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육오는 곤(坤)의 가운데, 임금의 자리다. 그러나 음(陰)의 부드러움으로 그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 재물을 쌓아 사람을 부리지 않는다. 부유하지 않아도 이웃이 저절로 모여든다(不富以其鄰). 정이천은 “부(富)라는 것은 대중이 돌아가는 바”라고 하면서도, 육오는 겸손과 순함으로 아랫사람을 대하기에 재물을 쓰지 않고도 사람의 친함을 얻는다고 하였다. 임금이 자신을 비우니 사람이 마음으로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효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침벌을 씀이 이롭다(利用侵伐)“고 한다. 겸손한 군주가 칼을 드는 것이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정이천은 말한다. 군주의 도리는 겸손과 부드러움만 숭상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위엄과 무력(威武)이 함께 갖추어진 뒤에야 천하를 품을 수 있다고. 위엄과 덕이 나란히 드러날 때(威徳竝著) 비로소 이롭지 않음이 없다. 겸손의 지나침을 막기 위해 이 뜻을 밝힌 것이다.
주자도 같은 자리에서 읽는다. 따르는 자가 많아도 끝내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정벌하는 것이 이롭다. 소상전은 이를 “복종하지 않는 자를 정벌함(征不服)“이라 매듭짓는다. 문덕(文德)으로도 굽히지 않는 자를 다스리는 것이니, 여기서의 무력은 정복의 욕망이 아니라 질서를 지키기 위한 부득이한 결단이다. 성재 양씨가 순임금의 정벌은 부득이함이었으나 한 무제의 정벌은 욕망이었다고 가른 대목이 핵심이다. 같은 칼이라도 무엇을 위해 뽑느냐가 정의와 침략을 가른다.
삶에의 적용
부드러움은 약함이 아니다. 다만 부드러움이 아무것도 지키지 못할 때, 그것은 방종으로 흐른다. 남을 넉넉히 품는 사람일수록 마음 한가운데 흔들리지 않는 심지가 있어야 한다. 평소에는 나누고 낮추어 사람을 얻되, 선을 넘는 것 앞에서는 단호히 멈춰 세울 줄 알아야 한다. 몸을 닦는 자리에서도 같다. 상대의 힘을 부드럽게 흘려 받아들이는 것이 근본이지만, 끝내 살기를 띠고 들어오는 힘 앞에서는 부드러움 속에 감춰 둔 결단을 내야 나도 상대도 지킬 수 있다. 겸손의 완성은 무를 감추어 두는 데 있지, 무를 잊는 데 있지 않다.
훈장님의 풀이 — 허곡 선생님의 주역 강의에서
"六五는 음유 임금이라 부유함을 비웠으니, 부로 이웃을 부리지 않고도 양심으로 다스려 백성이 따른다(不富以其鄰) — 임금이 배가 고프면서도 백성에게 나눠 주니, 정으로 뭉친 백성이 목숨을 바쳐 따른다. 이런 군대가 가장 무섭다."
"양심으로 다스려도 끝내 안 따르는 놈은 정벌한다(利用侵伐) — 군도(君道)는 겸손만 숭상하면 안 되고, 위무와 문덕을 함께 써야 한다. 사랑으로 안 되면 회초리를 들고, 평화 때도 군인을 길러 둔다."
원문과 주석 — 효사·소상전과 정이천·주자·제가
효사
六五 不富以其鄰 利用侵伐 无不利
육오는 부유하지 않아도 그 이웃과 함께하니(不富以其鄰), 침벌을 씀이 이로우며(利用侵伐), 이롭지 않음이 없다(无不利).
소상전(象傳)
象曰:利用侵伐,征不服也。
상전에 말하였다. “침벌을 씀이 이로움은, 복종하지 않는 자를 정벌함(征不服)이다.”
정이천『이천역전』
富者,衆之所歸。唯財為能聚人。五以君位之尊,而執謙順以接於下,衆所歸也。故不富而能有其鄰也。鄰,近也。不富而得人之親也。
부(富)라는 것은 대중이 돌아가는 바이다. 오직 재물이라야 능히 사람을 모을 수 있다. 그러나 5효는 군위(君位)의 존귀함으로서 겸손과 순함(謙順)을 잡고 아랫사람을 접하니, 대중이 돌아가는 바가 된다. 그러므로 부유하지 않아도 능히 그 이웃을 소유하는 것이다. 이웃(鄰)은 가까움이니, 부유하지 않아도 사람의 친함을 얻은 것이다.
