雷地豫 · 64괘 사전

上六 — 冥豫 成有渝 无咎

上六 冥豫 成有渝 无咎
즐거움에 눈멀어 어둠 끝까지 갔으나, 마지막 자리에서 스스로를 돌이켜 바꾸려는 뜻예괘의 맨 끝, 어두운 즐거움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있으니 어찌 오래가겠는가육삼과 정응 관계 — 아래로 이어진 즐거움의 끝에서 방향을 되돌린다자기판단/주체성

풀이

상육(上六)은 예괘(豫卦)의 맨 끝, 우레를 상징하는 진(震)괘의 극단에 자리한다. 즐거움(豫)이 갈 데까지 간 자리다. 효사는 이를 명예(冥豫), 곧 “어두운 즐거움”이라 부른다. 밤새 놀다 해가 저물어 사방이 캄캄해졌는데도 돌아갈 줄 모르고 취해 있는 모습이다. 즐거움에 눈이 멀어 돌아올 길을 잊은 것이다.

상식대로라면 이 자리는 “흉(凶)“으로 끝나야 한다. 어둠이 이미 이루어졌기(成) 때문이다. 그런데 주역은 여기서 뜻밖의 자비를 베푼다. 성유유 무구(成有渝 无咎) — “이미 저질러진 일이라도, 변함이 있으면(渝) 허물이 없다”고 한다. 정이천은 이를 두고 성인이 선으로 옮겨가는 문을 넓힌 것(廣遷善之門)이라 풀었다. 흉함을 말하지 않고 오직 고치는 자의 무구함만을 말한 것은, 사람이 실수했더라도 스스로 바꾸기만 하면 다 허물이 없을 수 있음을 일깨우기 위함이다.

변할 수 있는 근거는 상육이 진(震)괘, 곧 움직임의 몸에 속해 있다는 데 있다. 주자의 말대로 그것은 동체(動體)다. 우레는 본래 움직이는 것이니, 끝까지 갔으면 다시 움직여 변해야 한다. 상육이 변하면 화지진(晉)괘가 되어 밝음이 땅 위로 솟아오른다. 아무리 깊은 어둠도 아침이 오면 사라진다. 중계 장씨의 말처럼, 어두운 것이 어찌 다시 밝아지지 않겠는가.

삶에의 적용

이 효는 이미 늦었다고 여기는 마음에게 건네는 말이다. 매몰된 시간, 돌이킬 수 없어 보이는 습관, 어두워진 끝자리에서도 방향을 트는 것은 언제나 나 자신이다. 몸이 중심을 잃고 기울어졌을 때, 고수는 넘어지기 직전 몸을 돌려 충격을 흘리고 다시 일어선다. 실수해도 당황하지 않고 물 흐르듯 다음 동작으로 잇는다. 어둠이 이루어졌다고 주저앉지 말고, 지금 이 순간 한 번 몸을 돌리는 것 — 그 돌이킴 하나가 어둠을 아침으로 바꾼다.

훈장님의 풀이 — 허곡 선생님의 주역 강의에서

"상육효에서 명예라 — 끝장이 났는데 이것도 예락의 눈이 어둡다고 본 즉 흉한데, 그렇게 말 안 하고 계기 무구하야 — 다시 열어주되 허물이 없다, 어떡하면? 고치면. (…) 왜 그렇게 했나? 좋은 선한 쪽으로 옮겨 가는 문을 넓히기 위해서다(廣遷善之門)."

"운명할 때 그 운자가 운전할 운자다 — 운전대는 내가 틀기에 달려 있어. 지가 삐뚤빼뚤 가놓고 엉뚱한 소리한다. 인간 운명은 정해진 거 없다 — 내가 운전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는 거다. 안 되더라도 되는 거다."

