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하고 또 겸손한 사람
초육은 겸괘의 맨 아래, 하괘 간(艮, 산)의 가장 낮은 자리에 음(陰)으로 앉아 있다. 겸손을 말하는 괘 안에서도 가장 낮은 곳이니, 겸손하고 또 겸손한(謙謙) 자리다. 너무 낮아서 누구도 그를 경계하지 않고, 오히려 모두가 그를 돕는다. 정이천은 이를 “스스로 낮고 아래에 처함이 지극한 것”이라 했고, 주자는 “유순함으로 아래에 처하니 겸손의 지극함이요 군자의 행실”이라 풀었다.
효사의 “용섭대천(用涉大川)“은 “이섭대천(利涉大川)“과 구별된다. 임천 왕씨의 지적처럼, 이섭은 재주와 때가 두루 맞아 누구에게나 이로운 것이고, 용섭은 이 겸손이라는 방법을 써야 비로소 큰 내를 건널 수 있음을 말한다. 아직 힘이 없는 초육에게 위험을 건너게 하는 것은 재주가 아니라 자세다. 앞을 다투지 않고 물러설 줄 아는 태도가 곧 험난함을 통과하는 배가 된다.
쌍호 호씨의 비유가 이 이치를 밝힌다. 내를 건널 때는 더디고 신중함을 귀하게 여기지 급하고 빠른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겸손하게 뒤로 물러나 남들을 먼저 태우고 맨 나중에 배에 오르는 사람은, 내릴 때는 문 쪽에 있어 도리어 가장 먼저 언덕에 오른다. “뒤에 타는 자가 먼저 내린다.” 낮춤은 손해처럼 보이지만, 손해를 잘 보는 사람이 도리어 이익을 잘 보는 법이다.
삶에의 적용
소상전은 “낮음으로써 스스로를 기른다(卑以自牧)“고 말한다. 자목(自牧)은 소나 양을 치듯 내 안에서 날뛰는 교만과 객기(客氣)를 길들여 순하게 하는 일이다. 남헌 장씨의 말처럼, 목소리 크고 으스대는 것을 기가 세다고 착각하지만 그것은 한때의 객기일 뿐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아니다. 참된 기운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천천히 쌓아 올린 내공에서 나온다. 무게중심을 아래로 내리는 하세(下勢)의 수련처럼, 자세를 낮출수록 상대가 나를 흔들 수 없고 물살이 나를 쓸어가지 못한다. 오늘 급한 일 앞에서 서두르지 말고 한 호흡 낮추는 것, 그것이 위험을 건너 사는 길이다.
훈장님의 풀이 — 허곡 선생님의 주역 강의에서
"初六은 겸손하고 또 겸손한 군자라(謙謙) — ‘用涉大川’은 ‘利涉大川’과 다르다. 利涉은 운과 능력이 다 맞아 누구에게나 이로운 거고, 用涉은 이 겸손의 방법을 써야 큰 내를 건너는 거다. 初六은 아직 무능하니 用涉이다."
"손해를 잘 보는 사람이 도리어 이익을 잘 본다 — 이익만 보려는 사람은 손해를 못 봐 실패가 많지. 급하면 귀하지 못하다(急則不貴), 천천히 조심하면 만 가지에 하나도 실수가 없다."
원문과 주석 — 정이천『이천역전』·주자『주역본의』와 제가(諸家)
효사(爻辭)
初六 謙謙君子 用涉大川 吉
초육은 겸손하고 또 겸손한 군자이니, (이로써) 큰 내를 건너는 데 쓰면 길하다.
소상전(象傳)
象曰:謙謙君子,卑以自牧也。
상전에 말하였다.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는 낮음으로써 스스로를 기르는(다스리는) 것이다.”
정이천『이천역전』
初六以柔順處謙,又居一卦之下,為自處卑下之至,謙而又謙也,故曰謙謙。
초육은 유순함으로써 겸(謙)에 처하고, 또 한 괘의 아래에 거하니, 스스로 낮고 아래에 처함이 지극한 것이다. 겸손하고 또 겸손한지라 그러므로 ’겸겸’이라 하였다.
能如是者,君子也。自處至謙,衆所共與也。雖用涉險難,亦无患害,况居平易乎?何所不吉也?
능히 이와 같이 하는 자는 군자이다. 스스로 처함이 지극히 겸손하면 대중이 함께 더부는 바이다. 비록 험난함을 건너는 데 쓰더라도 또한 근심과 해로움이 없을 것인데, 하물며 평이한 곳에 거함에랴? 길하지 않음이 있겠는가?
初處剛而以柔居下,得无過於謙乎?曰:柔居下乃其常也。但見其謙之至,故為謙謙,未見其失也。
(문) 초육은 강(剛)에 처해 있으면서 유(柔)로서 아래에 거하니 겸손함에 지나침이 없겠는가? (답) 유가 아래에 거함은 곧 그 떳떳함이다. 단지 그 겸손함의 지극함만을 볼 뿐이므로 ’겸겸’이라 한 것이지, 그 과실은 보지 못한다.
정이천은 소상전을 이렇게 풀었다.
