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채로 오르는 자리
상육은 승(升)괘의 맨 꼭대기, 올라감이 다한 극점에 있다. 음(陰)의 자질로 이 자리에 처하여, 더 오를 곳이 없는데도 캄캄한 밤중처럼 어둡게 올라가려고만 한다. 이것이 명승(冥升)이다. 나아갈 줄만 알고 그칠 줄을 모르는(知進不知止) 자의 모습이다. 원나라 역학자 풍거비는 명승을 명행(冥行), 곧 앞이 보이지 않는데 걷는 것과 같다고 했다. 결과는 소모뿐이다. 소상전이 “소불부(消不富)” — 줄어들 뿐 넉넉해지지 못한다고 한 까닭이다.
그러나 주역은 이 혼매한 마음조차 버리지 않는다. “쉬지 않는 바름에 이롭다(利于不息之貞)“고 길을 열어 둔다. 문제는 그치지 않는 것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향해 그치지 않느냐다. 정이천은 “소인이 탐욕스럽게 그치지 않는 마음을 옮겨서 덕을 쌓는 데 쓴다면, 무엇이 이보다 더 좋겠는가”라고 했다. 밖을 향한 무한한 욕망을, 안을 향한 무한한 수양으로 돌리는 것 — 그것이 불식지정(不息之貞)이다.
원나라 역학자 장청자(중계 장씨)의 풀이가 가장 명쾌하다. 지위를 올리려는 마음(升位之心)을 덕을 올리는 데(升德)로 옮기라는 것이다. 산이 티끌 하나하나를 쌓아 높아지고, 바다가 작은 물줄기를 모아 커지듯, 종일 부지런히 힘써 스스로 쉬지 않는(自强不息) 것 — 그것이 명승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다.
삶에의 적용
돈을 벌어도 더 벌고 싶고, 자리를 얻어도 더 오르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 멈추지 않는 에너지를 억누르려 애쓸 필요는 없다. 다만 방향을 안으로 돌리면 된다. 몸으로 말하자면, 수련이 어느 경지에 이르렀다고 여기며 계속 과격하게 밀어붙이면 몸이 상한다. 극에 이른 뒤에는 바깥으로 드러나는 기술을 줄이고, 호흡과 마음의 자리로 힘을 돌려야 한다. 멈추지 않되 방향을 안으로 돌리는 것 — 이것이 오르막의 끝에서 배우는 가장 깊은 절제다.
훈장님의 풀이 — 허곡 선생님의 주역 강의에서
上六은 음이 升의 극에 있어 — 어둡게(눈멀어) 그칠 줄 모르고 오르려 한다(冥升) — 계급의 눈이 멀어 죽어도 올라가야겠다 하니, 나아갈 줄만 알고 그칠 줄을 모른다(知進不知止). 욕심으로 오르면 반드시 실패해 죽는다.
그러나 그 쉬지 않고 오르려는 마음(冥升의 不息)을 거꾸로 돌려 — 바른 노력에 쓰면 이롭다(利于不息之貞). 욕심으로 끝없이 오르려는 그 힘을, 덕을 닦는 데로 옮겨 쉬지 않으면(移於進德) — 무엇이 이보다 좋으랴(何善如之). 노력하는 자가 타고난 성인·대인보다 더 훌륭하다.
그러니 인간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 없다 — 노력에 따라 정해진다. 팔자는 태어날 때 타고나는 게 아니라 살아가며 만드는 것이니(命非定·在己), 변할 줄 알아야 한다(주역의 易이 그 뜻이다). 티끌이 모여 태산이 되고 물방울이 모여 바다가 되듯(積小以高大) — 한꺼번에 부자·성인 되려 말고 욕심 빼고 서서히 쌓아라.
원문과 주석 — 효사·소상전과 정이천·주자·제가의 풀이
효사
上六:冥升,利于不息之貞。
상육은 어두운 채로 올라가니, 쉬지 않는 바름에 이롭다.
소상전
象曰:冥升在上,消不富也。
상에 이르기를, 어두운 채로 올라감이 위에 있다 함은, 소모되어 넉넉하지 못한 것이다.
정이천 『이천역전』 — 효사
六以隂居升之極,昏於升,知進而不知止者也。其為不眀甚矣。
상육은 음으로써 승의 극에 거하니, 올라감에 어두워서 나아갈 줄만 알고 그칠 줄을 모르는 자이다. 그 밝지 못함이 심하도다.
然求升不已之心,有時而用於貞正而當不息之事,則為宜矣。君子於貞正之徳,終日乾乾,自强不息。如上六不已之心,用之於此則利也。以小人貪求无已之心,移於進德,則何善如之。
그러나 올라가기를 쉬지 않고 구하는 마음이, 때에 따라 정정한 데 쓰이고 쉬지 않아야 할 일에 해당하면 마땅하다. 군자는 정정한 덕에 있어 종일 부지런히 힘써 스스로 쉬지 않는다. 상육의 그치지 않는 마음을 이에 쓰면 이롭다. 소인이 탐욕스럽게 그치지 않는 마음을 옮겨 덕을 쌓는 데 쓴다면, 무엇이 이보다 더 좋겠는가.
주자 『주역본의』
以隂居升極,昏不已者也。占者遇此,无適而利,但可反其不已於外之心,施之於不息之正而已。
음으로써 승의 극에 거하니 어두워서 그치지 않는 자이다. 점치는 자가 이를 만나면 가는 곳마다 이로울 것이 없고, 다만 바깥을 향해 그치지 않는 마음을 돌이켜 쉬지 않는 바름에 베풀 수 있을 뿐이다.