원문과 주석 — 경문·소상전과 정이천·주자·제가

효사

上六 冥豫 成有渝 无咎

상육은 어둠 속에서 즐거워하니(冥豫), 그 즐거움이 이미 이루어졌더라도(成) 변함이 있으면(有渝) 허물이 없으리라(无咎). (渝는 변할 유)

소상전(象傳)

象曰:冥豫在上,何可長也。

상전에 말하였다. “어두운 즐거움으로 위에 있으니, 어찌 가히 오래가겠는가.”

정전(程傳): “즐거움에 혼명하여 마침내 극단에 이르렀으니 재앙과 허물이 머지않아 미칠 것인데, 어찌 가히 길게 그러하겠는가? 마땅히 빨리 변해야 한다.”

정이천『이천역전』

傳曰:上六陰柔,非有中正之德。以陰居上,不正也。而當豫極之時,以君子居斯時,亦當戒懼,况陰柔乎?

전(傳)에 말하였다. “상육은 음유하여 중정(中正)의 덕이 있지 않다. 음으로서 위에 거하니 바르지 않다. 그런데 예(豫)가 극에 달한 때를 당하였으니, 군자로서 이 때에 거하더라도 또한 마땅히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하거늘, 하물며 음유함에 있어서랴?”

乃耽肆於豫,昬迷不知反者也。在豫之終,故為昬冥已成也。

“이에 즐거움에 탐닉하고 방자하여, 혼미하여 돌아올 줄을 모르는 자이다. 예의 마침에 있으므로 ’어둡고 아득함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한 것이다.”

若能有渝變,則可以无咎矣。在豫之終,有變之義。人之失,苟能自變,皆可以无咎。

“만약 능히 바뀌고 변함이 있다면, 곧 가히 허물이 없을 것이다. 예의 마침에 있어서 변하는 의리가 있다. 사람의 실수도 진실로 능히 스스로 변한다면 다 허물이 없을 수 있다.”

故冥豫雖已成,能變則善也。聖人此義,所以勸遷善也。故更不言冥之凶,專言渝之无咎。

“그러므로 명예(冥豫)가 비록 이미 이루어졌으나, 능히 변하면 선한 것이다. 성인이 이 뜻을 발명하심은 선으로 옮겨감(遷善)을 권면하신 까닭이다. 그러므로 다시는 ’명(어둠)’의 흉함을 말하지 않고, 오로지 ’유(변함)’의 무구함을 말하였다.”

주자『주역본의』

本義曰:以陰柔居豫極,為昬冥於豫之象。以其動體,故又為其事雖成,而能有渝之象。

본의에 말하였다. “음유로서 예의 극단에 거하여 ‘즐거움에 혼명한’ 상이 된다. 그러나 그 움직이는 체(動體, 상괘가 진)이기 때문에, 또한 그 일이 비록 이루어졌으나 능히 변함이 있는 상이 된다.”

戒占者如是,則能補過而无咎。所以廣遷善之門也。

“점치는 자에게 이와 같으면 곧 능히 허물을 기워서 무구할 수 있음을 경계하였으니, 선을 옮겨가는 문(遷善之門)을 넓힌 소이이다.”

제가(諸家)의 심층 주석

운봉 호씨(雲峰胡氏)

冥豫,與冥升、迷復同義。聖人不言冥豫之凶,而言成有渝之无咎,廣遷善之門也。

“명예(冥豫)는 지풍승의 ‘명승(冥升)’, 지뢰복의 ’미복(迷復)’과 뜻이 같다. 그러나 성인이 명예의 흉함을 말하지 않고 ’성유유 무구’를 말한 것은, 개과천선의 문을 넓힌 것이다.”

事已成而能變,猶可无咎,則未成而變可知矣。初鳴豫,即斷之以凶,甚於初者,所以遏其惡也;上冥豫,則開之以无咎,恕於終者,所以開其善也。

“일이 이미 이루어졌는데도 능히 변하면 오히려 허물이 없을진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변하는 것은 가히 알 만하다. 초육의 ’명예(鳴豫)’에서 즉시 ’흉’하다고 단정한 것은 처음에 심하게 함으로써 그 악을 막고자 함이요, 상육의 ’명예(冥豫)’에서 ’무구’로써 열어준 것은 마침에 용서함으로써 그 선을 열어주고자 함이다.”