謙謙,謙之至也。謂君子以謙卑之道自牧也。自牧,自處也。詩云「自牧歸荑」。
’겸겸’은 겸손의 지극함이다. 군자가 겸비한 도로써 자목(自牧)함을 이른다. ’자목’은 자처(自處)함이다. 『시경』에 이르길 “스스로 목축하여 삘기(풀)를 보낸다”라고 했다.
주자『주역본의』
本義曰:以柔處下,謙之至也,君子之行也。以此涉難,何往不濟?故占者如是,則利以涉川也。
본의에 말하였다. “유(柔)로서 아래에 처하니 겸손의 지극함이요 군자의 행실이다. 이것으로써 어려움을 건너면 어딜 간들 구제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점치는 자가 이와 같으면 곧 섭천함이 이롭다.”
제가(諸家)의 주석
동계 왕씨(童溪王氏)
童溪王氏曰:六,謙德也;初,卑位也。以謙德而處卑位,謙而又謙者也。故曰謙謙。
동계 왕씨가 말하였다. “륙(六)은 겸손한 덕이요 초(初)는 낮은 지위이다. 겸덕으로써 비위에 처하니 겸손하고 또 겸손한 자이다. 그러므로 ’겸겸’이라 했다.”
난정서(蘭氏廷瑞)
蘭氏廷瑞曰:用涉與利涉不同。用涉,自我用之;不若利之无往不濟也。
난정서가 말하였다. “’용섭(用涉)’과 ’이섭(利涉)’은 같지 않다. ’용섭’은 자아로부터 그것을 쓰는 것이니, (상황 자체가 좋아서) 어딜 가든 구제되지 않음이 없는 ’이(利)’와는 같지 않다.”
임천 왕씨(臨川王氏)
臨川王氏曰:利涉者,其才其時利於涉耳。用涉者,用此以涉然後吉也。
임천 왕씨가 말하였다. “’이섭’은 그 재주와 때가 건너는 데 이로울 뿐인 것이고, ’용섭’은 이것(겸손)을 써서 건넌 연후에야 길한 것이다.”
쌍호 호씨(雙湖胡氏)
雙湖胡氏曰:涉川貴於遲重,不貴於急速。用謙謙之道以渉川,只是謙退居後而不争先,自然萬无失一,故吉。後登舟,亦有先登㟁之利。謙固自多利也。
쌍호 호씨가 말하였다. “내를 건널 때는 더디고 신중함을 귀하게 여기고 급하고 빠른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겸겸의 도’를 써서 섭천한다는 것은, 단지 겸손하게 물러나 뒤에 거하고 먼저를 다투지 않는 것이니, 자연히 만에 하나도 실수가 없으므로 길한 것이다. 배에 뒤늦게 오르는 것이 또한 언덕에 먼저 오르는 이로움이 있는 것이다. 겸손은 진실로 스스로 이로움이 많다.”
운봉 호씨(雲峯胡氏)
雲胡氏曰:謙主九三,故三爻辭與卦辭皆稱君子有終。初亦曰君子,何也?三在下卦之上,勞而能謙,在上之君子也。初在下卦之下,謙而又謙,在下之君子也。在上者尊而光,在下者卑而不可踰,皆所以為君子之終也。用渉大川吉,雖用以濟患可也。况平居乎?
운봉 호씨가 말하였다. “겸괘의 주인은 구삼이다. 그러므로 삼효사와 괘사에서 모두 ’군자유종’을 칭했다. 그런데 초육 또한 ’군자’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삼효는 하괘의 위에 있어 공로가 있으면서 능히 겸손하니 위에 있는 군자이다. 초효는 하괘의 아래에 있어 겸손하고 또 겸손하니 아래에 있는 군자이다. 위에 있는 자는 존귀하며 빛나고, 아래에 있는 자는 낮으나 가히 넘을 수 없으니, 모두 군자의 마침이 되는 소이이다. ’용섭대천 길’이라 하니, 비록 환난을 구제함에 써도 가하거늘 하물며 평상시 거처함에 있어서랴?”
남헌 장씨(南軒張氏)
南軒張氏曰:謙謙君子,卑以自牧。如牧牛羊然,使之馴服,方可以言謙。今人往往反以驕矜為飬氣。此特客氣,非浩然之氣也。
남헌 장씨가 말하였다. “겸겸군자가 낮음으로써 스스로 기른다는 것은, 마치 소와 양을 치는 것과 같아서 그것들로 하여금 길들여 복종하게 하여야 바야흐로 가히 겸손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왕왕 도리어 교만하고 뽐내는 것으로써 기를 기른다고 여긴다. 이것은 다만 객기일 뿐이며 호연지기가 아니다.”
건안 구씨(建安丘氏)
建安丘氏曰:牧,飬也。飬德之地,未有不基於至卑。所飬者至,則愈卑而愈不卑矣。
건안 구씨가 말하였다. “목(牧)은 기르는 것이다. 덕을 기르는 땅은 지극히 낮은 곳에 기초하지 않음이 없다. 기르는 바가 지극해지면 곧 더욱 낮추어도 더욱 낮아지지 않는다(비굴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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