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대과(大過)의 마지막 효다. 연못의 물이 불어 나무를 삼키듯, 물이 가슴까지 찼는데도 멈추지 않고 건너다가 끝내 정수리까지 잠긴다. 과섭멸정(過涉滅頂), 지나치게 건너다 머리끝까지 물에 빠지는 자리다. 결과는 흉(凶), 곧 죽음이다. 그런데 주역은 여기에 기묘한 한마디를 덧붙인다. 허물은 없다(无咎).
죽었는데 허물이 없다니 무슨 뜻인가. 여기서 두 거두의 해석이 팽팽하게 갈린다. 정이천은 “제 분수를 모르고 설치다 스스로 화를 입었으니 누구를 탓하겠는가”라며 소인의 자업자득으로 읽는다. 스스로 저지른 일이라 원망할 곳이 없어 무구라는 것이다. 주자는 반대로 읽는다. 뜻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살신성인(殺身成仁)이니, 일은 비록 흉하나 의리(義)에 있어서는 허물이 없다는 것이다. 주자는 후한(後漢)의 의인들, 물의 깊고 얕음을 헤아리지 않고 몸을 죽이고 집안을 망친 선비들을 예로 든다. 그 마음에 무슨 죄가 있겠는가.
같은 죽음을 두고 한쪽은 무모함으로, 한쪽은 숭고함으로 본다. 갈림의 열쇠는 바깥 결과가 아니라 안의 마음이다. 상전은 “탓할 수 없다(不可咎也)“고만 할 뿐, 그것이 어느 쪽인지 판정하지 않는다. 판정은 건너간 사람 자신의 몫으로 남겨둔다. 명분 없는 멸정은 그저 개죽음이고, 의리로 한 멸정은 무구다. 그 사이를 가르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동기의 진실함이다.
삶에의 적용
이 효는 계산과 효율의 자리가 아니다. 되돌릴 수 없는 임계점을 넘은 시간, 이해득실로는 잴 수 없는 가치의 자리다. 회사의 부정을 고발해야 할 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지켜야 할 것이 생겼을 때, 몸은 이렇게 묻는다. 이것은 내 그릇을 모르는 조급함인가, 아니면 마음에 한 점 오차 없는 헌신인가. 태극무예의 사기종인(捨己從人)이 극한에 이르면, 상대의 힘이 해일처럼 밀려올 때 내 힘으로 버티면 부러지지만 나를 완전히 지우고 흐름 속에 녹아들면 오히려 살아난다.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 하면 죽는다. 물에 빠졌을 때 허우적거리며 머리를 내밀려 하면 더 빨리 가라앉고, 힘을 온전히 빼고 잠길 각오를 할 때 몸이 뜬다. 결과가 흉할지라도 마음에 오차가 없다면, 그것이 무구다. 다만 그 마음의 진실함만은 스스로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훈장님의 풀이
훈장님의 풀이 — 허곡 선생님의 주역 강의에서
"상육은 과섭멸정(過涉滅頂)이라 흉하니 — 멸정(滅頂)은 이마(頂)까지 멸할 멸(滅), 푹 파묻힌지라, 나무가 저수지 물에 푹 잠겨 어딘지 모르게 됐다. 물에 안 들어가면 안 빠져 죽을 건데, 쓸데없이 건너간다고 용기 부리다 빠져 죽는 꼴이다. 임중이과(任重而過) — 재주도 안 되는데 그릇을 초과한 자(過其才)는 제 그릇도 모르고 건방지게 한 것이다."
"상육을 1번(初)으로도 보고 6번(개체)으로도 본다. 6번이 1번이니 두 개가 동시 적용되면 이 꼴이 되는 거다. 너무 지나치게 건너가다 이마 머리끝까지 빠져 죽었다 하는 것은 과오결렬자(過於決烈)이니 — 비록 흉하나 의리로 한 일이면 탓할 수 없다(无咎)."
원문과 주석 — 경문·소상전과 정이천·주자·제가의 풀이
효사(爻辭)
上六,過渉滅頂,凶,无咎。
상육은 지나치게 물을 건너다 정수리까지 잠기니(과섭멸정), 흉하나, 허물은 없다.
상전(象傳)
象曰:過渉之凶,不可咎也。
상에 말하기를, 지나치게 건너서 흉함은 (남을) 탓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정이천『이천역전』— 무모한 소인의 자업자득
上六以隂柔處過極,是小人過常之極者也。小人之所謂大過,非能爲大過人之事也,直過常越理,不恤危亡,履險蹈禍而已。如過渉於水,至滅没其頂,其凶可知。
상육은 음유(陰柔)로서 지나침의 극치에 처하였으니, 이는 소인으로서 상도를 벗어남이 지극한 자이다. 소인이 말하는 ’대과’란 남보다 크게 뛰어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상도를 벗어나고 이치를 넘어서며, 위태로움과 망함을 근심하지 않고 위험을 밟고 화를 부르는 것일 뿐이다. 마치 물을 지나치게 건너다 그 정수리까지 잠기는 것과 같으니, 그 흉함을 알 만하다.
小人狂躁以自禍,葢其宜也,復將何尤?故曰无咎,言自爲之,无所怨咎也。因澤之象,而取渉義。
소인이 미친 듯 조급하여 스스로 화를 입었으니 대개 마땅한 일인데, 다시 장차 누구를 탓하겠는가? 그러므로 ’허물이 없다’고 하였으니, 스스로 저지른 일이라 원망하거나 탓할 곳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연못(澤)의 상으로 인하여 ’건넌다(涉)’는 뜻을 취하였다.