정이천 『이천역전』 — 소상전
昏冥於升,極上而不知已,唯有消亡,豈復有加益。
올라감에 혼매하여 위의 극에 이르러서도 그칠 줄을 모르니, 오직 소모되어 없어짐만 있을 뿐이요, 어찌 다시 더해지고 보태짐이 있겠는가.
풍거비(馮氏去非)
馮氏去非曰:冥升,猶言冥行也。
명승은 명행(캄캄한 밤에 걷는 것)과 같은 말이다.
장청자(中溪張氏) — 효사
中溪張氏曰:上六處坤之上,升之極,猶之晦冥隂暗而猶升焉,此進而不息者也。然貞而不息則利,不貞而不息則何利之有?若能以升位之心而移之於升德,則譬山之積塵、海之積汚,愈増髙大也。易曰終日乾乾自强不息,詩云文王之德之純純亦不已,此非利於不息之貞也歟?
상육은 곤의 위, 승의 극에 처하니 마치 해가 진 뒤 어둡고 캄캄한데도 오히려 올라가려 하니, 나아가되 쉬지 않는 자이다. 그러나 바르면서 쉬지 않으면 이롭고, 바르지 않으면서 쉬지 않으면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능히 지위를 올리려는 마음을 옮겨 덕을 올리는 데 쓴다면, 산이 티끌을 쌓고 바다가 더러운 물을 모아 점점 더 높고 커지는 것과 같다. 역에 종일 부지런히 힘써 자강불식이라 하였고, 시에 문왕의 덕이 순수하고 순수하여 역시 그치지 않았다 하였으니, 이것이 불식지정에 이로움이 아니겠는가.
난정서(蘭氏廷瑞)
蘭氏廷瑞曰:冥者晦也。升、豫皆以隂升居上位,故豫曰冥豫,升曰冥升。
명이란 어두움이다. 승과 예는 모두 음이 올라 상위에 거하므로, 예에서는 명예라 하고 승에서는 명승이라 한 것이다.
운봉 호씨(雲峰胡氏)
雲峰胡氏曰:豫上六冥豫,戒以成有渝;升上六冥升,戒以利乎不息之貞者。豫上震,震動也,欲動其悔過之心,變其豫不為豫也。升上坤,坤順也,欲順其不已於進之心,移於不息之貞也。
예 상육의 명예는 이루어진 것에 변화가 있으리라로 경계하고, 승 상육의 명승은 쉬지 않는 바름에 이롭다로 경계한다. 예의 상괘는 진이니 진동이라, 후회하고 고치려는 마음을 움직여 그 기쁨을 바꾸려는 것이다. 승의 상괘는 곤이니 순함이라, 나아감에 그치지 않는 마음을 순하게 하여 쉬지 않는 바름으로 옮기려는 것이다.
백운 곽씨(白雲郭氏)
白雲郭氏曰:消息一理耳。息則富而消則不富也。
소(줄어듦)와 식(불어남)은 하나의 이치이다. 불어나면 넉넉하고, 줄어들면 넉넉하지 못하다.
장청자(中溪張氏) — 소상전
中溪張氏曰:坤為晦,隂虚為不富。晦在上,猶且升而不息,豈知升極當降,長極當消?消則不能有其富矣。
곤은 어두움이 되고, 음이 비어 있는 것은 넉넉하지 못함이 된다. 어두움이 위에 있는데 오히려 올라가 쉬지 않으니, 어찌 올라감이 극에 달하면 내려와야 하고 성장이 극에 달하면 줄어들어야 함을 알겠는가. 줄어들면 그 넉넉함을 지닐 수 없다.
건안 구씨(建安丘氏) — 승괘 6효 총정리
建安丘氏曰:升卦之義,以卦變言則柔以時升,六自三上升而為四也。以二體言則以巽升坤,下三爻為方升之人,上三爻皆受其升者。以六爻言則六五貞吉升階,居得尊位,為升之主。下四爻則皆來升者也。
승괘의 뜻은, 괘변으로 말하면 유가 때를 따라 올라가니 육이 삼에서 위로 올라가 사가 된 것이요, 상하괘로 말하면 손으로써 곤에 올라가는 것이니 하삼효는 바야흐로 올라가는 사람이요 상삼효는 모두 그 올라옴을 받아들이는 자이며, 육효로 말하면 육오가 정길승계로 존위에 거하여 승의 주인이 되고 아래 사효는 모두 와서 올라가는 자이다.
初與三於五非近非應,无嫌於五,故初允升,三升虛邑,蓋可升而升者也。如九二應五則礙而不得進,故孚而用禴。六四近五則進而不敢逼,故亨而順事。是知不可升而不升者也,故二爻不言升。至上處窮極之地,不當升而猶升焉,則是冥升而已矣。升之道,可易言哉!
초효와 삼효는 오효에 대해 가깝지도 응하지도 않아 혐의가 없으니, 초효는 윤승이요 삼효는 승허읍이라 대개 올라갈 수 있어 올라가는 자이다. 구이는 오효에 응하므로 거리낌이 있어 나아가지 못하니 성심으로 하되 약제를 쓴다. 육사는 오효에 가까우므로 나아가되 감히 핍박하지 못하니 형통하되 순히 섬긴다. 이는 올라갈 수 없어 올라가지 않는 자임을 아는 것이라, 두 효에서는 승을 말하지 않았다. 상육에 이르러 궁극의 자리에 처하여 올라가서는 안 되는데 오히려 올라가니, 이것은 명승일 뿐이다. 승의 도를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태극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