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萃)의 맨 끝자리다. 상육은 음유한 몸으로 임금(구오)보다 더 높은 꼭대기에 올라 지위도 없고 함께해 줄 이도 없는 고립무원에 처했다. 모임을 구해도 아무도 더불어 주지 않으니, 궁색함이 극에 이르러 탄식하고 한숨지으며(齎咨) 눈물 콧물을 쏟는다(涕洟). 태(兌)의 입이 벌어진 슬픈 모양이요, 저수지가 흘러내리는 눈물의 상이다. 잔치가 끝나고 홀로 남은 텅 빈 연회장, 모임(萃)의 절정이 지나 흩어짐(散)이 시작되는 가장 쓸쓸한 전환점의 자리다.
그런데 주역은 이 비참한 장면을 두고 “허물이 없다(无咎)“고 한다. 기뻐하며 방자한 자에게는 반드시 재앙이 오지만, 우는 자·근심하는 자는 제 처지를 직시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주자가 밝혔듯 이 무구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반드시 우환(憂戚)의 마음으로 처신한 뒤에야 비로소 허물을 면하는 조건부 무구다. 태(兌)의 기쁨이 극에 달한 자리에서 그 기쁨을 뒤집어 근심으로 돌이킬 줄 아는 능력, 그것이 무구의 열쇠다.
사람들이 나와 절교하는 것이 누구 때문인가. 정이천은 그 끊어짐이 제 몸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자초한 것(由己自取)이니 또 장차 누구를 탓하겠느냐고 못 박는다. 소인은 처하는 자리를 늘 잃어 탐욕을 따르다 곤궁에 빠지면 넘어지고 엎어져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군자는 의(義)가 아니면 거하지 않고 불행과 곤궁이 닥쳐도 태연히 받아들인다. 남 탓으로 펄펄 뛰는 대신 제 자리를 아파하는 정직한 눈물, 그것이 소인의 발악과 군자의 자성을 가르는 경계선이다.
삶에 적용하자면, 한때 사람이 모여들던 조직이나 관계가 저물고 하나둘 떠나갈 때, 억지로 붙잡거나 체면을 세우려 발버둥치지 말라. 울어도 좋고 탄식해도 좋다. 다만 그 울음이 남을 향한 원망이 아니라 제 처지를 직시하는 우환의 눈물이어야 한다. 몸이 한계에 달했을 때 이를 악물고 버티기보다 크게 숨을 내쉬며 온몸의 긴장을 풀어 정직하게 비워내라. 눈물과 콧물이 신체의 정직한 배출이듯, 비움(散) 없이는 다음의 채움(萃)도 없다. 받아들임이 회복의 첫걸음이다.
훈장님의 풀이 — 허곡 선생님의 주역 강의에서
上六은 모임의 끝(萃極)에 임금(九五)보다 더 높이 올라가 통치권을 넘어가니 — 홀로 외톨이가 되어 모임을 구해도 더불어 줄 이가 없다(求萃而莫之與). 그래서 궁지에 몰려 슬퍼 탄식하고(齎咨, 탄식) 눈물 콧물을 흘린다(涕洟, 슬피 욺) — 태(兌)가 입을 벌린 슬픈 모양이요 저수지가 흘러내리는 눈물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와 절교함이 누구 때문이냐 — 내 몸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취한 것이니(由己自取), 또 장차 누구를 원망하랴(又將誰咎). 정이천은 '전부 내 탓이라 핑계·의지할 데가 없다' 했고, 주자는 '슬픔의 대가를 치렀으니 죄가 없다' 했으니 — 그 뿌리가 맞다.
萃의 끝이요 태(兌)의 극이라 — 모임이 다하면 흩어지고(萃終則散), 기쁨이 극에 이르면 슬픔이 온다(喜極而悲). 이것이 이치의 떳떳함이다. 이를 알면 세상 살기가 편하니 — '다 그런 거지' 한다. 사회를 살면 이것을 꼭 알아야 한다 —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만나니(聚散有時), 절대 미련을 두지 말라. '서운하다·그립다'는 정(情)이지만, 세상은 정으로 되는 게 아니다.
군자는 처한 곳에 따라 행하니(君子素其位而行) — 의가 아니면 거기 거하지 않고, 불행·위태·곤궁이 와도 태연히 스스로 편안히 여겨(泰然自安) 그 마음을 더럽히고 복잡하게 하지 않는다. 왜 그렇게 하는가 — 병을 막기 위함이다. 피곤한 인생을 살면서 마음까지 고통을 주면 바로 병이 생긴다. 불안하면 불안한 대로 받아들여라 — 첫째가 받아들임(受)이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펄펄 뛰면 도리어 더해지니 — 받아들이고 고칠 생각을 해야 한다.
원문과 주석 — 효사·상전과 정이천·주자·제가
효사(爻辭)
上六:齎咨涕洟, 无咎。
상육은 탄식하고 한숨지으며(齎咨) 눈물 흘리고 콧물 흘리니(涕洟), 허물이 없다(无咎). — 齎(가져올 재, 또 嗟의 음)·咨(탄식할 자)·涕(눈물 체)·洟(콧물 이).
