자리다. 음효가 양의 자리에 있어 가운데도 아니고 바르지도 않다(부중부정). 자기 중심이 서지 않은 채 유약한 성질로 기뻐하기만 좋아하니, 밖에서 오는 자극에 따라 감정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북을 치듯 떨쳐 일어났다가 이내 멈추고, 슬피 울다가 다시 노래하니, 활동과 그침, 근심과 즐거움에 일정함이 없다.
효사의 “적수를 얻는다(得敵)“에서 적(敵)은 원수가 아니라 서로 맞서는 짝, 곧 정응인 상구를 가리킨다. 그러나 육삼은 부중부정하고 상구 또한 불중이라, 기댈 만한 짝이 못 된다. 정이천은 육삼이 “부중하고 바름을 잃어 적을 얻어 뜻을 얽맨다”고 했다. 짝을 얻고도 그 짝에 매여 도리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주자는 더 나아가 “스스로 주인이 될 수 없다(不能自主)“고 짚었다. 병통의 뿌리는 바깥이 아니라, 안에 중심이 없다는 데 있다.
유씨(劉氏)의 진단이 가장 간결하다. “사람이 오직 믿음이 부족하므로, 말과 행동 사이의 변동이 이처럼 항상됨이 없다.” 임천 오씨(臨川吳氏)는 상전의 “자리가 합당하지 않다”를 풀어, 양의 자리에 유(柔)가 거하면 속이 실(實)하지 못하니 “어찌 능히 사람의 신뢰를 얻겠는가”라 물었다. 중부(中孚)는 속이 비어 미더운 괘이지만, 그 비움은 실(實)함을 담은 비움이라야 한다. 육삼의 비움은 실함 없는 비움, 곧 주견 없는 흔들림일 뿐이다.
삶에의 적용
하루에도 기분이 몇 번씩 바뀌고, 타인의 반응 하나에 나의 상태가 통째로 결정될 때가 있다. 육삼은 바로 그 자리다. 이때 다스릴 것은 바깥의 자극이 아니라 안의 중심이다. 감정이 출렁일 때일수록 “나의 중(中)은 어디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몸으로 하면 답이 빠르다. 느리고 깊은 호흡 몇 번이면 들뜬 신경이 가라앉고, 바른 자세로 중심을 잡으면 마음도 따라 자리를 찾는다. 안의 믿음(信)을 먼저 세워야 밖이 안정된다 — 흔들림을 멈추는 힘은 늘 나로부터 시작한다.
훈장님의 풀이
훈장님의 풀이 — 허곡 선생님의 주역 강의에서
六三은 음이 양자리라 자리가 마땅치 않고(位不當·不中不正), 兌(說)의 끝에 있다. 上九와 정응이라 짝(敵)을 얻으나 — '敵'은 대적·필적이니, 상응은 분명하되 둘 다 자리가 어긋나 험하다.
六三이 제 양 행세를 하여(음이 양으로 행동) 갈피를 못 잡으니 — 북치다(鼓·좋아 전진) 그치다(罷·깨져 그침) 울다(泣) 노래한다(歌). 활동·그침·슬픔·즐거움 네 감정이 모두 제가 믿는 바(所信)에 매여 있다 — 자기 기분에 자기가 붙들려 타협이 없다.
무릇 음효가 양자리에 거한 자는 다 '혹(或)' 자로 말했으니, 위치가 마땅치 않아 믿지 못해 흔들림이다 — 제 자리가 바르면 믿는 바가 정해지나, 자리가 부당하면 주관할 바가 없어 제 소신에만 따라간다(唯所信是從). 길흉은 여기서 알 수 없으나, 밝고 통달한 군자의 행위는 아니다(非明達君子之所爲).
원문과 주석 — 경문·정이천·주자·제가
경문
六三, 得敵, 或鼓或罷, 或泣或歌.
육삼은, 적수를 얻어, 혹 북을 치고 혹 멈추며, 혹 울고 혹 노래한다.
소상전(小象傳)
象曰: 或鼓或罷, 位不當也.
상(象)에 말하기를, 혹 북 치고 혹 멈추는 것은, 자리가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이천 『이천역전』
傳: 敵, 對敵也, 謂所交孚者. 正應上九是也. 三四皆以虚中為成孚之主, 然所處則異. 四得位居正, 故亡匹以從上. 三不中失正, 故得敵以累志.
