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이는 음효가 음의 자리에 놓여 중정(中正)을 온전히 갖추었고, 하괘 간(艮)의 한가운데에 거한다. 저 위에서 큰 험난함(坎)에 빠져 고통받는 군주 구오와 정응(正應)하는, 충직하고 유순한 신하의 자리다. 건(蹇) 괘는 본래 험을 보면 멈추어 기다리는 것이 미덕이지만, 직책을 맡은 이 자리만은 예외다. 효사는 “왕의 신하가 절뚝이고 또 절뚝인다(王臣蹇蹇)“고 한다. 이미 어려운 때에, 위기에 처한 군주를 구하러 더 깊은 어려움 속으로 절뚝이며 뛰어드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것은 “제 한 몸을 위한 까닭이 아니다(匪躬之故)”.
정이천은 육이가 음유(陰柔)한 재주로 그 무거운 임무를 쉽게 감당하지 못함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 뜻과 의리는 가히 칭찬할 만하다(志義可嘉)“고 했다. 뜻이 임금을 구제하는 데 있고 제 몸을 돌보지 않으니, 비록 일을 끝내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 충심을 높이 산 것이다. 주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 효에 길흉을 달지 않은 까닭은, “점치는 자가 단지 몸을 굽혀 온 힘을 다할 뿐(鞠躬盡力), 성공과 실패는 논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라 했다. 제갈량의 국궁진력 사이후이(鞠躬盡力 死而後已)를 끌어와, 결과의 저울질을 아예 내려놓은 자리로 읽은 것이다.
소상전은 이 절뚝임이 “마침내 허물이 없다(終无尤)“고 매듭짓는다. 재주가 부족해 끝내 구제하지 못해도 원망이 없는 것은, 성패가 아니라 옳고 그름으로 그 자리를 지켰기 때문이다. 원나라 역학자 호병문의 말처럼 천하의 일은 마땅히 시비(是非)를 논해야지 성패를 논해서는 안 된다. 결과의 확률을 계산하는 순간 사심이 끼어들고, 그 사심이 판단을 흐린다. 육이가 가르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 앞에서 승산을 셈하지 않고 제 본분에 온전히 몸을 싣는 태도다.
결과를 앞세우면 몸이 먼저 움츠러든다. 이길 수 있을까, 손해 보지 않을까를 재는 사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호흡이 얕아지며, 정작 해야 할 동작은 굳어 버린다. 육이의 자리는 그 계산의 스위치를 끄라 한다. 내가 맡은 책임 앞에서 승패의 기댓값을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 다해야 할 힘에만 마음을 실어라. 몸을 사려 뻣뻣하게 버티면 도리어 부러지지만, 힘을 완전히 빼고(柔順) 해야 할 자리로 중심을 내던지면 오히려 흔들리지 않는다. 결과를 하늘에 맡기고 제 할 바에 온전히 몰입할 때, 두려움은 잦아들고 몸과 마음은 가장 단단해진다. 마땅함에 몸을 싣는 것, 그것이 사람을 끝내 부끄럽지 않게 한다.
훈장님의 풀이 — 허곡 선생님의 주역 강의에서
'蹇于蹇(蹇蹇)'은 어려움 속의 더한 어려움이다 — 九五 임금이 大蹇(큰 어려움)의 한가운데, 험(坎)에 빠져 죽기 아니면 살기로 힘쓰니(致力於蹇難之時), 二효 신하가 그 임금을 구하러 더욱 어려운 데로 간다. '蹇(어려울 간)'은 그냥 어려운 것, '蹇(절뚝일 건)'은 이리저리 막혀 어려운 것이니 — 어려움이 지극히 심한 것(蹇蹇=艱蹇至甚)이다.
'匪躬之故'는 제 한 몸(躬)을 위한 까닭이 아니라는 말이다 — 시대(나라·임금)를 건지고 내 몸도 건지되, 제 몸 살자고가 아니다. 그래서 충신(忠臣)이라 평가하고 그치지 않으니(不已) — 충성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고 그치지 않음을 기린 것이다.
마땅히 몸을 굽혀 힘을 다할 뿐이다(鞠躬盡力) — 제 생명·힘을 있는 대로 다 쓸 따름이고, 성공이냐 실패냐·빠르냐 더디냐(成敗利鈍)에 이르는 것은 계산하지 마라(非所論). 옳은 일을 하러 가서 죽나, 살자고 하다 죽나 — 죽고 사는 건 따지지 말고 올바른 길을 가다 죽는 것이다. 최선만 다하고 운명을 기다려라.
원문과 주석 — 경문·소상전과 역대 풀이
경문과 소상전
六二,王臣蹇蹇,匪躬之故。 象曰:王臣蹇蹇,終无尤也。
육이는 왕의 신하가 절뚝거리고 또 절뚝거림이니(왕신건건), 자기 일신(몸)을 위한 까닭이 아니다(비궁지고). 소상전에 말하였다. “왕의 신하가 절뚝거리고 절뚝거림은, 마침내 허물(원망)이 없는 것(종무우)이다.”