상전(象傳)
象曰:齎咨涕洟, 未安上也。
상(象)에 이르기를, 탄식하고 눈물 콧물 흘림은, 위(上)에서 편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이천 『이천역전』
六說之主, 隂柔小人, 說髙位而處之, 天下孰肯與?求萃而人莫之與, 其窮至於齎咨而涕洟也。齎咨, 咨嗟也。人之絶之, 由已自取, 又將誰咎?為人惡絶, 不知所為, 則隕穫而至嗟涕, 真小人之情狀也。
상육은 열(說·悅, 기쁨)의 주인이다. 음유한 소인이 높은 자리를 기뻐하여 거기에 처하면 천하에 누가 기꺼이 함께하겠는가. 모임을 구하되 사람들이 더불어 주지 않으니 그 궁핍함이 탄식하고 눈물 콧물에 이른다. 재자(齎咨)는 자차(咨嗟, 한탄)이다. 사람들이 그를 끊어버림이 자기 스스로 자초한 바인데 또 장차 누구를 탓하겠는가. 남에게 미움받아 끊어져 어찌할 바를 모르면 당황하여 넘어지고 헤매다 탄식하며 눈물에 이르니, 참으로 소인의 진짜 꼴(情狀)이다.
정이천 상전 해설:
小人所處常失其宜, 既貪而從欲, 不能自擇安地, 至於困窮, 則顛沛不知所為。六之涕洟, 蓋不安於處上也。君子慎其所處, 非義不居, 不幸而有危困, 則泰然處之。
소인이 처하는 바는 늘 그 합당함을 잃어, 탐욕으로 욕심을 따르니 스스로 편안한 땅을 택하지 못한다. 곤궁에 이르면 넘어지고 쓰러져 어찌할 바를 모른다. 상육의 눈물 콧물은 대개 위(上)에 처함이 편안하지 못한 것이다. 반면 군자는 처하는 바를 삼가 의(義)가 아니면 거하지 않으며, 불행히 위태롭고 곤란한 일이 있어도 태연하게 처리한다.
주자 『주역본의』
處萃之終, 隂柔无位, 求萃不得, 故戒占者必如此而後可以无咎也。
췌(萃)의 끝에 처하여 음유하고 지위가 없어 모임을 구하되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점치는 자에게 경계하여, 반드시 이와 같이(탄식하고 근심하며) 한 뒤에야 허물이 없을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제가(諸家)
태진 봉씨(泰縉雲馮氏):
萃極而散, 窮无所歸之象。齎咨, 嗟也;涕洟, 悲泣也。
모임이 극에 달하면 흩어지니, 궁핍하여 돌아갈 곳이 없는 상이다. 재자는 탄식이요, 체이는 슬피 우는 것이다.
전씨(錢氏):
初之號, 三之嗟, 上之齎咨涕洟, 皆隂柔之常態也。
초효의 부르짖음, 삼효의 탄식, 상효의 재자체이는 모두 음유의 항상 그러한 모습이다.
평암 항씨(平庵項氏):
齎咨, 兊口之嘆;涕洟, 兊澤之流。
재자는 태(兌)의 입으로 내뱉는 탄식이요, 체이는 태(兌)의 못이 흘러내리는 것이다.
정씨(鄭氏):
自目曰涕, 自鼻曰洟。
눈에서 나오는 것을 체(涕, 눈물)라 하고, 코에서 나오는 것을 이(洟, 콧물)라 한다.
건안 구씨(建安丘氏):
上六居萃之終, 兊之極, 聚終而散, 說極而悲, 理之常也。上六苟能於聚終說極之時, 而以憂戚處之, 則无咎也。
상육은 췌의 끝에 거하고 태의 극에 있으니, 모임이 끝나면 흩어지고 기쁨이 극에 달하면 슬퍼지는 것은 이치의 당연함이다. 상육이 진실로 모임이 끝나고 기쁨이 극에 달한 때에 우환과 근심의 마음(憂戚)으로 처신하면 허물이 없다.
운봉 호씨(雲峰胡氏):
三求萃不得故嗟, 上隂柔无位亦求萃不得故齎咨涕洟。然居兊終, 能反兊之說而憂者, 故无咎。臨六五既憂之无咎, 亦下兊之終也。
삼효는 모임을 구하되 얻지 못해 탄식하고, 상효는 음유하여 지위가 없으면서 역시 모임을 구하되 얻지 못해 재자체이한다. 그러나 태(兌)의 끝에 거하여 능히 태의 기쁨을 뒤집어 근심할 수 있는 자이므로 허물이 없다. 임(臨)괘 육오의 ‘기우지무구’ 역시 아래 태(兌)의 끝이다.
중계 장씨(中溪張氏):
五為萃主而上乘之, 故其心憂懼, 未敢自安於上也。
오효가 췌의 주인인데 상효가 그 위에 타고 있으니, 그 마음이 근심하고 두려워 감히 스스로 위에서 편안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융산 이씨(隆山李氏):
萃六爻, 或有應无應, 或當位不當位, 而辭皆曰无咎, 乃天地萬物之真情。真情相合, 吉多凶少, 故也。兹萃之所以亨歟。
췌 괘의 6효는 혹 응이 있고 혹 응이 없으며, 혹 제자리를 얻고 혹 얻지 못하지만, 효사가 모두 ’무구’라 하였으니 이는 천지 만물의 진정(真情)이다. 참된 감정이 서로 합하면 길함이 많고 흉함이 적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췌(萃)가 형통하는 까닭이 아니겠는가.
태극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