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가인괘의 여섯 효 가운데 가장 아래, 초구는 집안이 이제 막 이루어지는 자리다. 양효가 양의 자리에 있어 강건하고 밝은 자질을 갖추었다. 그런데 주역이 이 첫 자리에서 먼저 말하는 것은 사랑도 화합도 아니다. 경문은 “집안에 울타리를 세우라(閑有家)“고 한다. 한(閑)은 막고 단속하는 법도를 이른다. 정이천은 “집안을 다스리는 초기에 능히 법도로써 막으면 후회에 이르지 않는다”고 했다. 집안을 다스린다는 것은 결국 여러 사람을 다스리는 일이니, 법도로 막지 않으면 인정(人情)이 흘러 방종해지고 어른과 아이의 차례, 남녀의 구별이 무너져 은혜와 의리를 함께 상하게 된다.
왜 하필 시작인가. 소상전은 “뜻이 아직 변하지 않았기 때문(志未變也)“이라 답한다. 관계가 굳어지고 습관이 고착되기 전, 바로 그 짧은 시기가 세팅값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때다. 정이천은 이를 “집안사람들의 뜻이 아직 변동하기 전”이라 풀었다. 바른 뜻이 아직 흩어지지 않았을 때 막으면 은혜를 상하지 않고 의리를 잃지 않는다. 반대로 뜻이 변한 뒤에, 나쁜 버릇이 든 뒤에 다스리려 하면 상하는 바가 많아 마침내 후회가 남는다. 주자도 상전을 “뜻이 변하기 전에 미리 방어함(志未變而豫防之)“이라 한 문장으로 매듭지었다.
경문이 ’후회가 없다(无悔)’가 아니라 ’후회가 없어진다(悔亡)’고 한 대목도 곱씹을 만하다. 정이천은 그 까닭을 이렇게 밝힌다. 무리가 모여 살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기기 마련인데, 처음부터 막았기 때문에 그 후회가 사라진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규율은 감정을 억누르는 차가운 벽이 아니라, 앞으로 치를 감정의 소모를 미리 덜어 주는 예방이다. 지금의 깐깐함이 뒷날의 평화를 앞당긴다 — 초구의 울타리는 회고가 아니라 전망의 규율이다.
삶에의 적용
몸에 새기는 모든 습관은 처음 며칠이 운명을 정한다. 잘못된 자세로 수백 번을 되풀이해 근육에 기억이 굳으면, 그것을 고치는 일은 처음 배우는 것보다 몇 곱절 힘들다. 준비 자세에서 영점이 한 번 틀어지면 이어지는 백 가지 동작이 모두 어그러진다. 그러니 첫 호흡, 첫 자세에 온 신경을 모아 내 몸의 법도를 먼저 세워야 한다. 새로운 인연을 맺을 때도, 새 일을 시작할 때도 다르지 않다. “처음이니까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선을 흐리는 것은 관용이 아니라 뒷날의 후회를 예약하는 일이다. 남을 단속하기 전에 나를 먼저 단속하는 것 — 그 규율이야말로 가장 자비로운 시작이다.
훈장님의 풀이 — 허곡 선생님의 주역 강의에서
初九(陽, 離의 아래)를 푼다. "'閑(한)'은 막을 한·법도(法度)이니, 閑有家는 대문을 꽉 닫아 집을 단속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후회가 있던 것이 없어진다(悔亡)."
"초구는 1효이면서 양효(남자·힘셈)요 불(離)이라, 가정을 막 꾸린 처지에 사회에 나가 출세하고 싶어 마음이 불끈불끈한다. 대학도 나오고 공부도 잘했으니 한자리 해보고 싶지 — 그러나 나가면 실패한다. 그 욕심을 억제할 수만 있으면 망할 일이 없다. 그래서 悔亡이다."
소상전 "閑有家, 志未變也"가 핵심이다. "가인의 처음, 아직 사랑의 뜻이 변하지 않았을 때(志未變) 미리 막는 것이다 — 사랑이 변한 뒤엔 막을 수 없다." (…) 이는 조짐이 드러나기 전에 미리 행하는 見幾而作의 가정판이다.
원문과 주석 — 경문·소상전, 정이천·주자와 제가(諸家)
경문·소상전
初九,閑有家,悔亡。 象曰:閑有家,志未變也。
초구는 집안에 법도의 울타리를 막아 세움이니, 후회가 없어진다. 소상전에 이르기를, 집안에 울타리를 막아 세운다는 것은 뜻이 아직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이천 『이천역전』
初,家道之始也。閑謂防閑法度也。治其有家之始,能以法度為之防閑,則不至於悔矣。治家者,治乎衆人也。苟不閑之以法度,則人情流放,必至於有悔。失長幼之序,亂男女之别,傷恩義,害倫理,无所不至。
초효는 집안의 도(道)가 시작되는 때이다. 한(閑)은 막고 방어하는 법도를 이른다. 그 집안을 다스리는 초기에 능히 법도로써 막으면 후회함에 이르지 않는다. 집안을 다스린다는 것은 여러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다. 진실로 법도로써 막지 않으면 인정이 흘러 방종해져서 반드시 후회함에 이른다. 어른과 아이의 차례를 잃고 남녀의 구별을 어지럽히며 은의(恩義)를 상하게 하고 윤리를 해치는 등, 이르지 않는 바가 없게 된다.