적(敵)은 서로 대적하는 것이니, 서로 교부(交孚)하는 자를 이른다. 정응인 상구가 이것이다. 삼효와 사효는 모두 허중(虛中)으로써 부(孚)를 이루는 주인이나, 처하는 바가 다르다. 사효는 자리를 얻어 바르게 거하므로 짝을 없애고 위를 따른다. 삼효는 부중하고 바름을 잃어 적을 얻어 뜻을 얽맨다.
以柔說之質既有所係, 唯所信是從. 或鼔張, 或罷廢, 或悲泣, 或歌樂, 動息憂樂皆係乎所信也. 唯係所信, 故未知吉凶. 然非明達君子之所為也.
유약하고 기뻐하는 성질로 이미 매인 바가 있어, 오직 믿는 바에만 따른다. 혹 북을 쳐 떨쳐 일으키고, 혹 그만두어 폐하고, 혹 슬퍼 울고, 혹 노래하여 즐거워하니, 움직임과 멈춤, 근심과 즐거움이 모두 믿는 바에 매인 것이다. 오직 믿는 바에 매여 있으므로 길흉을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명달한 군자가 할 바는 아니다.
주자 『주역본의』
本義: 敵, 謂上九. 信之窮者. 六三隂柔不中正, 以居説極, 而與之為應. 故不能自主, 而其象如此.
적(敵)은 상구를 이르니, 믿음이 궁한 자이다. 육삼은 음유로 부중부정하고, 기뻐함(說)의 극에 거하여 이와 응이 된다. 그러므로 스스로 주인이 될 수 없어 그 상이 이와 같다.
或問: 中孚六三大義是如何? 朱子曰: 某所以説中孚小過皆不可曉. 便是如此, 依文解字看來只是不中不正, 所以歌泣喜樂都无常也.
어떤 이가 물었다. “중부 육삼의 대의는 어떻습니까?” 주자가 답하기를, “내가 중부와 소과를 모두 알 수 없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저 문자에 의거하여 풀이하면, 부중부정이므로 노래와 울음, 기쁨과 즐거움이 모두 항상됨이 없는 것이다.”
제가(諸家)
중계 장씨(中溪張氏)
中溪張氏曰: 六三雖得上九之應為匹敵, 然三居兑説之極, 中心莫知所主, 故或鼔而前, 或罷而止, 或泣而悲, 或歌而樂. 或之者疑之也.
육삼이 비록 상구의 응을 얻어 필적이 되나, 삼효는 태의 기뻐함의 극에 거하여 중심에 주(主)로 삼을 바를 모른다. 그러므로 혹 북 쳐 앞으로 나아가고, 혹 멈추어 그치고, 혹 울어 슬퍼하고, 혹 노래하여 즐거워한다. ’혹(或)’이라 함은 의심하는 것이다.
유씨(劉氏)
劉氏曰: 人唯信不足, 故言行之間變動不常如此.
사람이 오직 믿음이 부족하므로, 말과 행동 사이에 변동이 항상됨 없음이 이와 같다.
운봉 호씨(雲峰胡氏)
雲峯胡氏曰: 三與上居上下卦之極, 體均力敵者也. 中孚六爻唯取柔而正, 剛而中者. 九二九五剛而中者也. 上九不中矣. 六四柔而正者也. 六三不正矣. 以柔而不正者應剛而不中者, 此為説之極, 彼當信之窮. 所以不能自主, 或鼔或罷, 作止之无常. 或泣或歌, 哀樂之无常. 凡爻以柔居陽者多以或言.
삼효와 상효는 상하 괘의 극에 거하니, 체가 균등하고 힘이 대적하는 자이다. 중부 여섯 효에서 오직 ’유이면서 바른 것’과 ’강이면서 중인 것’을 취한다. 구이·구오는 강이면서 중인 자요, 상구는 불중이며, 육사는 유이면서 바른 자요, 육삼은 부정이다. 유이면서 바르지 않은 자가 강이면서 중이 아닌 자에게 응하니, 이쪽은 기뻐함의 극이요 저쪽은 믿음의 궁함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주인이 될 수 없어, 혹 북 치고 혹 멈추니 작지(作止)가 무상이요, 혹 울고 혹 노래하니 애락(哀樂)이 무상이다. 무릇 효에서 유로 양 자리에 거한 것은 대부분 ’혹(或)’으로 말한다.
임천 오씨(臨川吳氏)
臨川吴氏曰: 位不當者, 陽位而柔居之, 柔則不實, 豈能得人之孚哉?
’자리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은, 양의 자리에 유가 거하니 유이면 실하지 못한 것이다. 어찌 능히 사람의 신뢰를 얻겠는가.
출전: 주역전의대전(정이천『이천역전』·주자『주역본의』·제가 잔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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