정이천 『이천역전』
傳:二以中正之德,居艮體,止於中正者也。與五相應,是中正之人,為中正之君所信任,故謂之王臣。雖上下同德,而五方在大蹇之中,致力於蹇難之時,其艱蹇至甚,故為蹇於蹇也。
전(傳)에 이르기를, 2효는 중정(中正)의 덕으로써 간(艮)의 체에 거하니, 중정함에 그치는 자이다. 5효와 서로 응하니, 이는 중정한 사람이 중정한 임금에게 신임을 받는 것이므로 ’왕의 신하(王臣)’라고 이른 것이다. 비록 위아래가 덕을 같이하나, 5효가 바야흐로 큰 어려움(大蹇) 한가운데 있어 건난(蹇難)의 때에 힘을 다하고 있으니, 그 어렵고 험함이 지극히 심하다. 그러므로 ’어려움 속에서 또 어려움을 겪는 것(蹇於蹇)’이 된다.
二雖中正,以陰柔之才,豈易勝其任?所以蹇於蹇也。志在濟君於蹇難之中,其蹇蹇者,非為身之故也。雖使不勝,志義可嘉。故稱其忠藎,不為己也。然其才不足以濟蹇也,小可濟則聖人當盛稱以為勸矣。
2효가 비록 중정하나 음유(陰柔)한 재주이니, 어찌 그 임무를 쉽게 감당하겠는가? 이것이 거듭 절뚝거리는(蹇於蹇) 까닭이다. 뜻이 임금을 건난의 가운데서 구제하는 데 있으니, 그 거듭 절뚝거리는 것(고난을 무릅씀)은 자기 몸을 위한 까닭이 아니다. 비록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하더라도, 그 뜻과 의리(志義)는 가히 칭찬할 만하다. 그러므로 그 충성스럽고 애씀(忠藎)이 자기를 위함이 아님을 칭송한 것이다. 그러나 그 재주는 족히 건난을 구제하기에 부족하다. 조금이라도 구제할 수 있었다면 성인이 마땅히 성대하게 칭송하여 권면함으로 삼았을 것이다.
주자 『주역본의』
本義:柔順中正,正應在上而在險中,故蹇而又蹇以求濟之,非以其身之故也。不言吉凶者,占者但當鞠躬盡力而已,至於成敗利鈍,則非所論也。(一作艱)
본의(本義)에 말하였다. 유순하고 중정하며, 정응(正應)이 위에 있으면서 위험 속에 있다. 그러므로 험난함에 또 험난함을 무릅쓰고(蹇而又蹇) 그를 구제하기를 구하는 것이지, 자기 몸(사리사욕)을 위한 까닭이 아니다. 길흉을 말하지 않은 것은, 점치는 자가 단지 마땅히 몸을 굽혀 온 힘을 다할(鞠躬盡力) 뿐이지, 성공과 실패, 이로움과 둔함(成敗利鈍)에 이르러서는 논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제갈량의 『후출사표』를 인용함. 어떤 판본에는 蹇이 艱으로 되어 있다.)
소상전 해설 — 정이천·주자
傳:雖艱戹於蹇時,然其志在濟君難。雖未成功,然終无過尤也。聖人取其志義而謂其无尤,所以勸忠藎也。 本義:事雖不濟,亦无可尤。
(정전) 비록 건난의 때에 간고하고 액운을 겪으나, 그 뜻은 임금의 환난을 구제하는 데 있다. 비록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마침내 잘못이나 원망(過尤)이 없는 것이다. 성인이 그 뜻과 의리를 취하여 ’원망할 바가 없다’고 하신 것은, 충성스럽고 애씀을 권면하기 위함이다. (본의) 일이 비록 구제되지 못하더라도, 또한 가히 원망할 바가 없다.
제가 — 홍용재(洪容齋)
容齋洪氏曰:外卦一坎,諸爻所同,而自六二推之,上承九三、六四,又互坎體,是一卦之中已有二坎。言蹇蹇者,猶言坎坎也。
홍용재가 말하였다. 외괘가 하나의 감(坎, 위험)인 것은 모든 효가 한가지이나, 육이로부터 미루어보면 위로 구삼과 육사를 받들고 있어 또 호괘(互卦)가 감(坎)의 체를 이룬다. 이는 한 괘 안에 이미 두 개의 감(위험)이 있는 것이다. ’건건(蹇蹇)’이라고 말한 것은 ’감감(坎坎, 위험하고 또 위험함)’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제가 — 절재 채씨(節齋蔡氏)
節齋蔡氏曰:王臣,為五之臣也。蹇蹇,入難之深也。匪躬之故,為王之事也。
절재 채씨가 말하였다. 왕신(王臣)은 5효의 신하이다. 건건(蹇蹇)은 환난에 깊이 들어간 것이다. 비궁지고(匪躬之故)는 (자기 일이 아니라) 왕의 일을 위함이다.
제가 — 성재 양씨(誠齋楊氏)
誠齋楊氏曰:諸爻聖人皆不許其往,唯六二、九五无不許其往之辭者,二為王者之大臣,五履大君之正位,復不往以濟,而誰當任乎?