或曰:豫上六變則為晉。晉,明出地上,非冥矣。

“혹자가 말하길 ‘예괘 상육이 변하면 곧 화지진(晉)괘가 된다. 진(晉)은 밝음이 땅 위로 나오는 것이니 어둡지 않게 되는 것이다.’”

중계 장씨(中溪張氏)

上雖處豫之終,昬迷而不知反。然在震之極,動則有能渝變之理。

“상효가 비록 예의 끝에 처하여 혼미하고 돌아올 줄 모르나, 그러나 진(震)의 극단에 있으니 움직이면 곧 능히 변할 수 있는 이치가 있다.”

苟能知逸豫之不可長,幡然而改,安知冥冥者其不昭昭乎?

“진실로 능히 일예(逸豫)가 가히 오래가지 못함을 알아서 반연(幡然)히 고친다면, 명명(冥冥)한 것이 어찌 소소(昭昭)해지지 않음을 알겠는가?”

건안 구씨(建安丘氏) — 육효의 유형학

豫以和豫、逸豫為義。六爻惟九四由豫與卦辭同,至于諸爻皆有心於求豫,則失豫之正,流為逸豫矣。

“예(豫)는 화예(和豫)와 일예(逸豫)로써 뜻을 삼는다. 육효 중에 오직 구사의 ’유예(由豫)’만이 괘사와 같고, 나머지 모든 효는 다 즐거움을 구하는 데 마음이 있어서 예의 바름을 잃고 일예로 흐른 것이다.”

故在豫以四之一陽為主。初以應四而豫,故曰鳴豫凶;三以比四而豫,故曰盱豫悔;五以乘四而不知所豫,故有貞疾恒不死之證。

“그러므로 예에 있어서는 4효 1양을 주인으로 삼는다. 초육은 4에 응하여 즐거워하므로 ’명예 흉’이라 했고, 육삼은 4와 친비하여 즐거워하므로 ’우예 회’라 했고, 육오는 4를 타고 즐거워할 바를 알지 못하므로 ’정질 항불사’의 증험이 있다.”

上去四雖遠,而與震同體,則亦冥然為豫而已。皆有渉乎四者也。

“상육은 4와의 거리가 비록 머나 진(震)과 한 몸이 되어, 또한 어두운 채로 즐거워할 뿐이니 다 4효와 관련된 자들이다.”

惟六二柔順中正,與四无係,獨能介于石不終日焉,葢見幾者也。故爻以貞吉歸之。豫之不可溺也,葢如此。

“오직 육이만이 유순중정하고 4효와 매임이 없어, 홀로 능히 ‘돌에 끼인 듯 날을 마치지 않을’ 수 있었으니 대개 기미를 보는 자이다. 그러므로 효사에서 ’정길’로써 그에게 돌렸다. 즐거움에 가히 빠져서는 안 됨이 대개 이와 같다.”

진재 서씨(進齋徐氏) — 예(豫)의 세 가지 뜻

豫有三義,曰和豫,曰逸豫,曰備豫。

“예(豫)에는 세 가지 뜻이 있으니 화예(和豫), 일예(逸豫), 비예(備豫)이다.”

大象所言,和豫也;六爻所言,逸豫也;豫備不虞,卦爻无此義。傳曰「重門擊柝以待暴客」,葢取諸豫,此備豫也。

“대상전에서 말한 것은 화예(화합하는 즐거움)이고, 육효에서 말한 것은 일예(편안함에 빠짐)이다. 예비하여 근심이 없게 함은 괘와 효에는 이 뜻이 없으나, 「계사전」에 이르길 ’문을 겹겹이 하고 딱따기를 쳐서 폭객을 대비함은 대개 예(豫)에서 취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비예(미리 준비함)이다.”

이 효가 動하면火地晉(35번 괘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