能以法度閑之於始則无是矣,故悔亡也。九,剛明之才,能閑其家者也。不云无悔者,羣居必有悔,以能閑故亡耳。
능히 시작할 때 법도로써 막으면 이런 일이 없으므로 ’후회가 없어진다(悔亡)’고 한 것이다. 구(九)는 강하고 밝은 재주이니 능히 그 집안을 단속할 수 있는 자이다. ’후회가 없다(无悔)’고 말하지 않은 것은, 무리가 모여 살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기기 마련인데 능히 처음부터 막았기 때문에 그 후회가 사라진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閑之於始,家人志意未變動之前也。正志未流散變動而閑之,則不傷恩,不失義,處家之善也,是以悔亡。志變而後治,則所傷多矣,乃有悔也。
(상전 해설) 시작할 때 막는다는 것은 집안사람들의 뜻이 아직 변동하기 전에 하는 것이다. 바른 뜻이 아직 흩어지거나 변동하기 전에 막으면 은혜를 상하지 않고 의리를 잃지 않으니, 집안에 대처하는 훌륭함이다. 이 때문에 후회가 없어진다. 뜻이 변한 뒤에 다스리려 하면 상하는 바가 많아지니 마침내 후회가 있는 것이다.
주자 『주역본의』
初九以剛陽處有家之始,能防閑之,其悔亡矣。戒占者當如是也。
초구가 강양(剛陽)으로써 집안을 꾸리는 시작에 처하여 능히 막고 방어하니 그 후회가 없어질 것이다. 점치는 자가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함을 경계한 것이다.
(象傳)志未變而豫防之。
(상전 본의) 뜻이 변하기 전에 미리 방어하는 것이다.
제가 — 용재 조씨(庸齋趙氏)
庸齋趙氏曰:閑於始則人心未變,无傷恩害義之事,故悔亡。教婦初來,教子嬰孩是也。
시작할 때 막으면 사람의 마음이 아직 변하지 않아 은혜를 상하거나 의리를 해치는 일이 없으므로 후회가 없어진다. “며느리는 처음 왔을 때 가르치고, 자식은 갓난아이일 때 가르친다(敎婦初來, 敎子嬰孩)“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제가 — 구산 양씨(龜山楊氏)
龜山楊氏曰:禮始於謹夫婦,為宫室,辨内外,男位乎外,女位乎内,男不入,女不出,所以閑有家也。所以謹始也。始不閑,終必亂矣。
예(禮)는 부부 관계를 삼가는 데서 시작한다. 궁실을 짓고 안팎을 분별하여 남자는 밖에서 자리 잡고 여자는 안에서 자리 잡아, 남자는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여자는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 이것이 집안을 단속하는 까닭이요 그 시작을 삼가는 까닭이다. 시작할 때 단속하지 않으면 끝내 반드시 어지러워진다.
제가 — 중계 장씨(中溪張氏)
中溪張氏曰:離外實中虛,有家之象。二為家人之主,初以剛明之才居其下,得防閑之道於其始,而羣居紛爭之悔自亡矣。
리(離) 괘는 밖이 실하고 안이 비어 있어 ’집안(家)’의 상이 있다. 이효가 가인의 주인이 되고 초효가 강명(剛明)한 재주로 그 아래에 거하여 그 시작에 막는 도를 얻었으니, 무리 지어 살며 분쟁하는 후회가 저절로 사라진 것이다.
中溪張氏曰:防閑之道當謹其初也。若待家瀆而後嚴之,志變而後治之,則敬戒之意失而有悔矣。
막는 도는 마땅히 그 처음을 삼가야 한다. 만약 집안이 문란해지기를 기다린 뒤에야 엄격하게 하고, 뜻이 변한 뒤에야 다스린다면, 공경히 경계하는 뜻을 잃어 후회가 있을 것이다.
제가 — 운봉 호씨(雲峰胡氏)
雲峰胡氏曰:初之時當閑,九之剛能閑。三五以剛居剛而吉,初以剛居剛而能防閑其家者也。僅曰悔亡,何哉?家難而天下易,能閑於初,僅可免悔。初之不閑,悔將若何?
일효의 때는 마땅히 막아야 하고, 구(九)의 강함은 능히 막을 수 있다. 삼효와 오효는 강이 강에 거하여 길하고, 초효도 강이 강에 거하여 능히 그 집안을 단속하는 자이다. 그런데 겨우 ’후회가 없어진다(悔亡)’고만 한 것은 어째서인가? 집안을 다스리기는 어렵고 천하를 다스리기는 오히려 쉽기 때문이다. 능히 처음에 단속해야만 겨우 후회를 면할 수 있으니, 처음에 단속하지 않는다면 그 후회가 장차 어떠하겠는가.
雲峰胡氏曰:家人志已變而防之者難,未變而防之者易。
집안사람의 뜻이 이미 변한 뒤에 막는 것은 어렵고, 아직 변하기 전에 막는 것은 쉽다.
(출전: 경문·소상전 및 정이천『이천역전』, 주자『주역본의』, 제가 잔주는 모두 『주역전의대전』에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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