성재 양씨가 말하였다. 다른 모든 효는 성인이 그 ’나아감(往)’을 허락하지 않으셨으나, 오직 육이와 구오만은 그 나아감을 허락하지 않은 말씀이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2효는 왕의 대신(大臣)이요, 5효는 대군(大君)의 바른 자리를 밟고 있으니, 다시 나아가 구제하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그 책임을 맡겠는가?
誠齋楊氏曰:蹇蹇者,多難而非一難也。大臣犯天下之多難,而捐軀以求濟,何尤之有?然以六二之匪躬,而不聞濟難,何耶?葢捐軀在志,濟難在才,六二陰柔,短於才也。聖人不尤之者,嘉其志而恕其才也。
성재 양씨가 말하였다. ’건건’은 환난이 많은 것이지 하나의 환난이 아니다. 대신이 천하의 많은 환난을 무릅쓰고, 목숨을 버리며(捐軀) 구제하기를 구하는데, 무슨 원망할 바가 있겠는가? 그러나 육이가 몸을 돌보지 않으면서도 환난을 구제했다는 말을 듣지 못함은 어째서인가? 대개 목숨을 버림은 뜻(志)에 달려 있고, 환난을 구제함은 재주(才)에 달려 있는데, 육이는 음유하여 재주가 짧기 때문이다. 성인이 그를 탓하지 않은 것은 그 뜻을 가상히 여기고 그 재주(의 부족함)를 용서하신 것이다.
제가 — 뇌씨(雷氏)
雷氏曰:初六以不往為有譽,六二以匪躬為无尤,有位无位之間耳。
뇌씨가 말하였다. 초육은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명예(譽)를 얻었고, 육이는 내 몸을 돌보지 않음으로써 원망이 없음(无尤)을 얻었으니, 지위가 있고 없음(有位无位)의 차이일 뿐이다.
제가 — 운봉 호씨(雲峰胡氏)
雲峰胡氏曰:坎、互坎,蹇蹇象。匪躬,艮其背不獲其身之象。凡二皆王臣,而蹇獨稱之者,平時未足以見臣節,蹇之時方見之。五位蹇中,王之蹇也;主憂臣辱,亦二之蹇也。他爻戒其往蹇,二應五,故稱其蹇蹇,事君能致其身者也。
운봉 호씨가 말하였다. 감과 호괘 감이 겹치니 ’건건’의 상이다. 내 몸이 아님(匪躬)은 간(艮/산)이 그 등을 그치게 하여 그 몸을 얻지 못함(不獲其身)의 상이다. 무릇 2효는 모두 왕의 신하인데, 건 괘에서 유독 그것을 칭한 것은, 평상시에는 족히 신하의 절개(臣節)를 볼 수 없으나 건난의 때에는 바야흐로 그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5가 건난의 복판에 있으니 왕의 건난이요,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가 욕을 당함(主憂臣辱)이니 이 또한 2효의 건난이다. 다른 효들은 그 나아가면 건난하다고 경계했지만, 2효는 5효에 응하므로 그 ’건건’함을 일컬었으니, 임금을 섬김에 능히 그 몸을 바치는 자(致其身)이다.
復六四中行獨復,不言吉,本義引董子「明道不計功,正誼不謀利」之説,以為理所當然,吉凶非所論。此不言吉,則引孔明之言曰「鞠躬盡力,死而後已,成敗利鈍,則非所論」。烏虖!必如此而後義利之界限明矣。天下事固當論是非,不當論成敗也。(一作蹇,一无然字)
복(復) 괘 64의 ’가운데로 행하다 홀로 돌아옴(中行獨復)’에서 길함을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본의(주희)는 동중서의 “도를 밝힐 뿐 공을 계산하지 않으며, 의리를 바르게 할 뿐 이익을 도모하지 않는다(明道不計功, 正誼不謀利)“는 설을 인용하여, 이치상 당연한 것이라 길흉은 논할 바가 아니라고 여겼다. 이 효(육이)에서 길함을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제갈량(孔明)의 말을 인용하여 “몸을 굽혀 온 힘을 다해 죽은 뒤에야 그칠 뿐, 성공과 실패, 이로움과 둔함은 논할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아아! 반드시 이와 같이 한 연후에야 의(義)와 이(利)의 경계선이 명확해진다. 천하의 일은 진실로 마땅히 시비(옳고 그름)를 논해야지, 성패(성공과 실패)를 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雲峰胡氏曰:本義於爻引孔明之言,此復本程傳意曰「事雖不濟亦无可尤」。葢孔明雖志決身殱,然天下後世誰得而尤孔明者?斯言眞足以勸忠藎矣。
운봉 호씨가 말하였다. 본의에서 이 효에 제갈공명의 말을 인용하였고, 여기서 다시 정전의 뜻을 본받아 “일이 비록 구제되지 못하더라도 또한 가히 원망할 바가 없다”고 하였다. 대개 제갈공명이 비록 뜻을 결단하였으나 몸이 죽고 말았음(志決身殱)에도, 천하 후세에 그 누가 공명을 탓할 수 있겠는가? 이 말씀이 참으로 족히 충성을 권면할 만하다.
태극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