為人君而持謙順,天下所歸心也。然君道不可專尚謙柔,必須威武相濟,然後能懷服天下。故利用行侵伐也。威徳竝著,然後盡君道之宜,而无所不利也。葢五之謙柔,當防於過,故發此義。
인군이 되어 겸순을 지키니 천하가 마음을 돌리는 바이다. 그러나 군주의 도리는 오로지 겸손과 부드러움만 숭상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위엄과 무력(威武)으로 서로 구제한 연후에야 능히 천하를 품고 복종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침벌을 행함이 이로운 것이다. 위엄과 덕이 나란히 드러난 연후에야 군도의 마땅함을 다하여 이롭지 않은 바가 없으니, 대개 5효의 겸유는 마땅히 지나침을 막아야 하므로 이 뜻을 밝힌 것이다.
(소상전 정전) 征其文徳謙巽所不能服者也。文徳所不能服,而不用威武,何以平治天下?非人君之中道,謙之過也。
문덕과 겸손(謙巽)으로 능히 복종시킬 수 없는 자를 정벌하는 것이다. 문덕으로 복종시킬 수 없는데도 위무를 쓰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천하를 평치하겠는가? 그것은 인군의 중도가 아니요, 겸손의 지나침(謙之過)이다.
주자『주역본의』
以柔居尊,在上而能謙者也。故為不富而能以其鄰之象。葢從之者衆矣,猶有未服者,則利以征之,而於他事亦无不利。人有是徳,則如其占也。
유(柔)로서 존위에 거하여 위에 있으면서 능히 겸손한 자이다. 그러므로 ‘부유하지 않아도 능히 그 이웃과 함께하는’ 상이 된다. 대개 따르는 자가 많으나 오히려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를 정벌함이 이롭고, 다른 일에 있어서도 또한 이롭지 않음이 없다. 사람이 이 덕이 있으면 곧 그 점과 같다.
제가(諸家)의 주석
운봉 호씨(雲峰胡氏):
謙之一字,自禹征有苗,而伯益發之。六五一爻不言謙,而曰利用侵伐,何也?葢不富者,六五虚中而能謙也;以其鄰者,衆莫不服五之謙也。如此而猶有不服者,則征之固宜。抑亦以戒夫謙柔之過,或不能自立者也。故六五獨不言謙。
’겸’이라는 글자는 우왕이 유묘를 정벌할 때 백익이 밝힌 것이다. 그런데 육오 한 효에서는 ’겸’을 말하지 않고 도리어 ’침벌함이 이롭다’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불부(不富)’는 육오가 허중(虚中)하여 능히 겸손한 것이요, ’이기린(以其鄰)’은 대중이 5효의 겸손에 복종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를 정벌함이 진실로 마땅하다. 또한 이로써 겸유가 지나쳐 혹 스스로 서지 못하는 자를 경계한 것이니, 그러므로 육오만 유독 ’겸’자를 말하지 않았다.
중계 장씨(中溪張氏):
六五謙柔之主,而利用侵伐,毋乃内謙而外好勝乎?豈知惟辟作福作威,而威武乃文徳之輔助也。其有梗化而不服者,如之何而勿征?倘君道專用謙柔,則流於姑息,失之驕縱,乃謙之過也,非謙之益也。
육오는 겸유한 군주인데 침벌을 씀이 이롭다 하니, 안으로는 겸손하나 밖으로는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찌 알겠는가, 오직 임금만이 복을 짓고 위엄을 지으니 위무(威武)는 곧 문덕의 보조임을. 교화를 막고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는데 어찌 정벌하지 않겠는가? 만약 군도가 오로지 겸유만을 쓴다면 고식(姑息)으로 흘러 교만과 방종을 잃게 되니, 이는 겸손의 허물이지 겸손의 유익함이 아니다.
성재 양씨(誠齋楊氏):
征不服者,不服而征,不得已爾。舜征苗,不得已也;武征匈奴,豈不得已乎?
’정불복’이라는 것은 복종하지 않아서 정벌하는 것이니 마지못해서 하는 것(不得已)일 뿐이다. 순임금이 유묘를 정벌한 것은 부득이한 것이었고, 한 무제가 흉노를 정벌한 것은 어찌 부득이한 것이었겠는가.
한상 주씨(漢上朱氏):
征者,上伐下也,以正而行。司馬法曰:負固不服則侵之。聖人慮後世觀此爻有干戈妄動者,故發之曰征不服。
정(征)은 위가 아래를 치는 것이니 바름(正)으로 행하는 것이다. 사마법(司馬法)에 ’험고함을 믿고 복종하지 않으면 그를 침한다’고 했다. 성인이 후세에 이 효를 보고 함부로 전쟁을 일으키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시어, 이를 밝혀 ’복종하지 않는 자를 정벌한다’고 하신 것이다.
태극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