주자『주역본의』— 살신성인의 비장함
處過極之地,才弱不足以濟,然於義爲无咎矣。葢殺身成仁之事,故其象占如此。象曰不可咎也。
지나침의 극치인 땅에 처하여, 재주는 약하고 구제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의리(義)에 있어서는 허물이 없다. 이는 대개 자신의 몸을 죽여 인을 이루는 일(살신성인)이다. 그러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다. 상에 ’가히 탓할 수 없다’고 하였다.
朱子曰:過渉滅頂凶无咎,恐是他做得是了,不可以咎他,不似伊川說。
주자가 말하기를 “’과섭멸정하여 흉하나 무구하다’는 것은, 아마도 그가 행한 것이 옳았기에 그를 탓할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니, 이천의 설과는 같지 않다”고 하였다.
제가(諸家) 주석
誠齋楊氏曰:水溢而過於渉者,不足以濟川,而徒没其頂;任重而過其才者,不足以濟難,而徒滅其身。其凶大矣。
성재 양씨가 말하였다. 물이 넘치는데 지나치게 건너는 자는 내(川)를 건너기에는 부족하고 부질없이 그 정수리만 잠길 뿐이요, 임무는 무거운데 재주가 지나치게 모자란 자는 환난을 구제하기에는 부족하고 부질없이 그 몸만 멸망시킨다. 그 흉함이 크다.
中溪張氏曰:上以隂柔而躐居四陽之上,乃過之首者,首即頂也。若過渉於水,本欲有濟,苟不量深淺,而至於滅没其頂,凶則宜矣。非无咎也,不可歸咎於人,當自咎爾。
중계 장씨가 말하였다. 상효는 음유로서 네 양의 위에 건너뛰어 거하니, 곧 지나침의 우두머리(首)인 자요, 우두머리는 곧 정수리(頂)이다. 만약 물을 지나치게 건넘에 본래 구제하고자 했으나, 진실로 깊고 얕음을 헤아리지 못하여 정수리가 잠기는 데 이르렀다면 흉함은 마땅한 것이다. (무구란) 허물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허물을 돌릴 수 없고 마땅히 스스로 탓해야 할 따름이다.
雲峯胡氏曰:初六藉用白茅,過於畏懼者也,故无咎。上六過渉滅頂,過於决裂者也,其事雖凶,於義亦无咎。然亦惟其時而已。初者事之端,能慎其端,徃可无失。上者事之極,極則不可有爲矣。故本義以殺身成仁之事當之。
운봉 호씨가 말하였다. 초육이 흰 띠풀을 깐 것은 두려워함이 지나친 자이므로 허물이 없고, 상육이 지나치게 건너다 정수리가 잠긴 것은 결단하여 찢어발김(決裂)이 지나친 자이니, 그 일은 비록 흉하나 의리에 있어서는 또한 허물이 없다. 그러나 이 또한 오직 그 때(時)일 따름이다. 초효는 일의 실마리이니 능히 그 시작을 삼가면 나아가도 실수가 없다. 상효는 일의 극치이니, 극에 달하면 새로운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의에서 살신성인의 일로써 이것을 해석한 것이다.
厚齋馮氏曰:易大抵上下畫停者,從中分反對爲象,非他卦相應之例也。頤中孚小過皆然,而此卦尤明。三與四對,皆爲棟象,上隆下橈也。二與五對,皆爲枯楊之象,上華下稊也。初與上對,初爲藉用白茅之慎,上爲過渉滅頂之凶也。
후재 풍씨가 말하였다. 역(易)에서 대저 위아래 획이 고른 것은 가운데를 따라 나누어 반대되는 것으로 상을 삼으니, 다른 괘의 응(應)하는 예와는 다르다. 산뢰이·풍택중부·뇌산소과가 모두 그러한데, 이 괘가 더욱 분명하다. 삼효와 사효가 대칭이니 모두 대들보의 상인데 사효는 위로 솟고 삼효는 아래로 휜다. 이효와 오효가 대칭이니 모두 마른 버드나무의 상인데 오효는 위로 꽃이 피고 이효는 아래로 싹이 튼다. 일효와 육효가 대칭이니, 일효는 흰 띠풀을 까는 신중함이요 육효는 지나치게 물을 건너는 흉함이다.
建安丘氏曰:至初上二柔,亦以不過者爲美。然初隂伏於四陽之下,承剛也,故藉用白茅无咎。上隂躐乎四陽之上,乘剛也,故過渉滅頂凶。是知處大過之世,不惟不欲剛之過,而柔亦不容過於剛也。
건안 구씨가 말하였다. 초효와 상효 두 유(柔)에 이르러서도 지나치지 않은 것을 아름다움으로 삼는다. 그러나 초육인 음은 네 양의 아래에 엎드려 강을 받들고 있으므로 무구하다. 반면 상육인 음은 네 양의 위를 밟고 넘어서 강을 타고 있으므로 흉한 것이다. 이로써 대과의 세상에 처하여서는, 강함이 지나치고자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드러움 또한 강함보다 지나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雙湖胡氏曰:此是聖人内陽外隂之㣲意。以陽自内而過者爲主,隂自外而過者爲客。大過四陽過盛於内,而主勝於客,故不名之曰小過,而自取象於頤。小過四隂過盛於外,而客勝於主,故不名之曰大過,而自取象於中孚。
쌍호 호씨가 말하였다. 이것은 성인이 안은 양이고 밖은 음으로 둔 은미한 뜻이다. 양이 안으로부터 지나친 자를 주인(主)으로 삼고, 음이 밖으로부터 지나친 자를 손님(客)으로 삼는다. 대과는 네 양이 안에서 지나치게 성하니 주인이 손님을 이기는 것이라 소과라 이름하지 않고 산뢰이에서 상을 취하고, 소과는 네 음이 밖에서 지나치게 성하니 손님이 주인을 이기는 것이라 대과라 이름하지 않고 풍택중부에서 상을 취한다.
태극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